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꽃이 백일동안 피어 있는 게 아닙니다

달내일기(47)-무덤가에 백일홍을 심은 뜻은?

등록 2006.08.30 14:41수정 2006.08.3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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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내마을 뒷산을 산책하다가 보면 많은 무덤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 무덤을 지키는 나무는 도래솔(무덤가를 죽 둘러친 소나무)이 아니라 백일홍이다. 백일홍을 무덤가에 심은 걸 본 적은 있지만, 이곳처럼 온 무덤마다 백일홍을 심은 걸 본 건 처음이었다.


마을 어른들에게 여쭤봤더니 바랐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옛날부터 심어왔기에 심었다는 것.

그래 맞다. 시골에는 옛날부터 해왔기에 지금도 그냥 하는 게 많다. 그러니 의미를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궁금증이 많은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a 백일홍이 핀 무덤 1

백일홍이 핀 무덤 1 ⓒ 정판수

여기 거론하는 백일홍은 정확하게 말하면 '나무백일홍'이다. 백일홍은 '나무백일홍'과 '꽃백일홍' 둘로 나뉘는데, 보통 백일홍이라 하면 '꽃백일홍'을 말한다. 나무백일홍은 '배롱나무'란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

이 나무백일홍(이후 그냥 '백일홍'이라 함)은 예로부터 사당이나 절, 무덤, 선비의 정원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히 언급돼 있지 않지만, 꽃말이나 전설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백일홍의 꽃말은 '떠나간(혹은 죽은) 님(혹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다. 사랑하던 사람이 멀리 떠나면(죽으면) 그의 육신을 없어지나, 그에 대한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그리운 안타까움 때문에 백일 동안 붉은 꽃을 피운다는 것이다.


전설은 더욱 슬프다. 옛날 한 어촌마을에 행패를 부리는 이무기를 달래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는데, 한 장사가 나타나 그 이무기를 해치우고 처녀를 구해준다. 이후 둘은 사랑하게 되고, 장사는 죽은 이무기의 짝을 마저 해치우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때 장사는 자기가 성공하면 흰 돛을 달고 돌아오겠다고 한다. 백일을 기도하며 기다리던 처녀는 절벽 위에서 장사를 기다렸으나 붉은 돛을 단 배가 나타나자 절망하여 절벽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이무기의 피가 튀어 돛이 붉게 물든 줄 몰랐던 장사는 처녀의 죽음을 알자 크게 슬퍼하였다. 그 후 처녀의 무덤에서는 붉은 꽃이 백일 동안 피었다 한다.


a 백일홍이 핀 무덤 2

백일홍이 핀 무덤 2 ⓒ 정판수

그래선지 무덤가에 핀 백일홍은 아름답기보다 '처연(凄然)'하다. 붉은빛이 교태롭다기보다 귀기(鬼氣)가 어려 있다. 매끈하게 빠진 가지조차 고운 육체미보다는 애잔한 아픔을 자아낸다. 하필 한여름에 붉은빛을 토해내는 것도 그래서 폐병 환자가 토해내는 핏빛 같아 더욱 슬프다.

그리고 백일홍은 한 꽃이 백일 동안 피어 있는 게 아니다. 한 꽃이 지면 다시 다른 꽃이 이어 피기에 보는 이의 눈에는 늘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한 개인으로 보면 꽃의 지고 핌이 행불행의 교차와 같고, 한 사회로 보면 수많은 사건 사고의 부침 속에서도 말없이 역사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a 백일홍이 핀 무덤 3

백일홍이 핀 무덤 3 ⓒ 정판수

누군가의 무덤 앞에 섰다. 바람에 백일홍 붉은 꽃이 가벼이 흔들린다. 고요히 누워 있는 망인(亡人)에게 속삭였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의 간절함이 이 꽃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습니다. 계신 곳에도 언제나 평화가 깃들기를 빕니다"하고.

덧붙이는 글 | 제 블로그 '달내마을 이야기'에 나오는 '달내마을'은 경주시 양남면 월천마을을 달 '月'과 내 '川'으로 우리말로 풀어 썼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다래골(다래가 많이 나오는 마을)' 또는 '달내골'로 불리어졌답니다.

덧붙이는 글 제 블로그 '달내마을 이야기'에 나오는 '달내마을'은 경주시 양남면 월천마을을 달 '月'과 내 '川'으로 우리말로 풀어 썼습니다. 예전에는 이곳이 '다래골(다래가 많이 나오는 마을)' 또는 '달내골'로 불리어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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