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현실적인 은유의 제국

[서평] 김영하의 <빛의 제국>을 읽고

등록 2006.09.05 18:25수정 2006.09.0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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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빛의 제국>, 김영하 지음.

<빛의 제국>,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빛의 제국>은 작가 김영하가 <검은 꽃>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신작 장편 소설이다. 잘 알려진 대로 그의 독특한 글쓰기는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아우르며 평단의 주목을 두루 받아왔다. 개인적으로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포함하여 세 번째로 그의 작품과 만나는 셈이다.

우선 이 책을 두 번씩이나 읽어내려 갔지만, 내 깜냥(스스로 헤아릴 수 있는 능력)으로 뭐라 딱 규정하기 힘든 구석이 많은 소설이란 걸 고백해야겠다.


책의 편집자는 이미 "<빛의 제국>이 잘 읽힌다면, 그것은 저자의 실수가 아니라 독자의 오독이다"라고 '경고'한 바까지 있으니, 정말 불친절하기 이를 데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 사회의 속물성을 포착하다

그렇다고 작가가 알듯 모를 듯한 얘기로 '쿨'한 척하며 이 책을 내놓았을 리는 만무하다. 그가 보기에는, 서로에게 무심한 사회에서 속물인 것을 감추려면 쿨 해지고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약 자신의 쿨과 냉소가 없어진다면 "속물성은 금세 무자비한 햇빛 아래 알몸을 드러낼 것"(책 101쪽)이기 때문이다.

의도적으로 작가 자신의 속물적인 한계를 덮기 위한 게 아니라면, 이 소설은 차라리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동명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독자들의 고요한 무의식에 모난 돌멩이 하나를 던지려 했다고 해석하는 게 훨씬 나을 것 같다. 그렇게 세상을 조롱하고 은유하려 했다고.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작가가 작심한 듯 소설 속 곳곳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우리 사회의 속물성은 읽는 이의 가슴 한쪽이 뜨끔할 만큼 날카로운 구석이 있다. 예를 들면 이렇다.


"매력만 있다면 사람들은 뭐든 용서하려고 들지. 좀 부도덕해도, 말을 뒤집어도, 사악한 짓을 해도, 다 이해하려고 한단 말이야." (책 35쪽)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너무 늙지도, 그렇다고 젊지도 않은 매력 없는 남자처럼 안전한 존재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대체로 가족을 부양하고 있으나 동시에 그 가족으로부터 경원시 된다. 가끔은 위험한 거래를 제안받고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가담한다. (중략) 떡값이라 불리든 뇌물이라 불리든 혹은 정치자금이라 불리든, 어쨌든 그 부정의 폐쇄회로 어딘가에 접속되어 있으며, 거기서 벗어나려는 헛된 꿈은 이제 품지 않는다." (92쪽)



초현실주의로 포장한 후일담 소설

김영하의 <빛의 제국>은 굳이 딱지를 붙인다면 '후일담 소설'이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80년대 젊은이가, 이제는 한 치 앞의 미래도 가늠하기 어려운 21세기 속의 중년이 다 되어 벌이는 낯선 생존 투쟁기라고 할까!

물론 작가의 '날렵한' 글 솜씨 탓에, 식상하고 상투적으로 80년대 학생 운동을 추억하는 부류의 소설하고는 다르다. 게다가 뜻밖에도 주인공 기영은 남한 출신의 청년이 아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기영의 북한 생활은 작가의 사춘기 시절을 메타포한 것이라고), 현재의 자본주의적 삶에 중독된 채 무료하게 살아가는 용도 폐기된 남파 간첩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갑작스럽게 하루도 채 안 되는 시간 안에 북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당연히 갈등 한다. 종로 한가운데에서 짧고 강렬한 행복감을 주는 콜라를 마시며, 자신이 떠나온 사회주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떠올려본다.

'일요일 오전엔 해물 스파게티를 먹고 금요일 밤엔 홍대 앞 바에서 스카치위스키를 마시는'(책 289쪽) 데 익숙한 그가 결국 선택할 수 있는 곳이란?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모험이라고 해봐야 불륜밖에 없는'(283쪽) 이 사회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영특한 딸과 외제차를 파는 미모의 아내를 두고 30평 아파트에 사는 기영의 선택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하늘은 검은데 세상은 밝은 태안반도의 조명 아래에서, 눈물로 범벅이 된 기영의 얼굴은 사회주의 조국을 포기한 자괴감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꾸려다 닮아버린 세상을 어쩔 수 없이 선택해서 살아야 하는 절망감과 겹쳐진다.

끝내는 아무 데로도 가지 못하는 비상구 없는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 미친 듯이 버텨내야 한다는 깨달음!

어지럼증을 일으키는 은유의 제국

한편 작가는 소설 곳곳에 여러 가지 의미심장한 은유의 파편들을 흩뿌려놓았다.

주인공 모두는 상대방에 대해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각자 서로 전혀 다르게 인식하며 살고 있다. 후배 소지현은 선배의 생활 습관까지 꿰고 있고, 아내 장마리는 남편의 어린 시절까지도 동정해왔지만, 그게 기영의 위장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

기영 역시 후배와 아내에 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추호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모두가 상대를 자기 식대로 이해해 버리고 말 뿐이다. 말하자면 진실에 대한 은유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소설은 시종 어머니(혹은 모성애)가 부재한다. 기영과 마리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불안하고 비정상적이다. 그들의 딸 현미에게 비친 엄마 마리의 모습조차 속이 빈 껍데기 사랑에 불과하다. 게다가 조지 오웰의 1984년에 기영이 남파해 온 설정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듯한데….

그렇지만 이렇게 다양한 작가의 형식적 실험이 독자와 만나는 지점이 정확히 어디인지 파악하기는 버겁다. 너무 많은 은유와 불분명한 암시 때문에 책을 덮고 나면 어지럼증이 가장 크게 남는다. 세 번씩이나 책을 읽기엔 이야기는 이제 새롭지도 않고 시간도 여유롭지 않다.

빛의 제국 (교보 특별판)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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