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회

등록 2006.08.03 08:11수정 2006.08.0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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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크지 않은 모옥 앞이라 진운청의 말은 안에서도 들었을 것이다. 좌등은 그가 내미는 목갑을 받아 들고는 정중하게 앞에 서있는 여인을 향해 내밀었다.

"함곡선생께 전해주시겠소?"


그 목갑을 바라보는 여인의 얼굴에 처음으로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저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오라버니의 마음을 움직일 무언가가 들어있을 것이다. 여인의 직감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그녀의 불길한 예감은 곧 현실로 드러났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 들고 몸을 돌리기도 전에 한쪽 모옥의 문이 열리며 삼십대 중반의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던 것이다. 하늘빛을 닮은 엷은 청색의 학창의를 입고, 그 위에 백색의 장포를 걸쳤다. 옷깃에 금색으로 수놓은 기이한 문양은 적지 않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정교한 솜씨였고, 문사건을 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지방 학유(學諭)의 그것이었다.

사내의 피부로 보기에는 너무 흰 살결이 오랫동안 햇빛을 받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오관이 뚜렷하고 맑고 깊은 눈은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주사빛 입술은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어 범상치 않음을 풍기고 있었다.

중원제일의 학유이자 지자(智者)로 알려진 함곡선생이었다. 성은 문(文)이요, 이름은 수전(秀佺)이다. 산동(山東) 곡부현(曲阜懸) 출신으로 호(號)는 함곡, 자(字)는 석곡(碩曲).

산동 곡부현은 바로 옛 성현(聖賢) 공자(孔子)가 탄생한 곳이다. 지금도 유생(儒生)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 곳으로 붉은 담장에 둘러싸인 송림(松林) -이른바 공자의 신상(神像)을 모셔 놓았다는 공림(孔林)-이 있는 곳이었다.

그 뒤로 먼저 모습을 보인 여인과 같은 옷을 입은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서른 전후로 보이는 그 여인은 둥그런 얼굴에 약간 살이 붙은 모습이어서 후덕하게 보였다. 아마 사내의 아내인 모양이었다.


"선화(鮮華)야. 너도 같이 갈 차비를 차리거라."
"오라버니…!"

뜻밖의 말에 선화라 불린 여인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신과 같이 가고자 한다는 말은 심각한 일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위험한 일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목갑을 자신의 오라버니에게 건네고는 뒤쪽으로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함곡선생 역시 받아든 목갑을 열지 않았다. 붉은색의 봉인(封印)이 되어 있는 채로 자신의 옆에 있던 아내에게 건넸다.

"내가 칠주야가 지난 후에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열어 보시오. 단 그 안에는 절대 여시는 일이 없도록 하시오."

그 말에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던 아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이번 나들이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했지만 그의 말은 자칫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당신…."
"다녀오리다."

그는 걱정스런 표정의 아내에게 온화한 미소를 보여주고는 마당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그리고는 문 앞에 말을 타고 석상처럼 버티고 있는 무적신창 좌승에게로 다가가 가볍게 포권을 취했다.

"결례를 했소."

좌승은 그가 자신에게 다가오자 말에서 내리던 참이었다. 그 역시 포권을 취했다.

"이리 움직여 주신 것만으로 황송하외다."

그는 직접 마차 문을 열었다. 그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중원천지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것이다.

"잠시 동생을 기다려 주시겠소?"

"얼마든지."

좌등으로서는 굳어진 어깨를 펴며 함곡선생이 마차에 오른 뒤에도 마차 문을 잡고 있었다. 오랫동안의 기다림은 결국 그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기다림이란 어떤 일도 가능케 하는 법이다. 그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처음 이곳에 당도한 때부터 일을 마치게 된 지금까지 그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3.
'그들도 나와 같은 꼴을 당하고 있을까?'

꼬박 이틀 동안 정신없이 쫓기는 바람에 미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이제 자신을 쫓는 추적자들의 수가 반으로 줄어들었다.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는 여섯 정도. 하지만 지금부터가 더 문제였다.

