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욕이 부른 화

다단계(?)에 빠져 행방이 묘연한 리OO

등록 2006.09.04 18:20수정 2006.09.0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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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사람이 전화를 하고,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고 끊는지 모르겠네."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닐 텐데도 못마땅하다는 듯이 내뱉는 걸 보면, 꽤 사무국장의 신경을 거슬린 전화였던 모양이다.

"무슨 전화데요?"
"리OO라고 알아요?"
"리OO? 모르겠는데. 그렇게 대뜸 이름만 대면 얼굴 아는 사람도 모를걸? ……."

전화를 걸어왔던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인도네시아 사람을 찾는다며 전화를 해서는 자신이 누군지 밝히지 않고 이것저것 묻고 신경질적으로 끊어 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그 전화를 했던 사람을 만난 건, 지난 토요일(2일) 늦은 저녁이었다. 쉼터 사무실을 불쑥 들어선 그 사람은 인사도 없이 무슨 조사를 하는 사람처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대뜸 "어제 전화(통화)했던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한 손에 큼지막한 자동차 열쇠를 들고 있었는데, 왼손 오른손으로 번갈아가며 열쇠를 잡아 시선을 끌게 했다.


"제가 통화했던 사람은 아닌데 무슨 일이지요?"
"리OO라고 아시죠?"
"글쎄요. 그렇게 말하면 모르고요. 어떤 사람인지 설명을 한번 해 보시죠."
"음…, 키는 작달막한 게 이만하구요, 머리는 늘 뒤꽁무니를 묶고 다니는데…."
"한국에 온 지 오래된 사람인가요?"
"한 삼 년 됐다고 들었는데, 아주 열심히 살려고 하는 것 같아 귀여워해 줬거든요."
"그래, 무슨 피해라도 입으셨어요?"
"네, 그렇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요."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요?"
"핸드폰을 주민등록증을 빌려서 개설해 놓고는 전화요금을 내지 않아요. 그것도 한두 개도 아니고…."
"핸드폰이요? 가까운 사이였나 봐요? 주민등록증을 빌려주시게."
"같이 하*** 하거든요."
"그거 다단계 아닌가요?"
"다단계 아니에요. 공장 직판 사업이에요."

다단계냐는 질문에 버럭 얼굴을 붉히며 답하는 것이 괜한 말 싸움날 것 같아 말을 돌렸다.


"어찌됐든 리OO가 누군지 모르겠는데요."
"아니, 여기 자주 온다고 해서 왔는데…. 안양에도 자주 다니고, 마△△라고도 부른다고 들었어요."

그제야 나는 리OO가 누군지 감이 왔다.

"부부죠?"
"네, 맞아요."
"그 친구요, 예전에 작년 겨울엔가 하*** 물건을 우리 쉼터 거실에 벌려놓고 몇몇과 얘기하는 걸 보고, 여기서 절대 장사하지 말라고 했던 기억이 있거든요. 그 후로 여기 왔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얘기 나눠본 적이 없어서 연락할 방법이 없는데요."
"연락처는 제게 있어요. 전화를 해도 안 받고, 집에 찾아가도 만날 수 없어서 답답해서 왔어요."
"피해액이 어떻게 되는데요?"
"좀 많아요."

그 와중에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쉼터 식구 중에 눈치가 빠른 수빠르노가 시O에게 전화를 했다. 시OO는 리OO와 친해서 같은 성당에 종종 다닌다는 친구였다. 시OO는 묻지도 않은 리OO와 자신의 일을 털어놨다.

쉼터에서 간식을 들며 얘기하는 이주노동자들
쉼터에서 간식을 들며 얘기하는 이주노동자들고기복
"리OO 도움으로 핸드폰을 개설해서 매달 꼬박꼬박 전화요금을 갖다줬는데, 한국 사람이 '왜 전화요금 내지 않느냐?'고 자주 전화가 와서 요즘은 제가 직접 내요."

그제야 쉽게 정리가 되었다. 리OO는 우리 쉼터를 찾아왔던 여인과 함께 하*** 판매업을 했던 모양이다. 주중이나 낮에는 일을 하고, 주말과 밤에는 하*** 판매를 하던 리OO는 한국인의 도움을 얻어 핸드폰을 한국인 명의로 개설할 수 있도록 도와줬던 모양이다.

리OO는 절친한 친구들을 중심으로 핸드폰 개설을 도왔고, 핸드폰 요금을 자신이 받아서 내 왔었다. 리OO로서는 물품 판매를 위해 인도네시아 친구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한 수단이었고, 한국인 사업자 역시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로 손발이 척척 맞았던 모양이다.

그러던 것이 사업이 잘되지 않았는지 리OO가 전화요금을 중간에서 가로채면서 문제가 터진 것이었다.

리OO의 얘기를 들으면서 리OO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경험상 한국인보다는 자국출신 이주노동자들이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타이인 부부가 똑같은 일을 하다가 자신들만이 아니라 동료 친지들에게 큰 피해를 주는 걸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장 직판인지 다단곈지 모르지만, 주간에 일하고, 간혹 야근까지 하는 사람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매업을 하여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자체가 무리인 듯싶었다. 본인 스스로야 열심히 노력해서 돈을 번다고 했겠지만, 지나친 과욕이 친구들과의 관계를 서먹서먹하게 만들고,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도망치며 살아야 하는 신세를 만들어 버린 것이었다.

이상한 것은 숱한 이주노동자들을 만나다 보면 리OO와 비슷한 일을 겪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선은 싹싹하고 우리말을 잘해서 대인관계가 좋다는 것이고, 그 다음은 부지런하고 똑똑하다는 것과 각종 정보에 빨라서 다른 이주노동자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리OO처럼 한 번 문제가 불거지면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게 된다.

야무지고 당돌했던 리OO가 어느 순간 도망자가 됐는지 모르지만, 리OO의 묘연한 행방에서 욕심만큼 무서운 것이 없다는 걸 깨우친다.

덧붙이는 글 | 기사 내용의 당사자들 이름을 익명처리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기사 내용의 당사자들 이름을 익명처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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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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