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강원용·박현채
기일이 같은 우리시대 세 스승

8월 17일이 되면 무더위와 장마 속에서도 마음이 분주해진다

등록 2006.08.25 14:01수정 2006.08.26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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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8월 17일, 기일이 같은 우리시대 세 스승이 있다. 근대와 민주주의, 독재와 싸웠던 박현채(왼쪽) 경제학자 겸 사회사상가, 강원용(가운데) 목사, 장준하(오른쪽) 선생은 후대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다.

8월 17일, 기일이 같은 우리시대 세 스승이 있다. 근대와 민주주의, 독재와 싸웠던 박현채(왼쪽) 경제학자 겸 사회사상가, 강원용(가운데) 목사, 장준하(오른쪽) 선생은 후대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겼다.


올해도 8·15 광복절이 오고 8월 17일이 가까워지면 무더위와 장마 속에서도 마음이 분주해진다. 이유는 그 날짜들의 한 가운데에 장준하 선생 기일이 있고 박현채 선배의 기일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장준하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을 내가 맡고 있는 탓에 장 선생 묘소에서 매년 추도식을 갖느라고 박 선배 묘소를 찾아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런데 올 8월 17일에는 강원용 목사께서 세상을 떠나 또 한 분의 큰 스승을 여의게 됐다.

올해도 예년에 그랬던 것처럼, 장준하 선생의 31주기인 8월 17일 오전 9시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 법원리에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에서 선생의 추도식을 거행했다. 아내 김희숙씨를 비롯 유가족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함세웅 이사장, 장 선생 기념사업회의 많은 인사들과 특히 독립운동 사적지들을 찾았던 청년등불대원들이 함께 모여 추도식을 엄숙히 치렀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패권다툼이 치열해지고 그에 따라 우리 내부에서 벌어지는 노선분열이 구한말이나 해방 직후와 다름없이 심각해지고 있는 상황이어서 올해 추도식은 더욱 숙연했다.

17일 장준하 선생의 추도식을 마친 뒤, 묘소를 참배한 인사들과 점심식사도 함께 나누지 못하고 매달 17일에 열리는 동아투위(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약칭) 월례모임에 갔다. 장준하 선생께서 세상을 떠난 1975년에 생겨난 동아투위인데 그 동아투위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있었던 무교동의 선지해장국집 부민옥에서 낮 12시에 모인다.

이날 난 낮 12시 직전에 도착했는데도 벌써 15명 이상의 선후배 동료들이 모여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김명걸 선배 곁에 자리를 잡았다. 자연스레 며철 전부터 병석에 누워계신 강원용 목사님에 관한 얘기를 나누게 됐다.

김명걸 선배는 학창시절부터 경동교회에 다녀서 강 목사님과는 40여년 이상 인연을 맺어오고 있었다. 정확히 12시 30분 강대인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으로부터 12시 5분 강 목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곳에 모여있던 동료들은 모두 애도의 뜻을 표했다.


장준하 선생·강원용 목사, 동아투위와 깊은 인연

장준하 선생과 강원용 목사는 동아투위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 물론 <사상계>의 지적 세례를 받으며 학창시절을 지낸 사람들이라 장준하 선생의 영향은 오래전부터 받았다고 해야겠지만, 특히 장 선생께서 70년대초부터 전개하신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은 언론자유수호운동을 벌이던 <동아일보> 기자들과는 긴밀한 연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동아일보> 기자들은 당시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셨던 천관우 선생께서 장 선생과 연계해서 전개하던 민주수호국민협의회운동에 대해서도 마음 속으로 성원하고 있었다.

장 선생과 <동아일보> 기자들이 하나로 묶이게 된 것은 1973년말에 장 선생과 백기완 선생이 주도한 유신 헌법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지면서부터였다. <동아일보> 기자들 일부가 서명운동본부를 자처했고, 각 언론사 기자들로부터 받은 서명용지를 거두기 시작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긴급초치 1, 2호를 발동하여 장·백 두 선생을 구속하고 개헌청원운동을 힘으로 봉쇄했다. 수감된 지 거의 1년만에 심근경색 등 병환 때문에 병보석으로 석방된 장 선생은 친지들이 보내준 치료비를 광고탄압에 시달리던 <동아일보>의 격려광고에 내놓았다.

자유언론운동에 앞장섰다 해직된 134명의 <동아일보> 언론인들 가운데에는 <동아방송>에 근무했던 신정자씨도 있었다. 신씨는 오늘까지 굳굳하게 투위의 기치를 동료들과 함께 지키고 있다.

강원용 목사 역시 우리들 해직언론인들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기독교계가 중심이 되어 벌인 앙심수 석방운동과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실시한 노동·농민운동을 지원하는 중간집단교육 프로그램에 강 목사가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그런 운동은 <동아>의 자유언론운동과 연계돼 전개됐으며 <동아> 기자들이 해직된 다음에는 그들을 지원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70년대 후반에 강 목사가 발간했던 월간잡지 <대화>에는 현재 <한국방송> 사장인 정연주 당시 동아투위 위원이 근무하기도 했다. 그 월간지는 유신정권의 폐간조치로 곧 문을 닫고 말았다.

장준하 선생과 강원용 목사는 북쪽을 고향으로 둔 기독교인들이며 나이도 한살 차이다. 장 선생이 1918년, 강 목사가 1917년생이다. 두 분 모두 우리 사회와 나라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위인들이다. 두 분의 행적은 공통된 부분과 함께 미묘하게 차이를 보이는 측면도 있다.

