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놀새'에서 국밥집 사장까지

"탈북자·망명자 아닌 사업가 전철우예요"

등록 2006.08.20 10:36수정 2006.08.2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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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탈북자나 망명자로 보는 시선이 많습니다. 벌써 17년이 흘렀는데 지금도 저를 다른 눈으로 보는 분들이 있지요. 이제는 탈북자가 아닌 한 사람의 사업가로 보아주세요."


1989년 11월, 전철우씨는 북한의 명문대인 김책공업대 출신으로 동독 드레스덴 대학 유학 중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틈을 타 극적으로 귀순에 성공한 북한 대학생이었다.

두려움과 희망을 안고 한국 땅에 발을 디딘 지 어느새 17년. 귀순 당시 스물셋 어린청년이었던 그는 어느새 마흔의 중년 사업가가 되어 있다.

'저 쪽' 사람이어서 깨진 소개팅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는 그는 밝고 긍정적이다.
실패는 있어도 좌절은 없다는 그는 밝고 긍정적이다.김혜원
"여기 와서 참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탈북자들이 많지만 그 때만 해도 흔치 않았지요. 그래서인지 탈북자를 보는 시선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귀순자인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지만 북한출신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말못할 아픔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전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탈북자들을 보는 불편한 시선과 알게 모르게 일어나는 차별(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은 분명히 있다면서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적응하느냐가 탈북 이후 생활의 성패를 가름할 요인이 된다고 했다.

"저도 많은 차별을 겪었습니다. 대학교 때 이야기인데 저랑 아주 친하게 지내던 과 동기가 아는 여학생과 소개팅을 해주겠다면서 주선을 했거든요. 처음이라 많이 설렜지요. 하지만 결국 소개팅이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 여학생이 제가 저 쪽(북한) 출신이라서 무섭다면서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더군요."


당시 이십대 초반이던 전씨는 순간 가슴에 찬 바람이 '휭' 하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면서 다짐한 것이 '잘 살아보자'였다는 것. 어떻게든 이 곳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잘 사는 모습을 보인다면 북한 출신이라고 해서 무섭다거나 거부감이 든다거나 하는 말은 듣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굉장히 자신감이 상실된 상태입니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데다 늘 자신이 없다보니 누가 뭐라면 금방 상처를 받아요. 그렇게 속으로만 끙끙 앓으면서 자꾸만 소외되는 길로 가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말투가 웃기다' '외양이 촌스럽다' 등등 여기 사람들은 농담처럼 하는 말들도 상처가 되거든요. 요즘 들어 탈북자라는 말 대신 '새터민'이라는 새로운 말을 사용하는 것도 탈북자에 대한 좋지 않은 선입견을 없애보려는 노력입니다."

목숨을 건 탈북과 귀순을 감행하고도 한국에 와서 적응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탈북자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는 전씨는 한국생활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긍정적인 생활자세와 자신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위기 통해 단단해졌지만, 딸에겐 약한 아버지

긍정적이며 낙천적인 그였지만 목숨을 걸고 망명길을 택한 후에도 몇 번이나 위기 상황을 맞았을 때는 이겨내기 어려운 순간도 있었다.

"북한에서 살다보니 사업을 해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요. 그래서 전공과 관계없이 음식업에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크게 성공했지만 그만큼 쉽게 무너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땐 어린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하다보니 어떻게 할 바를 몰랐던 것 같아요."

냉면사업으로 크게 성공도 해보고 엄청난 실패도 맛보았던 그에게 두번째 닥친 고난은 방송가를 떠들썩하게 했던 가정사 문제였다.

"벌써 2년이 되어가네요. 그 후로는 열심히 일에만 매달렸습니다. 혼자 있는 시간엔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왔던 자신을 많이 채찍질했고요. 새로 시작한 사업이 이제야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는 것 같아요. 요즘은 가끔씩 딸아이를 만나는 재미로 삽니다. 일곱 살인데 아주 귀여워요. 저랑 사이도 좋고요."

부모와 형제를 버리고 죽음마저도 불사하며 대한민국행을 택했던 그에게는 고난은 있지만 좌절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창 부모 품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자라야 할 딸아이에게만큼은 말할 수 없이 미안하다며 잠시 허공을 응시하는 전씨의 모습에서 애틋함이 엿보인다. 그도 '딸'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그저 미안하기만 한 아버지였던 것이다.

