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에서 불어오는 진실과 화해의 바람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②] 현기영 소설집 <순이삼촌>

등록 2006.08.23 20:09수정 2006.08.2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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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출신 작가 현기영의 소설집 <순이삼촌>(창작과비평사) 개정판이 나왔다. 1979년 초판 발행 후 27년 만이다. 현기영은 1975년 등단이래 짧지 않는 세월동안, 섬 전체가 비극의 도가니였던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는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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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개정판으로 나온 <순이삼촌> ⓒ 창작과비평사

조선시대 제주도는 정권의 ‘역적’을 위리안치하는 유배지였고, 땅이 척박하여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어 가난과 기아가 만연하던 곳이었다. 탐관오리가 양민을 수탈하고, 외세의 침입으로 백성이 유린당할 적에도 중앙정부로부터 이렇다 할 보호를 받지 못한 변방이었다. ‘이재수 난’을 소재로 한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는 이러한 정황을 잘 나타내 준다.

중편소설 <순이삼촌>은 굴곡 많은 제주도 역사 속에서도 가장 큰 비극이었던 4.3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울에 사는 ‘나’는 집안어른들의 성화로 8년 만에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게 된다. 음력 섣달 열여드레에 지내는 할아버지 제사 때 얼굴이라도 비춰야하기 때문이다. 고향에는 섣달 열여드레 날에 제사를 지내는 집이 많다.

오랜만에 가는 고향 길은 너무 짧다. 내키지 않는 마음을 ‘단도리’할 새도 없이 비행기가 단 오십 분 만에 데려다주고 만 것이다. 그렇게 당도한 고향은 ‘나’를 30년 전 어린시절의 ‘음울한 겨울철’로 안내하고 있었다.

집안 어른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나’는 순이삼촌이 보이지 않음을 이상하게 여긴다. 사촌 형은 ‘나’에게 순이삼촌이 며칠 전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순이삼촌은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주 정정한 모습으로 서울에서 자신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집안 어른들의 대화를 들으며 유년시절 목격했던 학살사건과 시체들 속에서 살아 돌아온 젊은 아낙 순이삼촌의 삶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음력 섣달 열여드레 날,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이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모두 학교 운동장에 집합시킨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 중 경찰, 공무원의 직계가족을 분류해내고 나머지는 모두 교문 밖으로 몰아낸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지만 학교 근처 일주도로변 밭에서 몰살당하고 만다. 그날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까지 5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강제로 마을을 떠나야했다.

‘나’의 고향은 미군정하에서 공비토벌을 이유로 소개된 수많은 중산간지대 마을 중의 하나였고, 순이삼촌은 학살 현장에서 살아온 유일한 사람이었다. 소개령이 해제되고 사람들이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왔을 때, 순이삼촌은 학살터가 되었던 자신의 밭에 고구마를 심는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덩어리만큼이나 크고 실했지만 아무도 그 고구마를 사주지 않는다.

그 후 순이삼촌은 30년 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살다가, 갑자기 서울 나들이 겸해서 ‘나’의 집에 온다. 집안 살림을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나’는 순이삼촌을 반갑게 맞아들이지만, 그녀가 온 뒤로부터 집안이 편할 날이 없게 된다.

순이삼촌은 누군가 자신더러 ‘밥 많이 먹는 식모’라는 욕했다며 대성통곡을 하고, 식탁에 오른 생선살이 부서지면 생선 구웠던 석쇠를 내보이며 자신이 떼먹지 않았음을 주장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한다. ‘나’는 순이삼촌이 신경쇠약과 우울증을 앓고 있음을 알게 된다.

순이삼촌은 서울에서 제주도로 돌아가자마자 고구마 밭에서 약을 먹고 자살하고 만다. ‘나’는 순이삼촌이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린 이유가 30년 전 그 밭에서 일어났던 학살사건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순이삼촌의 영혼은 이미 30년 전 학살사건 때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과 함께 어둠 속에 갇혀버렸던 것. 영혼은 죽고 몸만 살아남아 30년간 위태롭게 버텨온 순이삼촌은 결국 자신이 도망쳐 나왔던 학살터에 다시 돌아가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미군정하에 일어난 제주 4.3사건은 해방이 되었어도 진정한 독립과 평화는 요원했음을 보여주는 우리민족의 비극이다. 현기영의 또 다른 소설집 <마지막 테우리>에서는 외세가 가져다준 해방은 해방이 아님을 제주도의 비극을 통해 여실히 보여준다. 베트남에서 자행되었던 ‘미라이 학살사건’마저 연상된다.

2000년도가 되어서야 ‘제주4.3사건 특별법’이 제정되고,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가 결성되어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지난 4월 위령제에는 대통령이 참석하여 추도사를 낭독하기도 했다.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해방과 6.25를 전후하여 우리 땅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사건이 일어났고, 이렇다 할 발굴조사나 공식적인 진상조사도 없이 방치되는 곳이 허다하다.

자신이 죽지 않으려면 남에게 없는 죄라도 씌워야 했던 시대에, 피해를 입었노라고 떳떳이 말조차 못했던 시대에, 이념이 사람의 목숨을 판가름했던 시대에, ‘용서’나 ‘화해’는 가당치않은 일이었고, ‘평화’는 거짓이었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밝혀주고,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만으로도 화해와 평화에 절반은 다다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조사는 꼭 필요하다.
50여 년 동안 꽁꽁 얼어있던 제주도의 진실이 주민들의 오랜 노력으로 해빙되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전역에서 일어났던 모든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소설 <순이삼촌>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이 들린다. 이 땅에 수없이 많은 순이삼촌들과 그 고단한 삶을 무심히 지켜보았을 조카들이 스크린을 통해 만나게 될까? 이제 그들은 50년의 세월을 건너온 가슴 아픈 진실에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창비,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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