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명자에게 바친 사랑의 진혼곡

[소슬바람의 평화로운 책읽기③] 조병옥 수기 <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

등록 2006.09.04 10:28수정 2006.09.0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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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 표지
<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 표지한울
책 날개를 펴면 우아한 분위기의 부인이 살짝 웃음을 머금고 있다. 고생이라곤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이 귀부인은 실제로는 배고픔과 전쟁, 냉전시대를 온몸으로 겪으며 산전수전 다 치른 여인이다. 중년 이후로는 머나먼 이국 땅 독일에서 불우한 망명자의 아내로 살다가 사랑하는 남편을 라인강변에 묻고 노인이 다되어서야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여인이다.

이 여인이 고국에 홀로 돌아와 험난했던 삶을 잔잔하게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가 <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2006, 한울)이다.


무엇보다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대단히 감성적이고 아름다운 문체였다. 따뜻한 봄날 나비가 너울너울 그리는 곡선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소절 한 소절 절묘하게 꺾어 넘기는 소리꾼의 노래 가락을 듣는 것 같기도 하고, 이른 저녁 빈속에 걸쭉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몽롱하고 아련한 느낌이 드는 글투였다.

나는 책을 읽는 내내 새파란 가을하늘의 고추잠자리처럼 매력적인 글줄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나왔다했다. 꿈결처럼 젖어드는 느낌의 문체와는 달리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지독히도 고통스럽고 남루한 현실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 강간을 ‘알선한’ 중국인이 준 쌀 한 자루를 쥐고 오늘 저녁은 쌀밥을 실컷 먹을 수 있다는데 신이 나서 집으로 오는 열 살배기 소녀만 있을 뿐이다.

소녀는 음악에 천부적 재능이 있었다. 몹시 빈곤한 가정형편 속에서도 중학교를 다니고, 고등학교에 가고 마침내 음대를 졸업하고 기적적으로 대학원까지 진학한다. 그는 장래가 촉망되는 여성 음악가였다. 타고난 재능과 열정이 넘치도록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운명적 사랑이 나타난다. 음악가 조병옥이 운명적으로 사랑한 사람은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정치학자 공광덕이었다. 그는 당시 3년간 옥살이를 하고 출소한 후, 전과자란 딱지 탓에 일자리도 구하지 못하고 시집간 누이 집에서 얹혀 살고 있었다.


‘동백림 사건’은 1967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동베를린을 거점으로 한 대규모의 반정부 간첩단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 있던 유학생, 대학교수, 예술가 등 2백 명 가까운 지식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잡혀 들어왔고, 이들 중 2명이 사형을 당하는 등 34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도 이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었다.

정치학자 공광덕과 음악가 조병옥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독일로 날아가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은 ‘당신의 무의식까지 사랑한다’고 고백할 정도로 서로를 지극히 아낀다. 경제적 궁핍이 떠나지 않았고, 자유롭게 고향에 갈 수 없는 처지였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알아주는 사람과 함께 있기에 행복한 날을 보낸다.


그러나 오랜 망명 생활의 끝자락에 남편 공광덕은 암에 걸려 생사의 기로에 선다. 부인 조병옥은 이대로 남편을 보낼 수 없다. 그녀는 가혹한 운명을 준 신 앞에서 한 판 ‘맞짱’ 뜰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42일간의 단식’이었다. 그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남편의 목숨을 두고 일생일대의 모험을 한다.

“사람이 42일이나 굶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가?” 이는 단식을 만류한 의사뿐 아니라 환자 공광덕도, 단식을 결단한 부인 조병옥도 떨쳐버릴 수 없는 물음이었다. 부부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 42일을 조심스럽게 시작한다. 42일 동안 부부는 두런두런 지난 삶을 되새김질하기도 하고, 그동안 하지 못한 애틋한 고백을 하기도 한다. 환자는 일체의 음식을 끊고 물만 마시며 하루하루 귀한 시간을 보내며 신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간다. 마침내 공광덕은 자신 속에 있던 빛을 만난다.

42일 후 놀랍게도 몸 속에 있던 암세포가 사라졌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남편 공광덕은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 부인의 극진한 사랑으로 남편은 ‘삶’이란 아름다운 경험을 1년 더 누리게 된다.

1988년 공광덕은 숨을 거둘 때까지 조국에 발을 딛지 못했다. 망명객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보다 먼 땅이었다. ‘공항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이름이 죽을 때까지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인 조병옥은 남편의 ‘사망확인서’를 들고서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었다.

‘분단된 조국’이 한 정직한 학자의 삶에 너무도 깊게, 너무도 오래 개입했다. 게다가 죽음 후에도 그 넋을 기리는 노래 한 자락도 불러주지 않았다. 홀로 돌아온 부인은 남편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조국 땅에서 진혼곡을 부르듯 글을 썼다. 이 회고록은 그를 온전히 사랑한 사람이 바치는 가장 ‘온전한’ 진혼곡일 것이다.

라인 강변에 꽃상여 가네

조병옥 지음,
한울(한울아카데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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