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2회

등록 2006.08.02 08:26수정 2006.08.02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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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림(竹林)이었다. 곧게 뻗어 올라간 대나무들은 높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큰 키를 자랑하고 있었고, 너무나 울창하여 땅에는 햇빛조차 스며들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한 울창한 죽림이 십 여리 뻗어있는 동쪽에는 특이하게도 기껏 자라야 일장을 넘지 않을 자죽(紫竹)이 자라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하게도 울타리를 쳐 놓은 양 일정 반경을 빙 둘러 자라고 있었는데 그 형태로 보아 야생으로 자란 자죽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곳에는 조그만 모옥이 있었고 자죽은 그 모옥의 울타리임에 틀림없었다. 죽림을 헤치고 이어진 길은 그 자죽으로 둘러싸인 모옥의 문 앞으로 이어졌고, 그 문 앞에는 이런 궁벽한 곳과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보였다.


한대의 마차와 다섯 명의 인물. 그들은 마차를 호위하듯 한결같이 마차 주위에 윤기가 흐르는 건장한 말을 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나 값이 나갈 것 같은 명마(名馬) 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을 타고 있는 인물들에 비하면 그리 감탄할만한 일도 아니었다.

마차 앞에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인물은 오십 전후로 보였다. 백색의 무복 밖으로 배갑(背甲)과 흉갑(胸甲) 만으로 이어 만든 갑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본래의 기능보다는 그의 신분과 지위를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였다.

그의 두 눈은 변화가 없는 가운데서도 감히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을 담고 있었으며, 곧게 뻗은 코와 두툼한 입술, 그리고 짧은 수염이 나 있는 각진 턱 선은 매우 강인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의 뒤로 마차를 호위하듯 그 양 옆에 말을 타고 있는 인물들도 눈에서 정광이 번뜩이고 있어 범상치 않은 인물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들이 호위하는 듯이 보이는 마차는 사치스러울 정도의 화려한 모양을 갖추고 있어 그것을 타는 사람이 대단한 신분임을 짐작케 했고, 매우 견고하게 만들어져 안쪽에 천이 늘어진 조그만 창을 제외하고는 창칼이나 활도 뚫지 못할 것 같았다.

그들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벌써 다섯 시진 째였다. 해가 뜰 무렵 이곳에 도착한 그들은 해가 질 무렵인 지금까지 도착할 때와 같은 모습으로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서 있는 것이다.

주위는 어느새 어두워져 가고 모옥의 뒤쪽에서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림을 스쳐가는 바람으로 인해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귀곡성이 들리는 듯했다. 스산한 느낌이 들기도 하건만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끔 말 투레질이 들리지 않았다면 석상을 세워 놓았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구수한 음식 내음이 그들의 코를 간지를 즈음 그들의 눈에는 모옥 뒤에서 걸어 나오는 여인이 보였다. 소박하게 무명 베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매우 귀품이 있었고, 그녀의 미모 또한 놀라울 정도였다.

머리는 곱게 빗어 뒤로 넘겨 묶었는데 은(銀)으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계화(桂花)가 동여맨 머리에 꽂혀 있었고, 초승달 같은 아미에 약간 가늘어 보이는 눈과 오똑한 코는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한 가지 흠이라면 아름다움 속에 낮선 사람이라면 말을 걸지 못하게 하는 차가움이 배어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 앞으로 다가와서는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나직하게 탄식을 터트렸다.

"당신들은 무척이나 고집이 센 분들이군요."

그녀의 말에도 그들은 미동이 없었다. 그저 수장(首將)으로 보이는 인물이 시선을 던진 게 고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미 오라버니께서는 귀 보(堡)의 청을 거절했어요. 또한 당신들이 이곳에서 기다린다고 해서 오라버니의 마음이 달라질 것 같진 않군요."

그제야 중년인의 두툼한 입술이 열렸다.

"그것은 함곡선생(含曲先生)의 마음이고, 노부는 오직 그 분을 정중히 모시고 오라는 주공의 명령을 받들 뿐이오."

그는 특히 '정중히'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그것은 함곡선생을 반드시 데리고 가야한다는 것이고, 그의 뜻에 반하여 무력을 동원하거나 억지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 한 언제까지 이곳에서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말에 가볍게 탄식했다.

