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 시절, 아버지 사진이승숙
그 곳에서 일주일간 훈련을 받았다. 훈련 마지막 날 군악대가 연주하는 가운데 배낭이랑 옷, 철모를 받고 구리수가 쫙 붙어있는 칼빈총도 지급받았다. 맨 처음 만져보는 총이었다. 교관이 총을 분해하는 시범을 보이며 가르쳤다. 삼베옷을 벗어서 땅에 펴놓고 총을 분해했다. 그리고 구리수를 발랐다.
사격 연습은 딱 한번 하였다. 총알 4발을 받아서 저 건너에 있는 허수아비를 목표물로 삼아 총을 쏘았다. 맞았는지 안 맞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생전 처음으로 총을 쏘아보았다. 이게 총 쏘는 훈련의 전부였다.
사격훈련을 하고 난 이튿날 구포역으로 집결했다. 집에서 나온 지는 한 20일 정도 되는 날이었다. 다시 곳베열차를 타고 마산까지 갔다. 더위가 한 풀 꺾여가는 8월 말이었다.
마산역에 도착하니 한낮이었다. 대기하고 있던 지에무시(GMC)를 타고 창고로 갔다. 그 곳에서 미군 중령이 또 다시 사람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국졸자도 얼마 안 되는 시대라서 어찌보면 요즘 예닐곱 살짜리보다도 사람들이 더 어리석었다. 무학이 전체의 3분의 2는 되었고 국졸자라야 3분의 1 정도 밖에 안 되었던 그런 시대였다.
맨 처음에 중졸자를 뽑았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뭐가 뭔지 모르니까 그냥 무리에 끼어 있는 게 마음 놓여서 아무도 나서질 않았다. 다음으로 국졸자를 뽑았지만 역시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나 역시 어리버리하게 행동하며 무학이라고 얘기했다.
나중에 보니까 좀 배운 사람들은 좋은 곳으로 배치받았다고 하는데 못 배운 무학들은 다 소총부대로 배치가 되었다. 어느 게 좋은 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무조건 사람 틈에 끼어 있으려고 사람들은 다 그리 행동했다.
비는 추적추적 내리는데 추럭(트럭)에 사람을 태웠다. 한 차에 스무나무명을 태웠다. 그 추럭을 타고 마산에서 철원까지 올라갔다.
철원 연병장에 사람을 부려놓았는데 그 곳에서 3일간 교육을 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인민군이 근처에까지 와서 산으로 올라갔다. 탄알을 50발씩 받아서 허리춤에 차고 밤새 산에서 기다리다가 아침에 산을 내려왔다. 아침 10시 경에 미군 추럭이 가득 왔다. 사람들을 태우러 온 것이다. 한 추럭에 2~3명씩 뽑아서 갔는데 말하자면 자대로 배속한 것이었다.
청도 집에서부터 같이온 '원앞댁'의 '흥갑이'는 나랑 안 떨어질려고 애를 썼다. 흥갑이는 무학에 완전 까막눈이었는데 나를 크게 의지하고 그동안 지냈다. 내가 차출되어서 다른 추럭에 타자 흥갑이는 사색이 되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양 다리를 뻗고 엉엉 울었다. 그렇지만 어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배속받은 부대는 미 25사단 35연대 3대대였다. 1개 중대에 한국인이 1명씩 배치가 되었는데 한국인으로는 우리가 맨 처음 배치된 셈이었다. 미군 1등 상사가 담배 1갑과 껌, 초콜릿을 잔뜩 주며 주눅 들어 있는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당시 미 25사단은 1개 중대에 10~20명 정도 밖에 없었는데 그 전에 있었던 전투에서 사단 병력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지리와 정서를 잘 아는 한국 병사를 한 중대에 한 명씩 배치한 거라 하였다.
미군 부대에 배치받자말자 철원의 어느 산대배기(산꼭대기)에서 3일 정도 대기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까 그 이전 전투에서 사단이 절단나서 재충전하는 시기였다. 주변엔 주검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나는 신병이라서 처음 보는 주검에 놀랐고 또 두 번 보기 싫을 만큼 무섭고 끔찍했다. 그러나 나중에는 주검을 워낙 많이 보다보니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음력 8월 보름날 진주 남강을 도하했다. 당시에 나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강의 제일 얕은 곳으로 건너는데도 물이 입까지 닿았다. 진주 시내에서 이틀 밤을 지내고 추럭과 탱크, 그리고 도보로 전진하면서 대전을 지나 문경을 거쳐 겨울 쯤에 신안주, 영변까지 진격을 했다. 내가 함께한 부대는 미 25사단 35연대 3대대 2중대였다.(중략)
무더웠던 그 해 여름에 전쟁터로 끌려갔던 우리 아버지는 삶과 죽음의 능선을 헤쳐 나오면서 네 번의 여름을 더 보내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많은 수의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오늘도 레바논에선 생목숨들이 끊어지고 있다. 매미가 울고 초록 물결이 넘실대는 이 좋은 날에 지구별 또 다른 한 쪽에선 삶과 죽음의 처절한 경계가 이 순간에도 벌어지고 있다.
평화는 피를 먹고 피어나는 꽃인가. 얼마만큼 더 많은 피를 먹어야 평화의 꽃은 피어 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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