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 거기 대나무 이파리도 하나 없어!"

독도의용수비대 서기종 할아버지와의 대화

등록 2006.09.16 10:29수정 2006.09.1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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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8일부터 10일까지 독도수호대가 주최한 <독도의용수비대와 함께하는 울릉도-독도 탐방>이란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독도를 바로 알고 먼저 가신 독도지킴이를 기억하자'라는 배경으로 열린 행사입니다. 이 행사의 참석자는 약 70 여명으로 독도의용수비대의 생존대원과 그 가족, 독도수호대, 후원사인 현대증권 임직원, 그리고 일반인들이 참석했습니다. <기자주>

역사의 한 장면인 듯한,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볼 때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이 사진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찍은 것일까, 그리고 이 사진의 주인공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생긴다. 울릉도의 독도 박물관에서 본 사진도 그렇다. 50여년 전에 독도의용수비대가 활동하던 당시에 독도에서 찍은 대원들의 사진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사진의 주인공들이 지금 '울릉도-독도 탐방 행사'에 참석중이다.

50년의 세월을 훌쩍 건너서 다시 독도를 찾아가기 위해 이 행사에 참가한 할아버지들이 그 주인공이다. 당시 독도에서의 생활은 어땠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이 생겨났다. 8일 저녁 식사 후에 현재 독도의용수비대 동지회 회장으로 계신 서기종(78) 할아버지와 약속을 하고 밤늦게 방으로 찾아갔다. 꾸벅 인사를 하고 방으로 들어가니 '앉아 앉아'하면서 자리를 권하신다. "밤늦게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어르신들의 얘기를 듣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하고 말문을 열었다.

"처음 독도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활동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사진. 망원경을 보는 사람이 서기종 대원, 그 아래가 정원도 대원.
활동 당시 독도의용수비대의 사진. 망원경을 보는 사람이 서기종 대원, 그 아래가 정원도 대원.서기종
- 독도의용수비대가 결성된 것이 1954년도입니다. 지금부터 50여년 전인데 당시에는 울릉도에 살고 계셨습니까?
"그전까지는 군에, 군에 있었어요. 1948년도에 국방경비대에 입대를 했었죠."

- 국방경비대라면 지금 군의 전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그 이듬해 1949년 8월 15일에 국군으로 편입이 된거지요. 48년에 입대해서 54년도에 전역했어요."

- 6년 동안 군 생활을 하신 거네요.
"복무하는 도중에 한국전쟁이 났으니까, 전역하지 못하고 연장 연장해서 6년 동안 복무하게 된거지."


- 그럼 1954년도에 전역해서 의용수비대에 들어가신 겁니까?
"그렇지요. 그때 홍순칠 대장이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했어요. 울릉도 배들이 독도에 많이 가는데, 예를 들어서 우리 어선은 20톤 15톤 급인데, 일본 배들은 80톤 100톤 급이거든. 그래 힘에 밀린단 말이지. 일본인들이 우리 어민들에게 우리 영토인데 왜 너희들이 여기 와서 조업하느냐, 그래 가지고 쫓겨 오고 쫓겨 오고 이랬던 모양이라. 그래서 어민들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지금은 군에 복무를 안 하고 있지만 어민을 위해서는 일을 할 수 있지 않냐, 그러니까 독도를 좀 지켜 달라, 어민들을 지켜 달라 했던 모양이라. 그래가지고 의용수비대를 조직해서 독도에 들어 간기라. 5월경에 말이죠."

- 그때 홍 대장님이 조직하셨을 때 지금 서 회장님도 함께 계셨던 겁니까?
"아니 난 그때 없었어요. 난 8월에 (군대에서) 나왔으니까. 수비대 사람들이 모자란데, 이래가지고 내가 들어간거지. 내가 들어갔을 때는 한 16명은 되었을거야. 내가 들어가니까 17명이 된거지."


- 그 당시에도 독도 주변에 일본 배들이 많이 있었습니까?
"그 당시 우리가 가서 있었을 적만 하더라도 일본에 그 고등학교에서 실습선이라는 게 왔다가고, 그 이후에도 일본 순시선들이 오면 총질해서 쫓아 보내고 그랬어. 그게 도화선이 되가지고 일본에서 우리 정부한테 항의하고 그랬었죠."

다시 독도를 찾은 의용수비대. 서기종(우측) 할아버지와 정원도 할아버지.
다시 독도를 찾은 의용수비대. 서기종(우측) 할아버지와 정원도 할아버지.김준희
- 처음 그렇게 독도에 들어가셨을 때, 독도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지 않았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지. 그냥 무인도가 되서 아무것도 없고. 우리가 그 안에 판때기를 쌓아서 판자집을 만들었지. 그래가지고 시작했지."

