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웃음, 깊은 손맛, 삶에서 터득했지요"

[인터뷰] 여성농민의 힘, 충북 음성 '고추장 박사' 김영희씨

등록 2006.09.08 15:31수정 2006.09.0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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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맛, 아무나 있는 것이 아니다. 친정어머니 어깨 너머로 보고 익힌 고추장을 만드는 기술이 이제 전국 한살림 식구들이 다 첫손 친다. 깊은 어머니의 손맛, 은근한 맛을 가진 고추장 박사 김영희씨(54세).


그의 깊은 속은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하도 잘 웃어 "허허" 거린다고 뭐가 좋으냐고 주위에서 그러지만 자부심 하나로 자기만족하며 산다. 결혼한 지 30년, 유기농한 지 25년, 고추장 담은 지 15년.

한살림전국생산자회를 이끌고 있는 남편 최재두(57) 회장은 늘 외출이 잦으니 김영희씨는 죽으라고 일만 했다. 웅숭깊은 손맛처럼 마음 속 깊은 곳에 농익은 삶의 지혜가 엿보인다. 대학에서 식품을 전공한 막내가 농사짓겠다고 들어와 곧 맞아들일 며느리와 충북 음성 최성미마을에서 흙집 짓고 오순도순 살 생각에 벌써 가슴이 뛴다.

a 알맞게 익어가고 있는 고추장독을 뒤로 하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매일 이분이 이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

알맞게 익어가고 있는 고추장독을 뒤로 하고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매일 이분이 이처럼 웃을 수만 있다면. ⓒ 이우성

김영희씨는 벌써 후계자가 생겼다. 막내아들이다. 막내는 아버지가 중매를 섰다. 청주한살림 실무자인 며느릿감을 예전부터 점찍어놓고 아들과 다리를 놓았다. 막내는 충청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어머니가 하는 고추장 만드는 일이 자리가 잡히는 것 같고 비전이 있어 보였는지 들어와서 농사지으며 살겠다고 했다.

대를 이어 농사지을 수 있어 김씨는 연방 웃음이다. 막내는 올해 9월에 결혼한다. 30년 전 결혼할 때 지은 집을 90년에 입식부엌으로 고쳤는데 이제 이곳을 헐고 아담한 흙집을 식구 손을 모아 다시 지을 생각이다.

이들 부부가 농사짓는 땅은 2500평 남짓. 그중 1400평 비가림하우스 9동에는 고추와 무를 나눠 심고 매년 돌려짓기한다. 90년대 초 한살림 초창기에는 쌀을 비롯해 24가지나 넘는 작목을 했다. 몇 골씩 나눠 상추, 근대, 시금치, 배추 같은 채소와 유정란을 하면서 한살림으로 내보냈다. 그것도 팔리지 않아 갈아엎는 게 반도 넘었다. 손해나도 해야 했다. 죽으라고 일만 했다. 아이들 굶겨 죽일 것만 같아 새벽부터 일했다.


남편 최 회장은 한살림운동을 한다고 집을 나가면 일주일이고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초창기 한살림이 잘 되지 않고, 내다 버리는 것이 많을 때는 가슴도 많이 아팠다. 심지어 때려치울 생각도 들었다. 그럴 때마다 김씨가 남편을 다독였다.

"한살림 안 하면 죽을 사람이란 걸 내가 알아요. 농사는 내가 총대를 멜 테니 하고 싶은 일 다 하세요. 나는 안 흔들릴 자신이 있어요."


그즈음 시작한 것이 고추장이다. 집에 한살림 실무자들이 많이 다녀갔는데, 그때마다 고추장을 먹어보고 맛이 좋다고 시작해 보라고 권해서 15년 전에 시작했다. 재작년부터 어느 정도 자립경제의 기반이 되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흔들어놓아도 고추장이 매일 끓어 넘쳤다. 냉동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차로 이동을 하니 가면서도 끓어 넘쳤다. 고추장은 된장보다 더 민감했다. 된장은 묵으면 맛이 더 좋은데, 고추장은 1∼2년 지나면 맛이 더 나지 않았다. 유명한 고추장 산지를 돌아다녀 보았다. 모두 그 맛이 그 맛이었다. 뒤끝이 깔끔한 맛이 나지 않았다.

김씨는 시집오면서부터 고추장을 담가 먹었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네가 담는 것이 더 맛있다"며 며느리에게만 고추장 담는 일을 시켰다.

고추장은 기후와 물도 깨끗하고 좋아야 하지만 무엇보다 손맛이다. 똑같은 재료를 넣고 담아도 사람마다 맛이 다르다고 한다. 친정어머니가 손맛이 좋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 손맛을 김씨가 이어받은 것 같단다.

김씨는 다른 사람은 못 미더워 모두 자기 손으로만 한다. 지금 5000근 넘게 고추장을 담지만 모두 자기 손에만 의지한다. 심지어 고추 수매할 때 꼭 자기 눈으로 색깔이나 품질을 확인하고 선택한다.

a 지난 2월에 담은 고추장이 햇빛, 바람 맞으며 알맞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2월에 담은 고추장이 햇빛, 바람 맞으며 알맞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 이우성

고추장은 가을에 담는 것보다 설날이 지나 2월에 담는 것이 더 깊은맛이 난다. 가을에 담은 것은 겨울을 지나면서 발효가 잘 안 되는데, 2월에 담은 것은 3∼4월을 지나면서 발효가 잘 되기 때문이다.