직선적·투쟁적 장 선생, 언제나 목숨 걸고 살아가는 지사

부친이 목사였던 장 선생은 중국 대륙에서 일군을 탈출, 6000리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중경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을 찾아가는 결단에서 보여지듯 언제나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지사였다.

새로운 민주한국의 지적 주춧돌이 되고자 태어난 <사상계>가 한 시대의 지성을 대표했고 박정희 독재와의 혈투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직선적이며 투쟁적인 장 선생은 운명 직전 젊은 시절의 오랜 동지들에게 유신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다시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는 말씀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신 독재정권으로서는 그런 장 선생을 그대로 보아 넘길 수 없었을 것이다. 김구-장준하로 이어지는 한국 독립운동의 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함께 앞으로도 우리 현대사의 소중한 부분으로 다뤄져야 할 것이다.

강 목사는 해방 직후 몽양 여운형 선생을 만나고 김규식 박사의 비서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게 되었다.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과 좌우합작운동의 좌절 그리고 한국전쟁의 발발은 강 목사의 생존 자체를 위협했을 것이다.

강 목사가 피난을 가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서 보낸 기아와 죽음의 공포 3개월은 그후 강 목사의 생애를 지배하는 화두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 양측의 극단적 이데올로기로부터 겪어야 했던, 목숨을 내놓으라는 위협, 그에 대한 문제의식은 미국 유학생활 내내 우리 사회가 머지 않아 맞닥뜨리게 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것일 지 모른다. 그래서 미 유니온 신학교의 라인홀트 니버, 폴 틸리히 교수를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극우반공 이데올로기와 그 반대편의 중간 어딘가에 선다는 것,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자로부터는 언제나 감시와 사시의 눈초리가 번득였을 것이고 좌파측으로부터는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매도당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상당한 정도로 이루고 난 지금, 89세를 일기로 타계한 강 목사를 그나마 한국사회가 이만한 수준으로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도록 만든 최대의 공로자로 기억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생소했던 대화문화(며칠 밤을 새워 얘기 나누는 끝장토론)같은 학습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서로 증오하기만 하던 여야, 군부와 민간, 재계와 노동계가 점차 이야기 상대로 서로를 바라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장 선생과 강 목사, 두 분이 생존해 계시는 동안 가까이 자주 만나뵐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 또한 큰 스승으로부터 큰 배움을 얻는 기회이기도 했다.

경제학자·사회운동이론가 박현채, 냉전시대에 비판적 메시지

8월 17일에 유명을 달리한 또 한 분이 박현채 선배다. 박 선배는 1995년에 돌아갔으니까 올해가 11주기째다. 10주기에 맞춰 내려던 전집 7권이 올해 나왔다. 박 선배가 경제학자로, 사회운동의 이론가로, 저술가로, 가장 오랜 세월 대학 시간강사로 지낸 일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말술을 마다하지 않던 선후배들과의 술자리는 많은 화제를 남겼다. 80년대초 배가 고픈 것이 아니라 말과 술이 고프면, 끼리끼리 배낭을 짊어지고 산에 오르던 시절, 이른바 음지쪽 사람들 사이에는 몇개의 유수한 '산악회'들이 있었다. 전에 하도 중앙정보부나 보안사 등에서 사건 작명을 그럴 듯하게 하니, 그럴 듯한 이름을 우리가 먼저 작명해놓자는 뜻에서 '거시키', '바가지', '무명' 등의 이름을 붙인 산악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산으로 몰려 다녔다.

손수 밥지어 부인들이 정성들여 싸준 반찬에 맛있는 산상 잔치가 벌어지고 갖가지 좋은 술까지 곁들인다. 거나해지면 한곡조까지 뽑았다.

'거시키'에 몇차례 가보면 술 몇 순배가 돌아가기 무섭게 목소리가 높아지는 분이 박 선배다. 위고 아래고 없었다. 제일 연장자인 이돈명 변호사께도 "영감탱이 어쩌고…" 거칠 것이 없는 박 선배였다.

모두 그러려니 내놓은 눈치들이었다. 우리 같은 것들에게는 아예 "야 임마 너 왜 술 안 권해, 엉"하고 을러대기 일쑤였다. 그때 이러저러한 공개단체들의 실무책임을 맡고 있었던 나에게 산길을 멀리 걸을 때에는, 일부러 다른 일행들과는 따로 떨어져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남의 말하듯 해주곤 했다. 현장에서 돌아가는 일을 시시콜콜 접할 기회도 없을 것 같은데 그때 그때 귀담아 들을 말씀을 해주던 기억이 새롭다.

'박현채' 하면 지리산의 소년 산사람으로 지금도 회자된다. 그런 만큼 분단 냉전시대에 박 선배가 비판적 지식인으로 이 사회의 한 구석에서 끊임없이 자신의 목소리로 메시지를 발산한 것은 송곳으로 커다란 얼음벽을 깨뜨리는 작업이었다고 할 것이다.

왕방울 같은 형형한 눈동자에 우렁우렁한 목소리의 박 선배가 곧 나타날 것 같은 환각을 가끔 갖는다. 1990년 이후 박 선배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을 요즘 조정래의 소설 <인간연습>을 읽으면서 헤아려본다.

우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따로 따로 혹은 함께 기여하고 큰 발자취를 남긴 장준하 선생, 강원용 목사, 그리고 박현채 선배가 8월 17일 같은 날짜에 세상을 떠나셨던 일이 우리 모두 함께 기억할 일일 것 같아 몇 자 글로 옮겼다. 세 분의 명복을 빈다.

덧붙이는 글 | 이부영 기자는 열린우리당 전 의장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부영 기자는 열린우리당 전 의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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