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제비가 정겹게 사는 5일장

2006년 여름 강원도 여행 두 번째- 정선 5일장

등록 2006.08.09 17:56수정 2006.08.0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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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선을 헤매다가 만난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들과 아주아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정선을 헤매다가 만난 하늘. 바람에 흔들리는 빨래들과 아주아주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 김은주


a 아우라지에서 정선 장에 가려고 아침 열차를 타는 할아버지. 왼손에 들고 계신 짚공예가 퍽 정겨웠다.

아우라지에서 정선 장에 가려고 아침 열차를 타는 할아버지. 왼손에 들고 계신 짚공예가 퍽 정겨웠다. ⓒ 김은주

시골 장터를 찾아가는 길은 언제고 즐겁다. 딱히 살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냥 어슬렁어슬렁 좌판 사이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할인마트에서는 절대 맛보기 힘든 순정함이 시골 장에는 있다.

예전처럼 먼 동네 장꾼들이 모처럼 모여서 소식도 주고받고, 물물교환도 하는 장의 기능보다는 관광상품으로 자리를 잡은 정선 5일장을 찾아가면서도 그런 기대를 했다. 활기찬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면서 괜히 마음이 들뜨는 시간이 될 거라는.


아우라지에서 정선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기차 안에서도 장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손으로 손수 엮은 광주리를 들고 타신 할아버지도, 바랑처럼 생긴 주머니를 등에 진 할머니도 입성은 참으로 깨끗했다. 닷새에 한 번 장에 나가면서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옥수수 몇 개, 짚 광주리 몇 개 들고 나가는 길이지만 곱게 차려 입고 장에 가는 마음은 차라리 경건해 보였다.

정선역에 내려 장이 서는 곳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기차역에서 멀지 않은 갈림길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헷갈리기에 가게 아저씨에게 가는 길을 여쭈었는데, 내 무거운 가방과 지친 얼굴이 안쓰러웠는지 택시 타는 게 편할 거라고 일러주신다. 시골에서 길 물어서 택시 타란 얘기 듣는 것은 제주도에서 말고는 처음인 것 같다.

언젠가 남원 만복사지에 갈 때는 “쪼끔만 걸어가면 되여” 하는 할머니들 말만 믿고 가다가 줄곧 두 시간을 걸은 적도 있었는데, 요즘은 시골 분들의 거리 개념도 많이 변하신 건가 싶다. 어쨌든 20여분 정도 걸어가니 시끌벅적한 장터가 나온다.

a 온갖 약초를 늘어놓고 팔고 있는 정선 5일장

온갖 약초를 늘어놓고 팔고 있는 정선 5일장 ⓒ 김은주


인사동 길바닥에도 늘 깔리는 옛날 동전이나 별로 신기해 보이지도 않는 쇠종이나 이런저런 골동품 같은 것들이 입구에 보이는가 싶더니 조금만 들어가니 온갖 약초 냄새가 진동을 한다. 칡껍질을 벗기는 분 곁에서는 냄새가 너무 좋아서 움직일 생각을 잊기도 했다. 이른 아침이라 구경 온 외지인들보다는 가까이서 오신 분들이 더 많아 보였다. 온갖 나물들 구경에도 신이 나고, 말로만 듣던 자주감자도 처음 구경했다.

a 난생 처음 본 자주감자, 얼핏 보면 고구마 같다.

난생 처음 본 자주감자, 얼핏 보면 고구마 같다. ⓒ 김은주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마나 자주감자



중학교 때 국어 선생님께 이 노래를 배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자주색 감자를 눈으로 보게 된 것은 처음이다. 그러니 “고구마가 벌써 나와요?” 하고 무식하게 물었지. 감자 팔던 아주머니가 그러신다. “사진 많이 찍어, 그거 귀한 거야”

a 곤드레나물을 한 번이라도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곤드레나물을 한 번이라도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김은주


바다가 먼 곳이라 해물은 구색 맞추기로 조금 나와 있고, 주로 산나물과 밭작물이 주다. 약초도 꽤 있고. 1999년부터 사람들이 관광열차를 타고 정선장을 찾기 시작했는데 지난해에는 13만 명이나 다녀갔단다. 인구 5만 명의 정선에 찾아오는 사람이 그리 많으니 장꾼들 인심도 조금 고약해질 법한데도 아직은 야박함보다는 넉넉함이 더 크게 느껴진다.


발품 팔다 보니 다리가 제법 아프다. 할머니들이 파는 메밀전병에도 욕심이 나고, 감자전도 맛있어 보이지만 콧등치기를 먹기로 했다. 좌판 옆의 식당 골목으로 들어가 ‘산골집’에 자리를 잡고 콧등치기를 시켜 먹었다. 후루룩 들이마시면 면발이 콧등을 칠 정도라 해서 이름이 ‘콧등치기’라는 이 국수는 강원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다.