그가 입은 부상은 운 좋게 그리 심한 것이 아니어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체력은 이미 바닥나 있었고, 남은 자들은 자신이 죽인 일곱 명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서운 자들이었다. 몸 하나 가까스로 들어갈 수 있는 틈 속에 몸을 뉘이고, 전면은 나뭇가지를 늘어뜨려 자연스럽게 은신하고 나자 오랜만에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모두 죽었을 가능성이 많겠군.'

자신을 쫓는 이런 정도의 자들이 투입되었다면 동료들 중 이들의 추적을 무사히 빠져 나갈 동료는 없었다. 오직 한 명을 제외하고는….

'능효봉(凌曉峯)…. 그라면 가능하겠지.'

자신이 속했던 조직의 인원은 열여덟 명. 아홉 명씩 이개조로 나누어진 그 조직의 하나는 자신이 맡고 있었고, 또 하나는 그가 맡고 있었다. 하지만 능력으로 본다면 그는 자신과 비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과 함께한 동료들은 모두 죽었을 터였다. 이미 그의 눈으로 확인한 수만 해도 다섯 명. 나머지 세 명도 자신과 같이 쫓기는 도중에 죽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라면 동료 중 몇 명쯤은 살려 놓았지 않을까?

깔끔하고 시원한 외모에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무공. 자신이 이것저것 잡다한 무공을 사용하는 것에 반해 그는 명문대파(名門大波)에서 체계적으로 무공을 수련한 자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런 자가 왜 자신이 속한 조직에 먼저 들어와 있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쉽게 무림에 나가 협행(俠行)이라도 한다면 대협이란 칭호도 능히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누군가는 살아 남아야했다. 누군가는 살아남아서 이유도 모르고 죽어가야 했던 동료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했다. 능력이 될지 모르지만 복수라는 것도 생각해 봐야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명령을 내렸던 서교민(徐敎民)이란 개자식을 찾아야 했다. 수염도 나지 않는 불알 없는 자식들의 사타구니나 핥아주는 개.

자신들에게는 잘못이 없었다. 지금까지 수십 회에 걸친 그들의 명령을 비밀스럽게 수행해 왔다. 중간에 동료들이 죽고, 또 바뀌기도 했지만 자신들은 칠년에 걸쳐 그들이 원하는 일을 만족스럽게 처리해 주었다. 그것이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굳게 믿었고, 은근히 자부심도 가졌었다.

헌데 왜 갑자기 명령은 내려놓고 자신들을 고립되게 만들었을까? 무슨 이유가 있었을까? 그것은 함정이었다. 달리 생각할 수 없는 완벽한 함정이었다. 상대는 자신들이 간다는 사실을 알든 모르든 자신들이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더구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미 상대에게 노출된 그들은 많은 희생을 감수하면서 일을 수행했다. 그들에게 있어 명령은 죽음과도 바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일방적인 쫓김이었다. 추적자들은 자신들만큼이나 훈련이 잘된 자들이었고, 자신들의 은신술과 잠입술은 그들의 이목을 속이기에 부족했다. 지금까지 자신이 버텨온 것은 기적이라 할만했다.

'서교민… 너는 반드시 내 손에 죽는다. 갈기갈기 찢어 죽일 것이다.'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아야 했던 그 고통을 마지막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살아야 했다. 어떠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아야 했다. 그는 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더 큰 위험이 닥칠지라도 절대 사용하면 안 되는 무공 두 가지를 또 다시 생각해 내게 했다. 이제 그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또 한 번 사용할 때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한 번 사용해 본 것이니 꺼리길 것도 없었다. 그 위력은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치명적이었다. 그것이라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자신을 살게 해 줄 것이다. 다만 그 흔적만큼은 남기지 말아야 했다.

그는 그 상태에서 운기조식을 하기 시작했다. 복수나 그 연유를 알아보는 일은 나중의 일이었다. 우선 그에게 필요한 것은 바닥난 체력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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