- 물은 어떻게 구하셨읍니까?
"먹는 물은 서도에 가면 짭짤한 물이 있어. 동도에는 지금 경비대 있는 자리에 거기에 비가 오면 물이 고이지. 근데 그 물이 좋지가 않아. 그 물로 밥을 하고 그랬지. 그렇게 빗물 받아서 생활하다가 그게 다 떨어지면 서도에 가서 물을 가지고 오고 그랬어."

- 짭짤한 물을 서도에서 가지고 오셨다구요?
"그렇지 좀 짜요. 간간해. 그 물이라도 먹어야지."

- 그럼 언제부터 제대로 된 물이 공급된 겁니까?
"없지. 우리 있을 때는 없었지. 요새는 뭐 물이 많아서 목욕까지 한다더라. 그때는 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겨우 근근이 칫솔이나 하고 여름철에는 바다에 가서 씻고. 아주 새까맸지, 인도사람 마냥."

- 그렇게 집을 한 채 지으셔서 거기서 모두 생활하신 겁니까?
"아니 아니 교대로, 교대로 들어가서 산거지. 한번에 한 7-8명 정도가 인제 생활한거지. 한번 들어갈 때마다 7-8명 정도 조직해서 1지대, 2지대 이런 식으로 구성했지"

- 물도 구하기 힘들고 전기도 없었을 텐데.
"없었지. 그때는 울릉도에도 전기가 없었어. 밤이 되면 이제 촛불 아니 촛불이 아니고 그 기름 가지고 호롱불 비슷하게 만들어서 썼지."

- 독도에는 나무가 흔하지 않은데 땔감은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독도에는 나무 없지. 울릉도에서 나무를 구해서 가고 아니면 바다에 떠다니는 나무가 있어요. 그거 주워서 말려가지고 쓰고 그랬지. 그리고 그 폭탄. 1946-1947년도에 미군 비행기가 독도에 떨어뜨린 폭탄이 여러 개 있었어. 그 폭탄 주워가지고 뇌관 제거하고 그 안에 들은 유황 있잖아. 그 유황 꺼내서 불 때고 그랬지"

- 그게 일종의 불발탄 아닙니까?
"그렇지 불발탄. 불발탄이지."

- 그거 잘못 건드리면 터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터지지. 그러니까 죽는 것도 모르고 그때는 그냥 그렇게 한거지"

김준희
- 겨울에는 어떻게 추위를 견디셨습니까?
"겨울에 엄청 춥지. 바람이랑 눈이랑. 뭐 땔나무도 없지. 그냥 판자집에서 담요 하나는 깔고 하나는 덮고 그래서 했지. 지금 생각하면 아찔아찔하지. 밤 되면 추우니까 뭐 7명이 끌어안고 자고, 소주 있으면 소주 먹고 자고. 잠 안 오면 이런저런 얘기하고."

- 국가에서는 어떤 지원이 있었습니까?
"없었지. 울릉군에서는 식량을 좀 지원해줬지. 구호미라고 있었어요. 그 식량을 좀 대줘요. 부식 같은 거는 대원들이 구걸하다시피 해서 얻어오고 그랬어. 김치하고 된장 좀 얻어서 들어가고 그랬어."

- 무기는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무기는 이제 어떻게 구했는지 모르겠는데 홍 대장이 구했더라고. 우리가 들어갔을 때 M1도 있었고 칼빈도 있었고 경기관총도 하나 있었고 박격포, 박격포도 하나 있었고 그랬어."

- 그 무기로 이제 일본배하고 맞섰던 거네요.
"그 당시에는 일본사람들이 비무장이거든. 전쟁에서 패망한지 얼마 안됐기 때문에 일본 순시선만 왔다갔다하고 그랬어. 그 당시에 이승만 대통령이 라인을 그어가지고 일본배를 나포하고 그러면 그 배를 가지고 경비정으로 쓰고 그랬어."

- 일본 순시선을 나포해서 사용했다는 말씀이시죠?
"아니 순시선 말고 작업선, 어선 같은 거 넘어오면 나포했지. 라인을 딱 그어놓고 넘어올 것 같으면 나포한기라요. 그걸 가지고 이제 우리정부에서는 경비정으로 이용하고 그랬어. 해양경찰에서 나포한거지. 딱 선을 그어놓고 일본 배가 넘어오면 나포해버려요. 다시 보내지도 않고 경비정으로 사용한다고. 근데 지금 국민의 정부 들어와 가지고 말이지, 독도가 우리 영토인데 공동수역에다가 넣어놓았어요, 일본하고 우리하고 공동수역에다가."

