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제일 비싼 에비스 맥주를 마시다

[일본 자전거 여행기 ⑨]하마나쓰 해안공원에서 테시오까지

등록 2006.08.31 11:37수정 2006.09.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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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월)] 여행자 천국 루모이 라이더 하우스
달린 거리 40km. 하마나쓰-루모이.


a 아직 남아있는 몇 안되는 해당화.

아직 남아있는 몇 안되는 해당화. ⓒ 박세욱

어제 라이더 하우스에서 사토상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하마나쓰 해안공원까지 갔다 왔다. 아침에 그곳에 다시 한번 가보려고 일찍 일어났다. 함께 밤을 지새운 사람들은 나처럼 노숙체질인지 바닥에 뻗어있다. 조심스레 짐을 챙겨서 나왔다. 그런데 어느새 스즈키 상이 나와 인사를 한다.


하마나쓰(はまなす)란 해당화를 뜻한다. 5-7월이 제철인데 벌써 8월 중순이다. 피어있는 꽃을 거의 발견하기 힘들다. 그러나 핀 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피어있는 해당화를 찾으면서, 해당화가 만개한 이곳을 상상하며 바다가 보이는 산책로를 혼자 거닐고 싶었다.

루모이에는 무료 라이더 하우스가 있다. 어제 만난 하야시는 이곳에서 다시 보자고 했었다. 이곳은 정말 좋은 곳이라면서. 100엔 숍에서 물건을 사며 길을 물었다. 한국 배우인 박용하의 열혈 팬이라고 밝히신 아주머니가 친절히 그려준 지도 덕에 그리 어렵지 않게 찾았다.

외관상 망해버린 건물 같은데 내부는 다르다. 넓은 오토바이 자전거 주차 공간이 있고 거실에는 텔레비전, 비디오, 오디오 및 읽을 책들까지 있다. 작은 식탁이 따로 있으며 냉장고, 세탁기, 가스렌지, 전자레인지 및 온갖 식기가 있다.

자신의 닉네임을 '오쿠레'라고 소개한 아저씨가 친절히 안내를 해준다. 매일 20~30명이 머문다고 한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라 지켜야 할 사항들이 많다. 이곳에는 1주일은 기본이고 심지어 한달까지 죽치고 눌러앉은 사람들이 꽤 된다. 하루만 머물고 가는 나 같은 사람들보다는 며칠씩 머물다 가는 것이 보편적인 것 같다.

a 라이더하우스 벽은 추억 저장고

라이더하우스 벽은 추억 저장고 ⓒ 박세욱

2층 침실을 둘러보는데 밥을 먹으러 나가던 한 떼의 라이더 그룹 중 한 할아버지가 갑자기 나 쪽을 향해 소리친다. 그리고 홱 돌아서 가버렸다. 거리도 좀 떨어져 있던 데다가 빠르게 쏘아붙이는 말이어서 순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엔 뭔가 주의사항을 일러주는 줄 알았는데 결국 말 내용을 해석하니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쿠레 상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지 말고 머물지 않을 거면 꺼지라는 말이었다. 내가 잘못 알아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순간 들었다. 그러나 분명 맞는 해석이었다.

순간적으로 머물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으나, 할아버지를 다시 만나 말다툼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거니와 그런 말을 듣고 그냥 가버리면 더 기분 나쁠 것 같아서 그 말을 안 들었던 것처럼 무시하기로 했다.


오쿠레 상에게 온천 반값 할인티켓(전단지처럼 나눠주는 티켓)을 받아서 온천에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서 또 반값할인을 하기에 '내일은 벤또(도시락), 야키소바, 바나나, 아이스크림, 그리고 또 제이타쿠(호화스러운 생활)'라고 중얼거리며 일본에서 제일 비싼 맥주에 속하는 에비스(Yebisu) 맥주를 샀다.

냉장고가 있기에 아이스크림과 맥주를 살 수 있었다. 돌아가 냉장고에 산 음식을 넣고 있는데 아까 할아버지가 나를 감시하는지 또 한마디 한다. 벤또는 냉장고에 넣으면 안 된다고, 아까 마음을 좀 다스렸기에 '울컥'하지 않고 정중한 말투로 "아 그렇습니까?"라고 했다.

그리고 "왜죠?"라고 말을 이으려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덧붙인다. 냉장고에 써있는 규정사항을 보란다. 약간 분하지만 일보 후퇴. 규정사항에 써있다. 벤또는 냉장고에 넣어서는 안 된다고. 안 읽어본 내 잘못이니까. 내일 아침에 먹으려고 두 개나 샀기에 지금 둘 다 먹어야 하는 상황이다.

a 하야시의 오토바이. 나의 자전거.

하야시의 오토바이. 나의 자전거. ⓒ 박세욱

거실에 나가니 반가운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박 상!" 하야시 군이다. 마침 잘 됐다. 하야시에게 벤또를 주고 같이 먹었다. 벤또를 다 먹을 무렵 하야시가 새로 밥을 하고 세이코 마트에서 사온 징키스칸을 만들었다. 징키스칸은 홋카이도를 대표하는 음식중 하나로 양념 양고기 구이다.

