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만에 부활한 여전사의 일기, 베트남을 울리다

[해외리포트] 40만부 팔려나가... "그들은 왜 우리를 죽여야 하나?"

등록 2006.08.19 10:43수정 2006.08.22 0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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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당 투이 짬의 일기가 가족에게 전해진 뒤 연일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여전사의 일기' 소식을 보도한 < LA 타임스 > 8월 4일자. 사진 속의 노인은 짬의 사진을 담은 액자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

당 투이 짬의 일기가 가족에게 전해진 뒤 연일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여전사의 일기' 소식을 보도한 < LA 타임스 > 8월 4일자. 사진 속의 노인은 짬의 사진을 담은 액자를 품에 안고 있는 어머니.


"나는 어린애가 아니다. 이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성인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왜 이렇게도 나를 돌봐줄 어머니의 손길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이렇게 외로울 때 제발 내게로 와서 손을 잡아주세요. 내 앞에 놓인 힘든 일들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사랑과 힘을 주세요."

1970년 베트남 외과의사 당 투이 짬이 27세를 일기로 전선에서 미군에 대항하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일기의 서두 부분이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 하면서 이 일기를 쓴 이틀 후 그녀는 사망했다.

그리고 35년이 흐른 지금, 이 육필 일기로 그녀는 새 생명을 얻었다. 322쪽에 달하는 이 일기가 지난해 인기리에 베트남 신문에 연재되다 출판된 것.

보통 2천부 이상 팔리면 성공으로 여겨지는 베트남에서 이 책은 지난 7월 말까지 무려 40만부가 팔려나가며 전후 베트남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월 말 <인터네셔널 헤럴드 트리뷴>등 미국 언론들이 30만부가 팔려나갔다고 보도한 것을 견주면, 2개월만에 10만부가 더 팔린 셈이다.

전장의 처절한 기록, 35년만에 되살아나

경제성장과 물질문명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는 현재의 베트남에서 이 일기는 이상주의를 부활시키고 있다. 베트남전 세대에게는 자신들의 희생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전후세대에게는 선조가 감당했던 고난의 삶을 들려주고 있다.

당 투이 짬이 숨진 꽝찌성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병원이 들어서고 청소년들간에는 '당 투이 짬을 본받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베트남판 '안네의 일기'인 짬의 일기에는 전쟁의 처절함에 대한 통찰, 젊은 여성의 열정과 고뇌의 기록들이 담겨져 있다. 짬은 푸른색 잉크펜으로 쓴 일기에서 침략자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여전사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또래의 청년들로부터 사랑받기를 원하는 낭만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1968년 4월, 중상을 입은 베트콩들을 치료한 후 그녀는 "빗물이 대지에 스며들듯 슬픔이 내 마음에 스며든다, 왜 하필이면 나는 꿈과 사랑을 품고 인생에서 많은 것들을 바라는 소녀로 태어났단 말인가"라고 적고 있다.

짬의 일기는 1970년 그녀가 사망한 후 사라졌다. 전직 미군정보장교인 프레데릭 화이트허스트가 지난해 텍사스 공대의 베트남 센터에 일기를 기증하면서 빛을 보게 되었다.

현재 노스 캐롤라이나에 살고 있는 화이트허스트는 베트남에서 미국으로 짬의 일기를 가져온 이후 그녀의 가족들에게 일기를 돌려주고자 했다. 그러나 연방수사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베트남의 공산정부와 연락을 주고 받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해 이를 포기했다.


결국 1997년 은퇴한 후에서야 짬의 가족들을 찾아 나섰으나 무위에 그쳤다. 그는 작년 텍사스 공대의 베트남 센터에 일기를 기증했고, 베트남 센터는 짬의 가족들의 행방을 찾아 마침내 일기를 전해줄 수 있었다.

일기에서 종종 드러났던 짬의 복수에 대한 열망에도 불구하고 화이트허스트가 베트남을 방문했을 때 베트남인들은 그에 대해 매우 호의적이었다. 그는 AP 통신에 "어느 곳에서나 환영했고 미국인들을 더이상 악마로 여기지 않는데 매우 놀랐다"고 말했다. 짬의 여동생은 "우리는 마음 속에 증오를 담아 두지 않으려 하며 과거의 나쁜 일들은 잊고자 한다"고 말했다.

