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명세서 묶음에서 문화를 읽다

고려대박물관특별전 '새야 새야 파랑새야' 돌아보기

등록 2006.09.01 15:19수정 2006.09.01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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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박물관이 자료 수집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진 특별전 '새야 새야 파랑새야'가 1일 개막되었다.

a 그 냄새가 일과의 하나이던 최루탄을 박물관에서 만나는 감회가 새롭다.

그 냄새가 일과의 하나이던 최루탄을 박물관에서 만나는 감회가 새롭다. ⓒ 곽교신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원작) 연필 초고본과 몽당연필들, '4월은 잔인한 달'로 잘 알려진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 번역 초고본이 눈길을 끈다. 번역자 이인수 영문과 교수는 한국전쟁 때 비극적으로 처형되었다.


또, 4.19로 학생들이 희생되는 현실을 외면하는 지식인의 양심 고백인 조지훈의 장시 '늬들 마음을 우리가 안다'를 부인인 김난희(82) 여사의 붓글씨로 만나볼 수 있다. 담배파이프, 안경 등 조지훈 시인의 유품을 보는 감회도 새롭다.

이른바 '6월 민주항쟁' 때 호헌을 천명한 전두환 정부를 상대로 고려대 교수 30인이 서명한 ‘개헌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성명서 원문과 이를 찍은 타자기도 전시되어 있다.

함께 전시된 최루탄도 새삼스럽다. 아직도 우리 후각에 선명히 남은 최루탄을 박물관 진열장에서 만나는 감회는 새삼스러울 수 밖에 없다.

내 주변도 철저히 모으면 귀한 역사다

특히 김민수 명예교수가 1957년부터 2001년 퇴직 때까지 44년간 받은 월급명세서 모음은 전시물의 압권. 봉급은 물론 시험감독료가 담겼던 봉투까지 모아둔 꼼꼼함은 학예실 관계자가 "김민수 교수의 소장 자료들을 보고 질렸다"고 전할만큼 치밀하다.


a 급여명세가 수기에서 전산 출력으로 바뀐 첫 달(1973년 5월)의 명세표. 개인의 사소한 급여명세서가 모여 귀한 사료가 되었다.

급여명세가 수기에서 전산 출력으로 바뀐 첫 달(1973년 5월)의 명세표. 개인의 사소한 급여명세서가 모여 귀한 사료가 되었다. ⓒ 곽교신


두꺼운 누런 서류 봉투를 잘라 표지로 삼고 검은 철끈으로 묶어 15묶음의 자료집이 되었다. 이것으로 급여 수준의 변천은 물론 1973년 5월분부터는 급여가 수기에서 전산으로 처리되기 시작했음도 확인된다. 버릴 수도 있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수집하고 정리되니 시대상이 그대로 읽혀지는 귀중한 사료가 된 것이다.

이번 특별전에 총 270권 530점의 전시 자료를 제공한 김 교수는, '기록 문화'가 결코 거창한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생활 주변에 있음을 보여준다.


잘 분류되고 정리된 김 교수의 급여명세서 묶음을 보며 언뜻 조선왕조실록의 철저한 기록 정신이 연상되는 것은 무리일까. 우리 민족의 피에는 기록과 수집의 천부적 '끼'가 흐름을 보여주는 듯하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

a 교지(敎旨)를 연상시키는 조교수 발령장. 프린터로 임명장이 발행되는 시대에 이 문건은 귀한 가치를 지닌 사료가 되었다.

교지(敎旨)를 연상시키는 조교수 발령장. 프린터로 임명장이 발행되는 시대에 이 문건은 귀한 가치를 지닌 사료가 되었다. ⓒ 곽교신

최장기간의 정밀한 기록이라는 면에서 세계가 놀라는 조선왕조실록을 가진 전통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는 기록과 수집에 의외로 무디다. 79년 말 ~ 80년대 초 혼란기의 주요 국정기록 일부는 확인할 곳이 없다는 공공연한 비밀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이번의 고려대박물관의 특별전 '새야 새야 파랑새야'는 특정 대학의 기록이라는 의미를 넘어, 기록과 수집이 후세를 위해 얼마나 소중한 작업인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좋은 전시회가 될 것이다.

전시물 정리를 돕던 한 학생이 "나도 아르바이트 봉투까지 다 모을 걸" 하던 혼잣말은 이 전시회가 관람자들에게 주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대변한다. 전시장을 돌아보고나서 '내 주변도 꼼꼼히 모으면 역사'란 것을 누구나 깨닫게 된다면 관람자로서는 대성공이다.

신혼부터의 가계부 일체나 자녀 출생의 작은 흔적조차도 소중할 것이다. 월급명세 뿐만 아니라 입사시험 수험표 합격통지서까지 다 모아두면 후대에는 말이 필요없는 정밀한 시대 기록이 될 것이다.

우리는 소중한 우리 주변의 기록을 너무 쉽게 흘려버린다. 유신시절 고려대 휴교를 단행시킨 대통령긴급조치 제7호 발동을 톱으로 다룬 신문 원본을 고려대도 소장하지 않고 있음은 학교측도 반성한다고.

이 신문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가 이번 전시에 대여한 학생(지금은 졸업생)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역사의 한 소용돌이를 보도한 신문원본을 쉽게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최근의 사건인 건국 이후 최초의 대통령 탄핵을 보도했던 신문 원본을 가지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될까.

중국의 동북공정이 지금부터라도 발해와 고구려의 역사를 새로 먼저 기록해두려는 중국 정부의 치밀한 계산임은 이미 간파된 사실이다. 기록하지 않는 자는 역사를 가지지 못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의 것이다.

이 특별전을 어린 학생들이 많이 와서 보고 자료 정리의 중요함을 깨달았으면 한다고 고려대박물관 학예연구실은 당부한다. 생각하기에 따라 이 전시회에서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전시는 9월 30일까지입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1번 출구에서 에서 2~3분 거리입니다. 
무료 관람. 전시문의 : 02)3290-2771

덧붙이는 글 이 전시는 9월 30일까지입니다.
고려대학교박물관은 지하철 6호선 고려대역 1번 출구에서 에서 2~3분 거리입니다. 
무료 관람. 전시문의 : 02)3290-27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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