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사의 새벽에 마음을 빼앗기다

[남도 절집여행①] 월출산 무위사와 도갑사

등록 2006.08.20 15:17수정 2006.08.2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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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 사방 너른 들판에 우뚝 솟아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 김정봉

'여름휴가를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영암, 강진, 해남을 갔다 오겠노라고 하면 '거기에 볼 게 뭐가 있느냐'는 무안한 대답을 듣기 일쑤다.

이런 물음에 속 시원히 대답할 말을 찾기가 어려워 '뭐 그냥 좋아서'라든지, 상대방이 성의 있게 듣는 시늉을 하면 두서없이 설명을 하곤 한다. 거기엔 예쁜 절 집 무위사와 도갑사가 있고, 다산의 자취가 남아 있는 다산초당과 백련사가 있으며 추사와 인연이 있는 대둔사가 있다고 말할 때쯤 상대방은 벌써 싫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렇다. 거기에는 듣는 이가 혹할 만한 수려한 풍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들어서 금방 알아채는 대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유배객들과 인연을 맺은 곳을 들러 그들의 체취를 느껴 보고 아기자기한 산세에 예쁘게 들어서 있는 절 집을 구경하고 메마른 누런 흙이 아닌 촉촉한 황토흙을 걸어보는 것으로 족한 소박한 곳이다. 여기에 남도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맛깔스러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이 있다.

'월출산무위사' 현판 내건 천왕문이 나를 반기다

너른 평야를 내달리다 마지막으로 용트림하듯 불끈 솟아오른 산이 월출산이다. 여느 산과 달리 산 뿌리를 드러내 더욱 힘이 느껴진다. 누가 보아도 예사스러운 산이 아님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산에 명찰(名刹)이 없을 리 없다. 월출산 동남쪽 산자락에 예쁜 무위사가 자리하고 있고 그 서쪽 편에 호젓한 도갑사가 앉아 있다.

사치스럽고 복잡하고 화려한 절하고는 정반대의 절 집 무위사. 무더운 한여름에 찾아가기엔 어쩐지 분위기가 맞지 않는 듯하다. 비가 촉촉이 내리든가, 함박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그런 날이었으면 더욱 좋았을걸. 일에 쫓기어 오고 싶은 계절에 오지 못하고, 오고 싶은 때에 오지 못하는 신세가 딱하지만 이럴 때라도 올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처음 반기는 것은 '월출산무위사' 현판을 내건 천왕문이다. 지은 지 얼마 안 되었으면서도 화려하지 않아 아주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고 아담하여 위압적이지 않다. 천왕문을 들어서면 절 마당까지 소박한 길이 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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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을 대신하고 있는 천왕문, 지은 지 얼마 안되었지만 아주 오래된 건물처럼 보이고 아담하고 소박하다 ⓒ 김정봉

이 길만 보아도 무위사가 어떤 절인지 짐작이 간다. 가파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높아진 계단 위로 극락보전이 살짝 보이고 키 작은 나무와 꽃들이 부담을 주지 않고 서있다. 덥지만 코앞에 있는 그늘에 빨리 가지 않고 느긋하게 걷고 싶은 길이다.

단아하고 수수한 무위사의 '극락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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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문에서 극락보전까지 이어지는 길은 천천히 느긋하게 걷고 싶은 예쁜 길이다 ⓒ 김정봉

절 마당에 이르면 마음이 바빠진다. 보통 절 집에 가면 가장 보고 싶은 것은 제일 나중으로 미루고 주변부터 보곤 하는데 무위사 극락보전은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빨리 가서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다. 수덕사의 대웅전이나 부석사의 조사당을 빼다 닮아 있으면서 다른 분위기가 난다.

무위사의 극락보전은 웅장한 수덕사의 대웅전과 한적한 곳에 물러앉아 있는 부석사의 조사당과 달리 단아하고 수수하면서도 다른 건물에 치이지 않고 절 집의 주인공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어 찾는 이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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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얼른 가서 안아 주고 싶은 사랑스런 건물이다 ⓒ 김정봉

극락보전은 정면에서 보면 시골 한적한 마을 어디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왜소한 건물로 보이기도 하나 옆에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덩치 좋은 아저씨의 가슴팍을 보듯 도톰하여 암팡지게 생겼다.

맞배지붕 건물의 참맛은 역시 측면에서 볼 때 드러난다. 지붕의 꼭대기에서 양 갈래로 하늘을 가르듯 시원하게 내리 뻗은 지붕선은 시원함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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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 측면, 양갈래로 내리 뻗은 지붕선이 시원하다 ⓒ 김정봉

천왕문과 미륵전, 산신각 모두 극락보전의 규모에 맞게 아담하게 지어져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다. 한국에서 가장 검소하고 수수한 절집의 대명사가 된 무위사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큰 건물을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문화적 제약(?)을 받지나 않을지 모르겠다.