톡톡 끊어지는 맛도 일품이고 잘 익은 열무김치를 곁들어 먹는 맛도 제법이다. 국물 맛 또한 무지하게 시원했다. 메밀의 독특한 질감과 색이 입과 눈을 동시에 즐겁게 만들어 주고, 가게 앞을 왁자하게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가 또한 더없이 귀를 즐겁게 한다. 배가 부르지 않았다면 숟가락을 떠먹어야 하는 올챙이국수도 먹고 싶었지만 그건 참기로 했다.

a 무지막지 시원하고 맛 있었던 콧등치기. 실제로 먹어 보니 콧등을 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무지막지 시원하고 맛 있었던 콧등치기. 실제로 먹어 보니 콧등을 칠 정도는 아니었지만... ⓒ 김은주


다시 시장을 둘러보다가 반가운 녀석들을 만났다. 어느 봄부터인가 도무지 보기가 힘들어졌던 강남 갔던 제비들이 정선시장에 잔뜩 몰려와 있었던 것이다. 어릴 적 우리 집 처마에 해마다 집을 짓고 살았던 제비들은 집이 헐리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 뒤로는 좀처럼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꼬맹이였을 때는 비행 연습을 하다가 떨어져 다리를 다친 새끼제비를 흥부 흉내 내며 돌봐 주기도 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비둘기는 쉽게 만나도 제비는 보기가 힘드니 그게 봄에 오는 철새인지, 가을에 오는 철새인지조차 헷갈려 한다.

a 정선 장 정육점 처마 아래서 만난 제비집. 반갑고 고맙다.

정선 장 정육점 처마 아래서 만난 제비집. 반갑고 고맙다. ⓒ 김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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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은주

“이상한 정적이 그곳에 감돌았습니다. 그처럼 많았던 새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사태에 대해 당황하고 동요하기 시작했습니다. 새들에게 모이를 주던 뒤뜰도 황폐해졌습니다. 어쩌다 발견되는 몇 마리 안 되는 새들은 빈사 상태로 몸을 심하게 떨었고 날지도 못했습니다. …… 생명의 소리가 없는 침묵의 봄이었습니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읽다가 이 대목을 만나고 나는 얼마나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던가. 제비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을 조금도 이상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는 어른들이 이해가 안 되었던 어린 나도 어른이 되면서는 더 이상 제비를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오지 않는 새인 것처럼 그렇게. 그런데 그 제비들이 몽땅 정선에 와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선장에 있는 남매정육점에, 시대가방 처마에, 서강슈퍼에, 그리고 시외버스터미널에까지 제비들은 집을 지어 놓고 있었다.

새끼를 낳아 기르는 제비 부부는 둥지에 있는 새끼를 위해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먹이를 잡아 나르고, 안온한 둥지 안에서 아직 눈도 못 뜬 새끼들은 어미가 오는 소리만 들리면 입을 크게 벌리고 짹짹 소리를 낸다. 눈물겹게 반가운 풍경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제비들을 처다 보느라 목이 아플 지경이다. 그런 나를 구경하던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는 어미제비가 새끼제비에게 먹이 주는 찰나를 놓치자 “아이고, 저 때 딱 찍어야지” 하시며 나보다 더 안타까워하신다.

초가집이 죄다 사라진 세상이라 제비들은 기상천외한 곳들에 집을 지어 놓았다. ‘시대환구사’라는 간판 글씨 가운데 ‘환’ 자 위에다 집을 지어 놓기도 했고, 천막을 치느라 얼기설기 엮어 놓은 쇠기둥 한구석에 자리를 잡기도 했고, 가겟집 처마 밑에 자리를 잡았는가 하면, 버스터미널에 걸어 놓은 액자 위에 떡하니 집을 지어 놓기도 했다.

녀석들도 세상에 적응하느라 애쓰고 있는 거겠다. ‘서강슈퍼’ 의 주인은 처마 밑에 지은 제비집이 행여나 떨어질까 싶어 전선 정리하는 끈을 둥지 밑에 걸어 주기도 했는데, 덕분인지 새끼들도 아주 건강해 보였다.

음식점 처마에 제비집을 지어 놓으면 더럽다고 싹 쓸어버리는 것이 도시 사람들 마음일 텐데 그래도 정선 5일장 사람들한테는 여유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장 구경도 재미있었지만 무엇보다 아주 오랜만에 반가운 제비들을 실컷 볼 수 있었던 것이 큰 기쁨이었다.

a 정선 터미널 액자 위에 집을 지은 제비는 새끼를 4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정선 터미널 액자 위에 집을 지은 제비는 새끼를 4마리나 기르고 있었다. ⓒ 김은주

덧붙이는 글 | *정선 장은 2일, 7일 장이다. 정선 5일장 가는 여행 상품도 꽤 많이 나와 있고, 구절리의 레일바이크와 연계된 철도 상품도 있다. 혹시라도 장에 가게 되시거들랑 거기 사는 제비들도 꼭 보고 오시기를.

덧붙이는 글 *정선 장은 2일, 7일 장이다. 정선 5일장 가는 여행 상품도 꽤 많이 나와 있고, 구절리의 레일바이크와 연계된 철도 상품도 있다. 혹시라도 장에 가게 되시거들랑 거기 사는 제비들도 꼭 보고 오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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