제대로 된 식당에서 한번 먹어보려 생각했던 음식인데 아직까지도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식당을 찾지 못해 못 먹었던 차다.(이때 양고기 구이에 맛 들린 나는 이후에도 몇 번 양고기를 사서 직접 구워먹었다.)

a 콩나물을 넣은 징키스칸

콩나물을 넣은 징키스칸 ⓒ 박세욱

이제 맥주를 마실 차례,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가며 맥주 캔을 땄다. 그랬더니 저 멀리서 한 명이 쪼르르 달려 나오며 내가 맥주 캔을 딴 그 장소에서는 맥주를 마시면 안 된다고 말한다.

당연히 밖에서는 상관없다.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나도 말이 거칠어지려 함을 느꼈다.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 같아서 거부감이 들었다. 지금 지적은 모르는 것을 친절히 알려주는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튼 건물밖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하야시 군과 친절하게 안내해준 오쿠레상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금 만 23세, 중소기업의 높은 자리에 앉아 월 30만 엔 이상의 월급을 받으며 생활했으나 과감히 그만두고 오토바이 여행 중인 하야시 군. 40대로 보았으나 실제 환갑에 가까운 오쿠레상. 매년 여름이면 이곳을 찾아와 느긋이 머물면서 자진해서 숙소 안내를 해주는 분이다. 알고 보니 마마챠리라고 부르는 최저가형(10만 원대) 자전거 여행자다.

a 이러고 놀았다

이러고 놀았다 ⓒ 박세욱

거실로 돌아오니 젊은 라이더들이 얼굴에 낙서를 하며 놀고 있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토모짱이 붙잡는다.

"박 상! 여기 좀 와 봐요, 이 친구 얼굴 좀 봐요."

잠깐 앉으란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한국 사람이라고 소개를 한다. 반응들이 온다. 한국어로 뭔가를 써달란다. 가장 심하게 낙서중인(자청해서) 하야시의 팔에 한글로 '칼'이라고 써 주었다. 뭐가 멋있다는 건지 여기저기서 "갓꼬이이(멋지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토모짱이 하얀 티셔츠를 가져오더니 자기 이름을 한글로 써달란다. 이후에 2명의 티셔츠에 또 1명의 오토바이에도 한글로 한마디씩 써주었다. 그렇게 오늘 밤이 저물었다.

[16일(화)] 주유소에서 멋진 홋카이도 깃발을 받다
달린 거리 130km. 루모이-테시오.


a 오랜만의 비. 숨 고르는 중

오랜만의 비. 숨 고르는 중 ⓒ 박세욱

어제 일기예보대로 비가 온다. 이게 얼마만인가? 어제 친구들은 내일 출발한다는 나의 말에 비가 오는데 좀더 머물다 가라며 붙잡았지만, 이제 비가 너무 익숙해져 버린 것 같다. 더구나 일기예보는 약한 비라고 했다.

a 눈길을 끌던 오비라 마을 표지판

눈길을 끌던 오비라 마을 표지판 ⓒ 박세욱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겁다. 왜냐하면 나의 홋카이도 여행의 하이라이트, 최고 경관을 보리라고 기대했던 곳이 내일부터 시작할 홋카이도 최북단 소우야미사키 구간. 일기예보에서는 이번 주 토요일까지 비가 온다고 했기 때문이다. 비가 여행의 마지막까지 망치려고 작정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비는 일기예보와 다르게 상당히 세게 내린다. 일기예보의 부정확함에 일말의 희망을 걸어본다.

점심때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유소를 찾았다. 노란색 주유소.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거의 모든 오토바이 라이더들이 가지고 있는 'Safety Summer in Hokkaido' 깃발 때문이었다. 나도 하나 갖고 싶었다. 노란색 간판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으면 준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났다. 가서 물어보니 역시 기름을 넣어야 된다. 자전거에 기름을 넣을 순 없기에 하나를 팔던지 달라고 했다. 기분 좋게 하나를 받았다.

오늘은 오르막 내리막길이 여러 번 반복되는 구간을 지났다. 지겹도록 달려서 테시오에 도착했다. 숙소를 찾았다. 보험에 가까운 희망이었던 미치노에키(우리나라 고속도로 휴게소에 해당)는 대 실망이었다. 비가 계속 오기 때문에 지붕이 절대적인데 지붕이 없다.

a 2006 Safety Summer in Hokkaido

2006 Safety Summer in Hokkaido ⓒ 박세욱

해안캠프장 및 100엔 라이다 하우스도 가보았으나 결국 선택한 곳은 지나가다 발견한 길가에 지붕과 벤치가 있는 곳. 관리인에게서 이곳에 텐트를 쳤다가는 경찰이 뭐라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결국 텐트를 쳤다. 오늘도 제이타쿠!(호화스러운 생활). 저녁에 토비키리(찐 옥수수) 및 양념된 생(生) 양고기를 구워 밥과 함께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두 개나 먹었다. 느긋하게 달려도 내일은 와카나이(일본 최북단 지점 바로 옆의 마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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