베트남인들은 베트남전에서 약 300만명이 전사하고 100만명이 실종되었다. 그러나 현재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는 발전 일로에 있다. 최근 미국 군함들이 베트남에 정박하기도 했으며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베트남을 방문하기도 했다. 부시 대통령도 아시아태평양 정상들을 만나기 위해 오는 11월 베트남을 방문할 계획이다.

"왜 우리처럼 착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

a 꿈 많던 문학소녀 짬

꿈 많던 문학소녀 짬

짬의 일기는 땀과 희생·사랑·유혈 등의 내용으로 가득 차 있으며, 무자비하고 비열하게 묘사된 미국을 인간적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녀는 일기에서 희망과 야망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동료들의 죽음과 미군의 폭격으로 곳곳이 파괴되고 있는 데 대한 두려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녀는 "왜 우리처럼 착한 사람들을 죽여야 하는가? 그들은 어떻게 인생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죽인단 말인가?"라고 묻고 있다.

짬은 미군의 포격으로 다섯명이 죽은 후 이렇게 적었다.

"나도 조국을 위해 죽겠다. 후에 승리의 노래를 부를 이들 중에 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조국을 구하기 위해 피와 뼈를 바친 사람들 중 하나이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미 죽었으나 아직도 승리의 날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짬의 일기가 출판된 후 그녀의 가족들은 수천통에 이르는 위로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하노이에 있는 짬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은 동정과 위로를 방명록에 가득 남기고 있다.

짬의 여동생인 당 킴 짬은 지난 4일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방문객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젊은이들인데, 이들은 언니의 일기를 읽기 전에는 베트남전에 대한 것을 믿지 않았으나 이제는 당시 우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언니의 일기를 타이핑하면서 계속 울었다고 한다. 언니 짬이 죽은 것은 그녀의 나이 열다섯살 때였다. 그녀는 언니에 대해 "매우 아름답고 상냥했으며 섬세했다, 그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일기를 계속 쓸 수가 있었는지 상상하기조차 힘들다"고 말했다.

그녀는 언니가 고교시절 인기가 매우 많았고 평소 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언니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잘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동생인 당 히앤 짬은 "일기에는 언니의 영과 혼이 절절이 배어있다"라고 말했다.

짬은 당시의 다른 북베트남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의 이상과 베트남 민족주의를 교육받고 베트남전 승리를 위해 헌신하기로 했다.

그녀는 스물네 살에 의대를 졸업하고 북베트남을 떠나 남베트남의 두치 포라는 중부해안 마을에서 일했다. 그녀가 부상으로 죽어가고 있는 베트콩들과 마을 주민들을 치료하는 일을 맡았던 마을은 당시 가장 위험한 지역 중 하나였다.

사촌 공산당 정치장교를 사랑한 여의사

그러나 짬이 남베트남에 갔던 것은 애국주의나 이상주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당시 사랑에 빠져 있었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단지 'M' 이라고만 알려져 있는데, 그는 그녀가 일기를 쓰기 시작하기 전 그녀의 사랑을 거절했다. 네번째 일기에서 그녀는 M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9년 동안 지녀온 희망을 땅에 묻을 수 있을만큼 강하다…, 날이 갈수록 M에 대한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그녀가 의사이자 혁명 전사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할 때마다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그녀의 동생 느한은 M이 짬의 모계쪽 사촌으로 정치장교의 임무를 띠고 두치 포 지역으로 파견된 공산당원이며, 짬은 그의 곁에 있고자 자원해서 두치 포로 갔다고 말했다. M은 전쟁에서는 살아남았으나 짬의 일기가 가족에게 전해지기 직전 사망했다.

짬은 일기에서 공산당에 대해서도 솔직하게 적고 있어서 독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수년 동안 공산당원이 되기를 거절했던 그녀는 중산층 출신이라는 것으로 인해 그녀를 차별하고 통제하고자 했던 공산당원들의 모습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짬의 어머니는 대학강사였고 아버지는 외과의사였다.

짬은 가끔씩 그녀의 삶이 왜 이렇게 고단한지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여학생 지도자가 되어가고 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은 매우 힘든 길이다. 무엇인가가 나를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만든다. 이것이 내 인생의 길, 내 사랑의 인생이란 말인가, 너무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찬 삶인가?”

