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버릴 때 지구는 종말하는 거야!"

[서평] <종말의 바보>

등록 2006.09.15 15:23수정 2006.09.15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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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겉그림
<종말의 바보>겉그림랜덤하우스중앙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고 있는 소행성이 8년 후 지구와 충돌, 지구의 종말!’

이런 뉴스가 보도되자 전 세계는 깊은 공황상태에 빠졌다. 굵직굵직한 국제단체들도 속수무책이어서 방화, 약탈, 폭력 등이 전 세계에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5년이 지난 지금은 오히려 세상이 정적에 가깝다. 그동안 지구 종말의 충격에 자살한 사람도 많았고, 실낱같은 희망으로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린 사람도 많았다.

폐허가 된 도시. 드물기는 하지만 문을 연 병원이나 상점이 더러 있었다. 한동안 문을 굳게 닫아버렸던 슈퍼마켙이 얼마 전에 문을 연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천만다행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은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도시를 떠나버린 걸까? 아니, 이 작은 도시에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종말의 바보>는 3년 후 지구 종말을 앞두고 있는 일본의 작은 도시, 센다이 힐즈 타운이란 아파트에 남아있는 사람들 이야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들에게 지구 종말은 무엇일까?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은 많아”


지극히 자기중심적이고,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바보 취급하기 일쑤인 고집스런 노인의 이야기가 첫 번째 이야기다. 성적으로만 자식들을 평가한 노인 때문에 10년 전에 아들은 자살했고 딸은 집을 나가고 말았다.

“세상이 끝나는 순간 아버지 곁에 있어줄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세요? 세상이 끝날 때 아버지 곁에 있어 줄 사람은 어머니일 거예요. 어머니 밖에 없어요.”


세상이 끝나는 순간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참 평범한 소재다. 이처럼 누구나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지극히 흔한 이야기를 굳이 읽어 볼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정말 그럴까? 소재만큼 정말 평범한 이야기 일 뿐?

책 한권을 읽기 시작한 독자가, 책을 계속 읽을 것인가 말 것인가는 30페이지를 읽는 과정에 결정된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이 연작소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소재를 첫 이야기로 자신 있게 내세우고 있다. 이사카 고타로가 들려주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는 어떤 이야기일까?

또 다른 이웃이야기. 결혼 7년 동안 아이가 없던 후지오 부부에게 뜻밖의 일이 생긴다. 하필 종말을 앞두고 임신이라니. 우유부단하여 아내에게 이끌려 사는 후지오는 인생최대의 선택을 이제 해야만 한다. 그러나 알고 보니 오진이 특기(?)인 의사였다.

“우리가 여기서 아이를 포기하면, 소행성 충돌을 받아들이는 게 되지 않을까?”

‘태양의 약속’이란 제목의 후지오 부부 이야기는 잔잔하게 흐르다가 마지막은 빙긋 웃게 만든다. 마지막 순간 지구 종말은 까맣게 잊고 만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쌍둥이야? 지구 종말을 앞두고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거야? 그것도 이제 태어나보았자 3년 밖에 못살게 될 아이를 낳는 문제로?

오진이 특기인 의사의 잘못이라면 ‘태양의 풍성한 약속’을 너무 적게 받아들이려고 한 것쯤 아닐까? 우리들은 얼만큼의 희망을 선택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희망은 몇 개일까? 태초부터 태양은 우리에게 얼만큼의 희망을 주었던 걸까?

'이사카 고타로'는 누구?

'뫼뷔우스 띠처럼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퍼즐적 구성과 쿨한 감수성, 기발하고 사랑스런 상상력'이 이사카 고타로'의 트레이드마크다.

일본 문단의 기대주 '이사카 고타로'는 1996년 <악당들이 눈에 스며들다>로 제13회 산토리미스터리상, 2000년 <오뒤본의 기원>으로 제5회 신초미스터리클럽상을 받으며 데뷔. 단편 '사신의 정도'로 제57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다.

외에 <칠드런>, <집오리와 자연오리의 코인로커>(제25회 요시카와에이지문학신인상 수상작), <명랑한 갱이 지구를 움직인다>, <중력 삐에로>, <러시 라이프>, <사신 치바>, <마왕>이 있다.
/ 김현자
여덟 편의 이야기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우리들이 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그러나 작가는 결코 평범하지 않게 이야기를 이끌고 있다. ‘이사카 고타로의 COOL한 지구 종말 이야기’란 ‘책 띠지’ 설명이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구가 종말하든 말든 나중 일이다. 일단 이야기들이 재미있다. 마지막 순간에 함께 있을 이웃들의 평범한 일상이 지극히 따뜻하고 눈부시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그래서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영화나 소설로 이야기했던 지구 종말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먼저 죽어버린 가족들을 원망하며 울고불고 하지도 않고, 죽고 싶지 않다고 발버둥치지도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강철의 킥복서 나에바 같은 사람도 있다.

‘아무도 훈련 같은 걸 하지 않는 지금이 가장 강해질 기회’ ‘내일 죽는다고 삶의 방식이 바뀔 리 없다’며 치열하게 훈련 중인 킥복서 나에바는 독자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한다.

“지금 당신의 삶은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방식입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나 자신도 사고를 당할지 모른다. 아니, 내일 당장 죽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 그야말로 3년 후에 지구 종말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전혀 벌벌 떨지 않고 보통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결국 그런 걸 말하고 싶었다. -저자 이사카 고타로

그렇다. 우리들은 오늘 이 순간 이후 어떻게 될지 모르는,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지구 종말 같은 것은 오지 않을 가능성이 더 많다.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될 것이다. 나는 어떤 마지막을 살 수 있을까?

오늘 이 순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우리들은 쉽게 말한다. 그런데 정말 최선을 다하며 살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나에바의 말처럼 얼마나 살 생각으로 선택한 내 삶의 방식일까?

지구에 종말이 오는 그 순간의 구원을 위해 힐즈 타운 옥상에 망루를 세우는 노인이야기에서 쓰치야는 “죽는 것보다 무서운 건 많아”라고 말한다. 아니 주인공 모두가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죽는 것보다 무서운 것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늘이란 날은 남은 날들 중 그 첫 번째 날이다.” 찰스 디더릭은 이렇게 말했다지?

덧붙이는 글 | <종말의 바보>-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랜덤 하우스 중앙 2006년 8월 24/1만원

덧붙이는 글 <종말의 바보>-이사카 고타로 지음 윤덕주 옮김/랜덤 하우스 중앙 2006년 8월 24/1만원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현대문학,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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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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