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C급 교사'에게 보내는 편지

등록 2006.08.23 17:17수정 2006.08.23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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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선생님.
오늘 한 일간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시집 서평을 읽고 펜을 들었습니다. 보름 전쯤이던가요? 해운대 장산 계곡 물에 발을 담그고 이번이 세 번째인 시집 출간을 기념하며 L 선생님과 셋이서 조촐히 캔 맥주를 나누던 일이 기억에 새롭군요.

갈수록 시 혹은 시적 삶 자체가 추문이 되는 이 부박한 시대에 시인으로서 또한 인간의 교사로서의 오솔길을 걸어온 선생님이 그날따라 새삼 빛나 보였습니다.

<그 나무가 나에게 팔을 벌렸다>. 실천문학사에서 162번째로 나온 선생님의 시집은 그 제목부터가 내겐 심상찮았고, ‘아무리 큰비 내려도 /하늘 통째로 가리지 않고/ 한 몸 피할 작은 우산 펴듯이/ 해지고 어둠 내리면/ 식구들 저녁 밥상에 둘러앉을 만큼/ 사랑하는 이와 눈빛 맞출 만큼/ 그만큼의 빛이면 족하다’는 첫 시 ‘촛불’은 근래의 내 찌든 마음을 환히 펴주었으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의 많은 시편들은 해설을 쓴 한 평론가의 말대로 ‘생태를 넘어 우주에 깃드는 시’로서 따뜻하고 섬세하며 때론 날카롭기도 한 서정이 어떻게 대승적 서사로 확장·변용되는가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어 반가웠습니다.

한편 L 선생님과 나는 교육현장에서 길어올린 혹은 교육자로서의 자기 성찰로 직조된 시편들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월 교실’에 들어서면 /… 언제 이 밭을 다 일구나‘ 하다가도 ‘가을 교실에 들어서면/ 살진 강에 발목을 담근 듯’하고 ‘풍성한 감자밭에 호미 들고 앉은’ 것 같은 생각부터 드는 선생님은 그 무슨 고상한 시인이기에 앞서 일터가 학교인 천생 교사였지요.

그 교사는 ‘허생전을 읽는’ 국어시간, ‘허생의 꿈은 돈이 아니었다/ 너희들은 어떠냐’는 자신의 ‘주책스런 질문’에 ‘돈!’이라 외치는 아이들에게 ‘혹시 도는 없느냐’며 지레 능청을 떨기도 하고, ‘공중의 새를 근심하여/ 새장에 넣고/ 들판의 백합을 찬미하여/ 꽃병에 꽂’는 식의 ‘교육 또는 사랑은/ 종종 우주에 대한 불경(不敬)’이라는 각성에도 이르곤 하더군요.

그 ‘불경’으로 말한다면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떠올리게’ 하는, ‘고3교실의 벽’에 붙은 수능시험 D 데이 달력이 그랬고, ‘교실 맨 끝자리’에서 ‘시험지 받고도 엎드려 있’는 ‘정신지체 특수반 아이 미란이’는 그저 낙오자가 되기 십상인 교육 현실이 그랬지만 선생님의 시심은 또 다른 곳으로도 자유로이 비상했음은 물론입니다.


'남동생이랑 단칸방에 살고 있는 수연이’, 이틀이나 결석을 해도 ‘전화도 없는 집 연락할 길 막막한’ 그 아이의 담임을 맡은 ‘짝지 후배 여 선생님’이 어느 날 ‘함박 웃음을 물고’서 ‘선생님 수연이 왔어요/ 교실 문을 여는데 그 애 자리가 가득 차 있는 거 있죠/ 교실이 화안해 보였어요’ 소리치는 모습을 본 선생님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나까지 충만해지는 아침이다/ 삼천 대천 우주도 저런 미소의 힘으로/ 곳곳에서 해가 뜨고 별이 빛난다’.


우리는 선생님의 시를 읽으며 날로 곤고해지는 선생의 처지를 잠시나마 잊고 행복했지요. 그런데 그날 우리의 얘기가 방학 동안 진행된 교원성과급 차등 지급 문제로 옮아가면서 분위기는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다른 건 다 차지하고서라도 선생님이 A,B,C 세 등급 중 C급을 받았다는 말에 나는 차마 웃지도 못했으니 말입니다. 선생님의 학교는 학교마다 천차만별인 평가 항목 중에서도 전년도 담임 여부를 경력과 함께 가장 비중 있게 채택했는데 선생님은 담임을 맡지 않아서 그리되었을 것이라고는 했습니다.

교사의 기본 책무 중 하나인 담임 여부가 평가의 기준이 되는 것도 우습지만 부장 보직에 담임도 맡고 수업시수도 경력도 남 못지않으며 학교를 옮길 때마다 학생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다시피 해온 50대 중반의 L 선생님이 B급인 것도 난해한 일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에겐 그런 등급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요, 선생님. 작년 봄 월간지 <우리교육>의 촉탁 기자로서, ‘독서 교육과 토론 수업’의 앞선 실천가로 널리 알려진 선생님을 ‘인물 탐구’한 적이 있는 내겐 그 허튼 이유야 어쨌든 선생님에게 판정된 ‘C급 교사’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무엇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딴 급수완 무관하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사랑하고자 한 선생님들 모두에 대한 국가적 모독이자 불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입니다. 애초 그것의 제도적 부실함과 예상되는 교육적 폐해 때문에 성과급제를 반대해온 우리지만 당장의 결과는 훨씬 혹독한 것으로 나타난 셈이니까요.

J 선생님. 훗날 어느 역사가가 있어 ‘그 시인은 C급 교사였다’고 기록함으로서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죽이는 오늘의 무명(無明)을 준엄히 질타한다 할지라도 내게 이 한 여름밤은 꿈도 별도 없는 긴긴 어둠일 뿐입니다. 내내 뮤즈와 함께 건승하시길.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8월 23일자 <부산일보>의 '부일시론' 칼럼에 실린 내용에 약간의 손을 본 것으로서 일전에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당신, C급 교사야!>에 붙여진 많은 비판적 댓글에 대한 하나의 답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8월 23일자 <부산일보>의 '부일시론' 칼럼에 실린 내용에 약간의 손을 본 것으로서 일전에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기사 <당신, C급 교사야!>에 붙여진 많은 비판적 댓글에 대한 하나의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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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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