미륵전에는 무위사와 썩 잘 어울리는 석불이 모셔져 있다. 지방마다 그 지역을 대표하는 토속적인 불상이 있기 마련인데 이 석불이 이 지역의 얼굴을 대표하는 석불이 아닌가 싶다. 인근 수암마을에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 석불을 보고 있으면 이 지방의 아주머니의 전형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석불에서 굳센 남도 어머니의 모습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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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전 석불, 검소하고 수수한 무위사의 절과 잘 어울린다 ⓒ 김정봉

눈두덩과 입술이 두툼하고 전체적인 얼굴이 웬만한 시련은 얼마든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강인한 여성상이다. 본인은 배우지 못하였으면서 갖은 고초를 다 겪어 외아들을 훌륭히 키워 낸 굳센 남도의 어머니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분들은 배우지 못하여서 그렇지 사리가 분명하고 자기 주관 또한 또렷하여 외모만 보고 막대하였다간 크게 무안을 당할만한 대찬 여성이다.

극락보전 왼쪽엔 선각대사 부도비가 있고 그 앞에 고려 초의 것으로 보이는 삼층석탑이 서 있다. 극락보전은 명성에 걸맞게 치장도 격조가 높다. 지금은 벽화보존각 안에 보존되어 있지만 조선 초기의 벽화들, 아미타여래내영도와 석가여래 설법도, 해수관음좌상도 등은 극락보존에서 떼어 낸 것이다. 지금도 극락보존 안에는 아미타삼존상이 모셔져 있고 벽면에 아미타삼존도와 수월관음도가 그려져 있다.

이런 유물들이 있기에 무위사는 단순히 검소하고 수수한 절로서만 아니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옹골진 멋이 있고 속이 깊은 격조 있는 절로 사랑을 받는다 할 수 있다.

절집은 가을 아니면 겨울이 최고고 그 중에 새벽녘이 최고다. 월출산에 있는 또 다른 절집 도갑사는 새벽녘에 찾았다. 무위사는 월출산을 멀리 보면서 들어간다면 도갑사는 월출산의 윤곽은 보지 못하고 월출산 바로 밑의 산자락을 타고 들어간다. 도갑사는 그만큼 월출산 속으로 들어가 자리 잡은 탓일 게다.

근래에 세워진 일주문을 지나 넓은 계곡을 따라 조금 오르면 왼편으로 도갑사에 이르는 오솔길을 만난다. 오솔길을 따라 조금 오르면 아담한 건물인 해탈문이 반긴다. 그냥 보기에도 오래돼 보이는 기단과 계단, 난간머리의 태극무늬가 눈길을 잡는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한 폭의 그림 같은 도갑사의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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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 해탈문, 무위사에는 극락보전이 있다면 도갑사에는 해탈문이 있다 ⓒ 김정봉

해탈문은 도갑사에서 제일 오래된 건물로 세조 3년(1457년)에 중건되고 성종 4년(1473년)에 완공된 것이다. 해탈문에 들어서지 않고 도갑사 경내를 보면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멀리 대웅전과 오층석탑이 보이고 가까이 양 옆으로는 초석만 덩그러니 놓인 건물터가 보인다.

해탈문 편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에서 원교 이광사의 글씨인 해남 대둔사 해탈문의 글씨를 탁본 모각한 것으로 교체된 것이다. 글씨를 누가 썼는가에 따라 기분이 다르다.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하고 기분을 좋게 하여 다시 한 번 보게도 한다. 예를 들어 정조의 친필인 대둔사 표충사 편액과 이광사 글씨인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 김정희 글씨인 다산초당 동암의 '보정산방' 현판은 기분을 좋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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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문 현판, 몇 년 전에 이광사의 글씨인 해남 대둔사 해탈문의 글씨를 탁본 모각한 것으로 교체되었다 ⓒ 김정봉

발걸음을 옮겨 경내로 들어서면 예전의 도갑사의 사세를 짐작케 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기존에 있던 대웅전은 뒤로 이전하고 이전한 터를 발굴 조사 중인데 기단의 규모나 적심석의 양식으로 볼 때 대웅전은 중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어 정면5칸 측면4칸의 중층 대웅전을 복원하려고 하고 있다.

오층석탑은 전체적으로 체감률이 가지런하고 안정된 조형미가 돋보이는 고려 초기의 석탑으로 보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작년에 보물로 승격하였고 그 옆의 석조는 강희 21년 임술(1682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배 모양을 하고 있어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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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는 해탈문에서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답다 ⓒ 김정봉

대웅전 왼쪽 산길로 들어가면 용수폭포가 나오고 그 위에 석가여래좌상을 모신 미륵전이 있다. 미륵전에 석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는 게 이상하지만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런 경우가 많이 생겼다 한다. 석가여래좌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으며 둥근 얼굴에 두툼한 눈두덩을 가졌고 잘생겼다기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미륵전을 내려와 다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도선수미비가 있다. 도갑사를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의 행적을 기록한 비로 조선 효종 때의 것이다. 크기가 장대하고 약간 비스듬히 바라보고 있는 거북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살아서 성큼성큼 걸어 나올 것만 같이 생동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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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을 받고 정갈하게 서있는 부도 ⓒ 김정봉

도선수미비 왼쪽 옆엔 부도밭이 있다. 아침햇살을 받아 정갈하게도 서있다. 아침 햇살에 밝게 서있는 부도들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무위사의 새벽이 그리워진다. 도갑사의 아침햇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무위사에게 정을 빼앗겼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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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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