김씨는 모두 수작업으로 고추장을 담는다. 고추꼭지를 따서 말려 재래식으로 곱게 빻아 준비해놓고, 엿기름도 보리싹을 틔워 직접 길러 말리고, 메주도 콩으로 만들어 청국장 띄우듯 띄워 말려서 빻는다. 재료를 섞고 고추장 버무릴 때는 모두 맨손으로 작업을 한다. 그래서 깊은 손맛이 배어난다.

지금 김씨의 장독대에는 지난 2월에 담은 고추장이 큰 항아리 수십 개에 담겨 잘 익어가고 있다.

자신의 고추장 맛을 알아주는 소비자들 전화를 받을 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 옛맛 그대로라고, 다른 것은 안 사먹겠다는 전화를 자주 받는다. 15년 전부터 고추장을 담가서 냈지만 수량도 적고, 창고를 짓고, 항아리를 사고, 매년 적자였다. 그런데 재작년부터 양이 많이 늘어나 이제 뿌리가 내린 듯하다. 가공을 하면서 생활도 나아졌다.

이들 부부가 사는 동네는 해주 최씨 집성촌이다. 대원군 시절 한 분이 내려와 쌓은 성이 아름답다고 해서 최성미(崔城美)마을이 되었다.

김씨는 31년 전에 중매로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선본 지 두 달만에 시집왔다. 최 회장은 이곳 토박이. 김씨는 인근 생극 초평이 고향이다. 남편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만 하나 보고 시집왔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농민운동에 열심이었다. 그때 일본의 유기농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유기농을 시작했다. 25년 전이었다. 몇 년 후에 한살림이 태동하고 초기멤버로 활동하면서 한살림생산자가 되었다.

운동하는 남편을 둔 아내는 힘이 들게 마련. 이 남자와 계속 살아야 하나 힘들 때도 많았다고 한다. 그즈음 여성농민회 교육을 받으러 3박 4일간 집을 떠난 적이 있는데, 그 모임에 가보니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다. 그때 농민회가 왜 필요한지 깨달았고 힘이 들어도 남편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간다는 생각을 우선 하게 되었다. 어린 아이들을 방에 가둬놓고 농민운동을 하러 다니기도 했다. 차츰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힘들어도 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 살림에 속은 상해도 남편만 보면 화가 스르륵 녹았어요. 남의 경치만 보면 힘이 들잖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야지 생각했지요. 농사지으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해요."

그때부터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남편과 같은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남편을 뒤따라 다닌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자부심으로 같이 간다고 생각을 했다. 자기 위안이 제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때때로 가정에서 여성 주권을 실천하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도 있다고 웃는다.

예전에는 여성농민회 활동도 많이 했는데, 지금은 고추장을 잘 만들어 팔면서 한살림 유기농 일에만 전념하고 있다. 자신의 가정을 잘 꾸리고 가꾸는 것도 봉사라고 생각한다. 남편 하는 일을 잘 돕고 튼튼한 울타리가 되는 일이 지금 김씨에게 제일 소중하단다.

이 집은 고기를 안 먹고 주로 채소로만 식단을 꾸린다. 된장, 두부도 직접 만들어 먹는다. 겨울에도 두부가 떨어지지 않는다고.

큰아들 현호(29)와 둘째 현숙(28)은 결혼을 했고, 막내 성호(26)만 9월에 결혼한다. 먹고 살기 힘들어 방에 가둬놓고 키우기도 했는데, 모두 개성 있게 잘 자라 주어 미안하고 고맙다. 또 고맙게도 성호가 집에 들어와 농사일을 돕겠다고 해서 후계자를 기를 생각에, 안 그래도 웃기를 잘하는 김씨 얼굴에 요즘 더욱 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행복한 얼굴, 행복한 웃음을 가득 안고 사는 김씨는 이제 한 가정의 튼튼한 울타리를 넘어 모든 생명을 살린다는 한살림의 더 큰 울타리를 건강한 먹을거리로 만들 생각에 분주하다. 행복한 집, 행복한 손맛을 지니고 넉넉한 웃음을 가진 사람의 품은 넓고도 깊다. 더불어 사는 기쁨을 안겨주는 이분이 마냥 고맙다.

a 수십개 큰 항아리가 이제 농가 살림의 큰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수십개 큰 항아리가 이제 농가 살림의 큰 버팀목이 되고 있습니다. ⓒ 이우성

덧붙이는 글 | 이 땅에 농부로 살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현실은 어렵지만 자신이 곧 희망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분의 삶이 귀하고 고맙게 여겨지는 이유는 또 뭘까요?

이 기사는 <흙살림신문>(www.heuk.or.kr) 9월호에 함께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땅에 농부로 살면서 행복한 웃음을 짓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현실은 어렵지만 자신이 곧 희망이라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이분의 삶이 귀하고 고맙게 여겨지는 이유는 또 뭘까요?

이 기사는 <흙살림신문>(www.heuk.or.kr) 9월호에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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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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