"내 가슴은 증오로 가득차 있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그녀의 두치 포 초기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는데 미군에 압수된 초기 일기는 소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기는 부족한 마취제를 가지고 한 베트콩의 급성맹장염을 수술했던 일을 적고 있는 1968년 4월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일기에서 때로 복수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 친구가 전투에서 전사한 후 짬은 "나는 매일 우리 조국을 강탈하는 저 도적떼들과 죽어가는 너를 생각한다, 내 가슴은 온통 증오로 가득차 있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반드시 대가를 지불하도록 할 것이다"고 적고 있다.

그녀는 두치 포에서 3년 동안 미군으로부터 도망가거나 숨으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가끔씩 미군이 그녀의 야전병원을 공격해서 파괴했는데 그러면 그녀와 동료들은 병원을 새로 지어야만 했다.

그녀는 자신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켜준 게릴라가 며칠 후 부상을 입어 그를 살리고자 노력했으나 끝내 살리지 못하자 "죽음이 살아남은 자의 심장에 계속해서 피를 흘리게 한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2주일 후, 미군기가 그녀가 알고 지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을 폭격한다. 그녀는 "내가 있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 폭격당하는 장면은 나를 분노로 가득차게 한다, 누가 불타고 있는가? 이 폭격으로 인한 잔해들 속에서 누가 불타고 있는가?"라고 적고 있다.

그녀는 베트콩과 함께 야간구출작전을 수행했던 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배우이다. 나는 매일 밤 적이 있는 곳과 가까운 지역에서 활동하는 게릴라들을 따라 다니는 검은 옷을 입은 해방의 소녀를 연기하고 있다. 적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고 구급상자를 든 손을 떨구며 죽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면 사람들은 꿈에 충만한 젊은 시절을 혁명을 위해 죽어간 소녀에게 연민의 감정을 느낄 것이다."

여전사, 라이플 한 자루와 함께 최후를 맞다

1969년 후반, 두치 포의 상황이 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그녀의 일기 쓰는 횟수가 줄어들고 미래의 희망에 대한 내용보다는 전쟁에 대한 내용이 많아진다.

그녀는 "이 전쟁으로 인해 결국 나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그만둘 것인가? 아니다 그러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에게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나 많고 전사하는 동료들에 대한 슬픔으로 인해 개인적인 문제는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 적고 있다.

1970년 6월 상황이 더욱 나빠진다. 미군이 가까이 접근하자 이동할 수 있는 베트콩 환자들은 철수한다. 그녀의 병원도 파괴되었고 이제 그녀는 이동을 할 수 없는 다섯 병의 환자와 함께 남아 있다. 두 명의 젊은 여자가 그녀를 돕기 위해 남았다.

6월 14일 그녀는 "상황이 너무 열악해서 미군이 이 곳에 온다 하더라도 내가 어떻게 저 환자들을 두고 떠날 수 있을 것인가?"라고 적고 있다.

6월 20일의 마지막 일기에서 그녀는 오직 한 끼 식사분의 쌀만 남았다고 적고 있다. 그녀와 환자를 도와줄 사람들이 도착하기를 기대했으나 그들은 오지 않았다. 두 명의 간호사마저 떠났다. 그들이 강을 건너가는 것을 보고 울고 싶었다.

6월 22일 미군이 공격한다. 나중에 한 헌병은 화이트허스트에게 짬이 라이플 한 자루를 지니고 중무장한 100여명의 미군병사들에게 대항했다고 보고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줄 베트남인은 한 사람도 생존하지 못했다. 다섯명의 환자들도 그녀와 함께 모두 죽었다. 그녀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그 곳에 묻힌 후 1976년 가족들에게 넘겨졌다. 그녀의 동생은 "유골을 거두기 위해 그 곳에 갔을 때 언니의 이마에서 총알자국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당 투이 짬은 죽기 5일 전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았던 것 같다.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처럼 살 때 비로소 당신은 삶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오, 삶은 많은 젊은이들의 피와 뼈에 의해 변하는 것이구나. 다른 이들의 삶이 신선하고 푸르러지도록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목숨을 버려야만 했는가?"

덧붙이는 글 | 코리아위클리(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기사 작성에 안태형 마이애미 주재기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코리아위클리(koreaweeklyfl.com)에도 실렸습니다. 기사 작성에 안태형 마이애미 주재기자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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