북한은 아직도 그의 고향

얼마 전 발생한 북한 대홍수 이야기를 하며 아직도 북한에 살고 있을 그의 가족과 그가 떠나온 나라 북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부모님은 연로하셔서(지금 생존하셨다면 90세가 넘으셨을 거라 한다) 이미 돌아가셨고 누님들은 아직 살고 있다는 소식을 얼핏 들었다고.

부모와 형제이야기를 하면 잠시 숙연한 모습을 보이는 그에게 '북한'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모호한 질문이지만 탈북자가 북한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만든 갈비를 판매하기 위해 홈쇼핑 방송에 출연한 전씨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로 만든 갈비를 판매하기 위해 홈쇼핑 방송에 출연한 전씨전철우
그는 상당히 중도적인 태도였다. '북쪽을 보고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는 식으로 지나친 혐오감을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비록 공산주의 체제에 희망이 없다는 판단으로 남쪽으로 오긴 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고향이며 아직도 형제들이 살아가고 있는 그 곳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돌아가셨으려니 짐작하고 살았고요. 누님들은 살아계실 겁니다. 저도 열심히 살 겁니다. 그래야 나중에 통일이 되어 가족을 만나도 떳떳하고 당당하지 않겠습니까.

남북관계가 경직될 때마다 걱정을 합니다. 독일처럼 통일이 되면야 좋겠지만 바람처럼 쉽게 이루어질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요. 그렇지 않다고 해도 북한 인민들을 위해서라도 남북 긴장관계는 사라졌으면 합니다."

한때 그는 북한에서 잘 나간다는 '평양놀새'였다. 남한으로 말하자면 '오렌지족' 출신의 젊은이였다. 군 장성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어머니 덕에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출신이 나쁘면 갈 수도 없다는 '김책공업대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북한에서는 극히 드물게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동독 드레스덴 대학으로 유학을 온 엘리트다.

정규과정을 마치고 북한으로 돌아갔다면 그는 지금쯤 북한의 유명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거나 공산당의 고위간부가 되는 성공의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2900원짜리 국밥으로 대형음식회사 짓는다

예약된 편안한 길을 두고 쉽지 않은 망명의 길을 택한 그는 나이 마흔이 된 지금 여러 번의 인생굴곡을 거친 끝에 2900원짜리 국밥(전철우의 고향국밥)을 파는 국밥집 사장이 되어 있다.

'전철우 고향냉면'과 '전철우 고향마을'이라는 음식사업을 하면서 성공과 실패를 맛 본 그의 마지막 목표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CJ푸드나 풀무원과 같은 대형 음식회사를 경영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현업에서 은퇴를 하면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제작을 해보고 싶은 소망도 있단다.

북한에 살고 있었다면 이런 사업가 기질이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 같으냐는 질문을 하니 북한 체제에서 개인사업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란다.

자신의 이름을 건 브랜드인 '항아리갈비와 냉면' 판매를 위해 홈쇼핑 생방송 출연을 해야 한다며 자리를 일어서는 전 사장은 자신을 귀순자·탈북자로만 기억하는 국민들이 '사업가 전철우'로 기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열심히 노력하는 만큼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역시 사업가가 분명하다.

2900원짜리 국밥이라니, 20년째 부엌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전업주부인 나도 믿어지지 않는 가격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기만 하는 식당의 음식값을 생각하면 2900원짜리 국밥 한 그릇으로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소비자로서 반가운 소식이다. 전철우 국밥을 먹어보았다는 몇몇 사람에게 물어보니 저렴한 값에 비해 먹을 만하다는 평이고 제법 손님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혹자는 2900원짜리 국밥 팔아서 언제 부자가 되겠느냐고 하겠지만, 아무리 저가공략이라도 전철우 사장이 장담한 대로 소비자를 위한 최상의 맛과 위생·품질 약속만 지켜진다면 대형종합음식 프렌차이즈 회사로 키워가는 것도 불가능해보이지는 않는다.

새터민을 향한 우리의 편견·차별

전씨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과연 우리가 탈북자를 같은 민족, 같은 국민으로 편견 없이 보아왔는지 생각해 보았다. 솔직히 아니라고 말할 자신이 없다.

탈북과 정착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부적응으로 힘들어하는 새터민들에게 그의 성공이 한 사업가의 성공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지금 탈북귀순자 전철우는 사업가 전철우로 재기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의 꿈이 어떻게 꽃피고 열매 맺는지는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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