"하아... 우리 남매가 일기당천(一騎當千) 무적신창(無敵神槍) 좌 어르신을 문 앞에 다섯 시진이나 세워두었다는 사실을 알면 세상 사람들은 틀림없이 우리를 욕할 거예요."

무림에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남의 밑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세인의 존경을 받기 어렵다. 하지만 무적신창 좌등(佐登)이란 인물은 예외적인 인물이었다. 남의 수하로 있으면서도 세인들의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다.

그를 표현하는데 있어 언제나 그의 외호 앞에는 일기당천(一騎當千)이란 말이 붙는다. 그리고 그러한 표현이 적합한 인물은 오직 그 뿐이었다.

"그것 역시 그들의 일일 뿐이오."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한 가지 목적 밖에 없는 사람 같았다. 그것은 자신이 모시는 한 사람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세인들이 무어라 하던, 자신이 아무리 치욕적인 대접을 받던 그것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는 진정으로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도저히 참지 못할 굴욕도 이겨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 인내심이 그를 죽음과 같은 고통으로 몰고 간다 할지라도 그는 이미 그 고통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헌데 그 때였다. 멀리서 급박한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 말을 타고 죽림을 헤치며 빠르게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차 뒤쪽에 있던 두 명의 인물들이 처음으로 고개를 뒤로 돌리며 다가드는 말발굽 소리의 임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보는 듯했다.

히이--이--- 잉----

급히 말을 몰고 온 사내는 기마술이 절정에 달한 듯했다. 죽림을 벗어나 급하게 꺾인 모옥 앞을 당도한 저런 속도라면 마차와 부닥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말고삐를 쥐여 당기는 솜씨는 눈을 뜨고 보아도 믿지 못할 정도여서 말이 앞발을 들어 올림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좌등의 옆으로 떨어지며 부복했다.

"속하 진운청(陳雲菁)이 대주(隊主)를 뵈오이다."

나이는 서른 중반. 경장을 입어 겉으로 보이는 그의 몸은 군살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고 건장한 듯했다.

"무슨 일인가?"

좌등은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물었다. 고개를 드는 사내의 얼굴에 하나의 감정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노였다. 모옥을 향한 분노였고, 모옥에 살고 있는 인간들에 대한 분노였다.

이 중원 천지에 자신이 모시는 무적신창 좌등어른을 이리 모욕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어제 오후에 보에서 출발했으나 좌어른의 성격으로 보아 저녁 늦게 찾는 것은 비례(非禮)라 하여 하루를 묵고 아마 오늘 동이 트는 시각쯤 이곳에 도착했을 터였다. 좌등 일행이 어둑해지기 시작한 지금까지 줄잡아 다섯 시진 동안 이곳에서 이렇게 서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자신에게 명을 내렸다면 아마 이 모옥에 사는 자의 목을 치고 그 목을 가지고 보(堡)로 돌아갔을 터였다. 비록 명을 이행하지 못해 보의 율법에 따라 참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설마 했었다. 보주(堡主)께서 아직 이럴 것이라 예상을 하면서 품속에 안고 있는 목갑(木匣)을 건네준 세 시진 전만 하더라도 믿지 않았다. 아무리 명리를 떠나 고고한 학처럼 살고 있다는, 그래서 어떠한 부름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함곡선생이라 할지라도 좌등의 무게는 그리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헌데 문에도 들어서지 못하게 하는 문전박대라니... 그는 당장이라도 모옥 안으로 뛰어 들어가 함곡선생이란 자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보의 위명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 진심으로 굴복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저런 대접을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굴욕보다도 더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품속에서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진 목갑 하나를 꺼내 머리 위로 올렸다.

"보주께서 함곡선생께 이것을 전하라 하셨소이다. 이것을 받고 반시진 안에 대답이 없다면 그냥 돌아오라고 하셨소이다."

보주의 분부는 분명 그러했다. 길이는 한자, 폭은 세치 정도의 목갑. 무엇이 들었는지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진운청은 그냥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 이것이 무엇인지 모르나 이것을 받고도 응하지 않는다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를 베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그의 분노에 대한 충분한 대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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