"죽도? 대나무 이파리도 없다"

독도경비대원을 만나고 있는 서기종 할아버지
독도경비대원을 만나고 있는 서기종 할아버지김준희
이 즈음에서 수비대 어르신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게 잘못됐다 이거지. 일본 오끼섬하고 울릉도하고 해서 중간을 끊으니까 독도가 공동수역에 들어가버린거지. 독도하고 오끼하고 해서 끊었으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말야. 울릉도하고 오끼섬하고 해서 중간을 끊으니까 그렇게 된 거지. 그거가지고 일본이랑 회담하고 하는데 우리는 독도를 기점으로 하자, 저쪽에서는 그게 안 된다 울릉도를 기점으로 하자 그런거지. 이걸 고쳐야 된다고. 독도에 한번 들어가 봤어요?"

- 아뇨 아직, 내일 어르신들이랑 같이 들어갑니다.
"거기 가서 한번 봐요. 거기 자생하는 풀들이 많은데 그게 전부 울릉도에서 날아간 씨에요. 내일 거기 가서 그 잡초하고 여기 울릉도 잡초하고 비교해봐. 똑같아요. 오끼에서 독도에 들어올 거 같으면 162km이고 울릉도에서는 92km인가 그래. 일본에서는 죽도라 그럽니다. 대나무 죽 자를 쓰는 거지. 거기가면 대나무, 대나무 이파리도 하나 없어요. 그런데 저놈들이 다케시마, 다케시마 하는거라. 그렇게 저 놈들이 억지를 부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정부가, 옛날 정부나 지금 정부나 마찬가지지. 아무리 약소국가지만 내 것을 가지고 주장을 못하고 눈치나 슬슬 보고 말이지."

이야기는 곧 국가 보훈처에 관한 이야기로 옮겨졌다.

"젊은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도 한국전쟁 나가지고 딴 데는 다 뺏기고 경상남북도에 일부 밖에 안 남았어요. 그 조그만 독도에 신경 쓸 기력이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어민들이 호소해서 한번 지켜보자 이래가지고 했는데, 문민정부 들어와서 보국훈장을 하나 받았어요. 그리고 이번에 특별법을 만들어서 작년에 공표했어요. 그런데 조사를 제대라 하지 않고 33명한테 훈장을 줬어요. 작년도 8월 15일 광복절 행사 마치고 내가 보훈처 실무자하고 얘기를 했어요. 진위를 밝히라 말이지. 우리 33명 아니란 말이지. 우리는 총 21명인데 그 나머지 12명인가는 아니란 말이지. 분명히 밝혀달라고 했어요. 이걸 밝혀야 기념사업회를 하는데 오늘날까지 그대로 있어요."

작년에 제정된 '독도의용수비대 지원법'에 관한 이야기다. 이 법 제 2조에서는 독도의용수비대원을 33명으로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독도수호대의 조사와 서기종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 활동을 했던 대원의 수는 21명이다. 나머지 12명은 실제 활동은 없었지만 홍순칠 대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에 의해서 대원으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독도경비대와 함께
독도경비대와 함께김준희
(제일 위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 이제 일본 순시선을 격퇴하고 기념으로 찍은 거에요. 여기 보면 독도의용수비대 간판 있죠. '독도의용수비대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은 '독도의용경찰이 있었다'라고 말해요. (사진의 간판을 가리키며) 여기 보소. '독도의용수비대'라고 써있지요. 우리가 이 사진 찍으려고 가짜로 이 간판을 쓴 게 아니라고. 우리를 이렇게 환영해주고 식사까지 대접해주고 이런 적이 처음이에요. 이래서 눈물겹고, 이렇게 행사를 할 수 있어서 고맙고 그래요."

울릉도의 밤이 깊어가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이쯤에서 정리했다. 내일은 새벽 6시에 일어나서 독도로 출발해야 한다. 50여년 만에 다시 독도를 찾아가는 의용수비대 할아버지들의 마음은 어떨까. 서기종 할아버지는 비록 나이는 많으시지만 눈빛은 형형하고 목소리도 자신감이 넘쳐났다. 그분들이 그렇게 정정하신 이유는 50여년 전에, 국가로부터 아무런 지원도 없는 상황에서 맨몸으로 독도를 지켜냈다는 자부심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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