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을 쥐락펴락한 '페미니스트' 퍼스트레이디

[인물] 신경쇠약 딛고 일어난 베티 포드... 낙태 등 문제에서 진보적 자세

등록 2006.08.22 16:26수정 2006.08.22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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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럴드 포드 대통령 부부.
제럴드 포드 대통령 부부.여성신문
[조은희 한양대 행정자치대학원 겸임교수 겸 '연구공간, 여성과 정책' 대표] 마약에 중독되어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한 정치가의 아내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의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면? 그래서 열렬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면? 미국의 38대 퍼스트레이디인 베티 포드 여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녀의 남편 제럴드 포드는 1974년 8개월 만에 하원의원에서 부통령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다. 1973년 애그뉴 부통령이 부정사건으로 물러나자 부통령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져 닉슨 대통령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것이다.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취임 연설에서 "매우 힘든 이 일을 시작하면서 오직 한 여자, 제 아내에게 빚을 졌다"면서 아내의 중요성에 대해 거침없이 말했다. 포드가 이렇게 된 계기는 10여 년 전 그들 부부를 파경 직전까지 몰고 갔던 베티의 신경쇠약이었다.

베티는 많은 면에서 전통적 주부였다. 그녀는 가족을 돌보고, 집을 가꾸고, 저녁에는 남편을 미소로 맞이하고, 네 아이를 길러냈다. 1950~60년대 중산층 부인의 행동규범을 그대로 따라온 전후 미국 주부의 전형이었다.

그녀에게 정신적 위기가 다가온 것은 1960년대 중반. 남편은 1년에 285일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녀는 네 자녀와 함께 버려진 듯 워싱턴 교외에서 살고 있었다. 포드가 중요한 인물이 되어 갈수록 베티 자신은 하잘 것 없는 인간이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드는 아내를 신경쇠약의 지경까지 몰고 간 것은 바로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다시는 그녀를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다 백악관 주인이 된 것이다.

베티에게 퍼스트레이디라는 직업은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찾게 해준 기회였다. 그녀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즐겁게 수행했고, 그 역할을 사랑했다. 베티의 주요 관심사는 여성문제였다. 그녀는 더 많은 여성들을 높은 공직에 임명하기 위해 남편에게 모든 영향력을 행사했다. 베개 밑 송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클라라 힐스가 주택 및 도시 개발 장관으로, 애니 암스트롱이 런던 대사로 임명된 데에는 그녀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그녀는 또 남녀평등권을 위한 미국헌법 수정안 통과를 위해 하원 입법위원들에게 직접 전화했다. 공화당에서 급부상하고 있던 캘리포니아 출신의 로널드 레이건의 아내인 낸시가 이 입법안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전문직에 종사했다는 여성이 근로 여성에 대해 그렇게 무관심할 수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 없다"고 유감을 표시했다.


베티는 낙태에 대해서도 "낙태는 음습한 곳에서 나와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이 말은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아직도 널리 인용되고 있다. 그녀는 1975년 8월 TV 쇼에 출연해서 '17세인 자신의 딸이 남자와 동침할 가능성'에 "놀라지 않을 것"이며, 대마초를 피우는 것과 관련해서도 "한번쯤 경험해봐야 된다"고 말하는 등 뜨거운 쟁점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의견을 밝혔다. 이 인터뷰로 그녀의 지지율은 50%에서 75%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페미니스트'라는 딱지는 정치인, 특히 공화당원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그녀가 벌이는 운동은 남편의 정치 생명을 흔드는 일이었다. 포드 대통령은 1976년 재선에서 실패했다. 당시 선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구호는 "베티의 남편을 선출하라"였다.


그러나 퍼스트레이디의 인기가 대통령의 인기로 바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랄까? 포드 대통령의 참모들은 "퍼스트레이디에게 인기를 안겨준 TV 인터뷰가 포드 대통령에게는 1000만 표, 아니면 2000만 표의 손실을 가져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드는 왜 다른 대통령들처럼 자기 아내의 활동을 통제하지 않았을까?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의 관계를 희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헌신적인 남편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는 어려운 것일까?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미국 시에나 대학이 10년마다 실시하는 여론 조사에서 베티 여사는 5위, 8위 등 매번 상위권에 랭크되지만, 반대로 포드 대통령은 늘 하위권을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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