붉은 심장의 도시, 피렌체

[서평] 건축의 의미를 짚어본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

등록 2006.07.31 10:39수정 2006.07.31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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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의 겉표지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의 겉표지프로네시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묘사된 피렌체는 판타지다. 10년 후를 기약하며 재회를 꿈꾸는 주인공들에게 그곳은 사랑이 실현되는 신기루이자 약속의 땅이었다.

피렌체의 두오모(대성당)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많은 이의 공감을 자아내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피렌체에 가면 사랑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냉정과 열정만을 남긴 채.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는 붉은 도시 피렌체의 전모를 다룬다. 소설 속 주인공이 품고 있는 낭만적인 배경으로서만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과 역사를 넘나든 끝에 중세의 피렌체를 생생하게 복원해낸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을 연상케 하는 피렌체는 르네상스 시대에 가장 활짝 핀 꽃이었다. 14, 15세기 유럽 중세 문화를 지배했던 양식부터 서양 근대 문화의 서막을 열었던 피렌체의 살아있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저자는 피렌체인들의 생활, 문화, 정치, 경제 상황을 건축과 같은 선상에서 접목한다.

건축물에 한정된 제한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건축에서 파생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려는 게 저자의 의도. 저자는 당시 건축이 대중의 삶과 어떻게 접점을 이루고 도시가 어떤 메커니즘에 따라 유기적으로 숨을 쉬는지에 주목한다. 역사를 재확인하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가 오늘의 피렌체를 이해하는 창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불멸의 피렌체, 그 열정의 추구

"중세 피렌체는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는 아니었지만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였다. 13세기 초 피렌체의 인구는 1만명 정도로, 인접한 도시 피사(Pisa)보다도 작은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였으나 단테와 조토가 활동하던 13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인구 10만명의 중세 초대형 도시로 급성장한다."


중세 피렌체의 건축은 곧 피렌체의 부를 상징한다. 도시가 팽창하면서 피렌체 정부는 기존의 성벽을 허물고 훨씬 웅장한 성을 쌓으면서 자신들의 스케일을 과시한다.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중세 유럽의 도시들에 비해 건축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던 피렌체는 건설업에 국운을 걸 정도로 심혈을 기울였고 사회적 제도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하늘을 향해 솟구쳐 있는 밀라노 대성당의 첨탑은 피렌체의 위용을 웅변하고,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던 '피렌체 대성당'은 '지고는 못 사는' 피렌체인의 자존심과 막강한 부가 결합된 결과였다.

건축으로 자신들의 존재감과 열정을 내비쳤던 피렌체인의 의식은 한 시대를 풍성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으며, 건축을 꽃피운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기로 기록된다.


자긍심, 도시를 지배하는 기운

피렌체는 본래 로마의 퇴역 군인들을 위해 건설된 신도시였다. 당시 명칭은 꽃피는 절기에 건설된 도시라는 의미로 '플로렌티아(Florentia)'였다. 오늘날 피렌체의 영어식 표기인 플로렌스(Florence)도 여기서 유래한 것.

예술사에서 피렌체는 성지로 추앙받는다. 단테, 보카치오 같은 대문호가 활동했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등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미술가로 명명된 예술가들이 피렌체에서 그들의 재능을 마음껏 펼쳤다. 피렌체는 그들의 백색 도화지였다.

그러나 피렌체의 이런 예술적인 가치 이면에는 정치적 혼란도 수반됐다.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리된 지배계급의 분파는 반란과 소요를 일으켰고 사회적 격동의 단초를 제공했다. 하지만 시민들은 자주적인 시민사회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적극적인 정치 참여를 몸소 실천하며 반목의 세월을 씻었다. 도시 전체를 감도는 그런 참여의 흐름 속에 피렌체는 유럽의 다른 도시를 압도하면서 웅비하며 위용을 떨쳤다.

피렌체의 건축은 특정 계층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지배계층의 부와 일꾼들의 노동력, 그리고 웅장한 건물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이 맞물리면서 역사를 만들어냈다.

피렌체를 느끼는 건 시각이다. 하지만 시각으로는 피렌체 전부를 느낄 수 없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뎌내며 역사를 건너 온 건축물을 단지 시각에만 의존해 보려는 것은 제대로 된 경험이 아니다.

저자는 피렌체와 피렌체인의 삶을 "느껴보라"고 권고한다. 피렌체의 건축물에서 인간적이고 대중적인 면을 이해하고 거칠게 몰아쉬는 건축물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자는 의미다.

시간이 정지된 박물관, 피렌체 - 건축사 이야기

양정무 지음,
프로네시스(웅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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