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16회

등록 2006.08.22 08:46수정 2006.08.22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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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병기로 사용할 물건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저렇듯 화려한 병기는 사실 생사를 가르는 순간에는 오히려 거치적거릴 게 뻔했다. 사람을 찌르거나 베는 데에는 보석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이다. 본래 검 자루나 검 집이 없었던 것을 나중에 만들었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자네들에게 일을 부탁했으니 자네들이 일을 처리함에 있어 불편함이 있으면 안 될 게야. 미리 본 보의 사람들에게 말은 해놓았지만 이것을 자네들에게 들리는 것이 자네들이 일을 하기에 편할 것이란 생각 때문이네."


그는 말과 함께 탁자 위로 용봉쌍비를 밀어 정확히 함곡 선생과 풍철한의 앞에 하나씩 놓이게 하였다.

"이 시간 이후로 본 보의 사람이라면, 아니 본 보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네들의 일에 모든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게야. 자네들은 누구라도 신문(訊問)할 수 있고, 노부 역시 예외는 아니네. 그 권한은 이 사건에 국한되는 것이지만 자네들에게 무례한 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심장을 도려내도 좋네. 그 누구라도 말이지."

이것은 보주의 말이었다. 운중보주의 말은 운중보 내의 법이었고, 그것은 곧 무림의 법이었다. 그곳에 있는 좌중은 마치 얼굴에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보주마저도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면 그 누구라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단 5일간이네. 자네들이 용봉쌍비를 들고 그 위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간이지."

엄청난 권한을 받았지만 정작 함곡과 풍철한에게는 오히려 빙굴에 떨어지는 듯한 한기를 느끼게 하는 보주의 다짐이었다. 이제 5일이란 의미는 더욱 명백해졌다. 5일 내에 흉수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마 자신들의 목이라도 내놓아야 할지 모른다. 보주는 밖을 향해 나직이 불렀다.


"좌노제(佐老弟)는 게 있는가?"

그러자 방문이 열리며 문 앞에 부복하고 있는 한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바로 일기당천 무적신창 좌등이었다.


"분부를 기다리고 있소이다."

그의 모습에 운중보주는 미간을 좁히며 씁쓸한 미소를 띄웠다.

"자네는 너무 딱딱해. 그러지 말라고 아무리 말을 해도 그러니…. 언제나 고칠 셈인가? 그런 자세나 말투는 이미 십수 년 전에 버렸어야 할 것을…, 쯧쯧…."

"속하는 이것이 편하오이다. 하실 말씀은?"

"고집불통 같으니라구…. 여하튼 자네가 책임지고 함곡 선생과 풍대협께 모든 편의를 봐주게. 일단은 매송헌(梅松軒)으로 안내해 주게나."

매송헌은 철담 하후진의 거처였다. 철담은 매화와 소나무를 가장 좋아했다. 아마 절개를 지키는 것으로는 그 두 가지 이상을 따라갈 것이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존명(尊命)!"

좌등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외쳤다. 그 모습에 다시 운중보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순간에 함곡과 풍철한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치며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의 시선은 허공에서 엉켜 들었으나 그리 친근한 눈빛은 아니었다.

"오늘 저녁을 같이하기로 하세. 그때 다시 깊게 논의하기로 하지."

인사를 하는 두 사람과 그들의 일행을 보며 보주는 고개를 끄떡였다. 나가도 좋다는 의미였다. 그들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자 시선을 각원선사에게로 돌렸다.

"대사께서도 저들의 조사에 도움을 좀 주셔야 하겠소."

"아미타불…, 노납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을 지경이오. 어찌 그런 일이…. 아미타불…."

각원선사는 염주를 굴리며 불호를 연속해서 외우고 있었다. 어쩌면 죽은 이를 위해서 오늘 밤 내내 경문을 외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무림 최고의 배분인 각원선사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이 운중보 안에 있는 모든 손님들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두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것을 모를 다섯 명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은 침중하게 굳어 있었다. 닷새 후 이 중 누군가가 가져야 할 용봉쌍비가 5일간이라 할지라도 함곡과 풍철한의 손에 들려있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기 때문이었다.


13.

나흘 전에 죽었다는 철담(鐵錟) 하후진(夏候振)의 모습은 살아 있는 것과 흡사했다. 그의 시신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은근한 향기마저 풍기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에 십일향(十日香)이 발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십일향은 시신의 썩는 속도를 늦추고, 십 일 동안은 그 냄새를 지워주는데 아주 좋은 효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서탁(書卓)에 앉은 채 죽어 있었다. 그저 저 자세로 눈을 뜬다 해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죽어 있는 것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각진 턱 선은 세월의 흔적으로 살집이 붙어 피부가 늘어지고, 감겨 진 눈두덩이 주위에도 역시 약간 처지듯 주름이 깊이 패 있는 모습이었지만 은근히 풍기는 위엄은 죽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함곡과 풍철한은 들어서자마자 우선 방안을 쭉 둘러보았다. 어떠한 사건이든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왔을 때의 첫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것이 필요했다. 사건의 해결 실마리는 대체로 사건현장에서 얻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문제가 있었다. 지금 이 사건현장은 사건이 발생한 당시의 상황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풍철한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죽은 철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웅이었다. 무림인들이 존경심을 가지고 경배하는 동정오우(洞庭五友)의 한 사람이자, 현 무림을 말 한마디에 뒤흔들 수 있는 인물이었다. 죽어 있는 지금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간직한 채 보는 이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동정오우라는 최고의 고수들을 지칭하는 명호는 그래서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인물이 죽어있었다. 도대체 그런 인물을 누가 감히 시해할 수 있을까? 더구나 저렇듯 자연스런 자세로 죽어 있게 만들 수 있는 흉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풍철한은 내심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고, 그가 느낀 감정은 이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들도 느낀 것인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와중에서 풍철한의 반보 뒤에 따라 들어온 설중행의 두 눈에 한줄기 이채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두려움이었다. 이미 잊어버린 두려움이란 감정의 짧은 표출이었다. 그리곤 그는 움직임을 멈춘 채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이를 꽉 물었는지는 몰라도 양 턱 선의 근육이 선을 보인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나태하고 게으른 놈!

지금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조금은 동정 어린 눈빛이었고, 또 조금은 버러지를 보는 듯한 혐오스런 눈빛이었다. 그러나 그 눈빛의 색깔은 분명히 미움이었다. 실제 운중보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하는 인물이 왜 자신을 미워하는지 몰랐다. 그것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도 역시 알고 싶지도 않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주눅이 들었다. 저 철담의 눈빛만 보면, 아니 그의 그림자만 보여도 움츠리고 피해다녀야 했다. 어느 날인가 마주쳤을 때,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서 있는 자신을 스쳐 지나가며 동행하던 인물에게, 아니 자신이 들으라고 한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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