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제일 쉽다는 말, 이제야 알겠어!"

[17살 조카와 떠난 지리산 도보여행 4편] 회남재에서

등록 2006.09.15 14:06수정 2006.09.15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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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망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긴 악양.
투망을 펼쳐놓은 것처럼 생긴 악양.조태용
화개를 지나면 악양이 나오고, 악양의 회남재를 넘으면 청학동이 나온다. 악양에 접어든 우리는 곧바로 회남재로 향했다. 회남재는 악양 초입부터 12km 정도 이어지는 오르막길이다.


악양은 고기 잡는 투망을 넓게 펼친 것 같은 모습이다. 투망이 펼쳐진 곳에 들이 넓게 펼쳐 있고, 투망을 쥔 손에 해당된는 곳에 회남재가 있다. 우리가 있는 곳은 투망의 끝자락, 즉 봉추돌이 달린 곳에 해당된다.

우리는 8월 4일부터 며칠째 계속 걸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우리는 중대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수행자라도 되는 것처럼, 쉬어가라는 요청을 번번이 묵살했다.

"갈 길이 멀어서요." 사실 갈 길이 멀긴 했지만, 쉬지도 못할 만큼 바쁜 여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아마 한여름의 열기를 뚫고 가는 도보여행자의 강인함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순전히 객기였다.

그 분들의 선의를 무시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낮의 태양이 정중앙을 가리켰다. 더위는 마치 폭염을 담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악양면에는 식료품 가게 몇 군데와 버스 정류장, 면사무소, 우체국, 농협이 있다. 면소재지에 없어서는 안 되는 3가지(정류장, 우체국, 농협)가 골고루 있으니 면소재지로서 위상은 지키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막걸리를 판매하는 주조장도 있다.


이 면소재지의 특이한 점은 부동산이 두 곳이라는 것. 조그마한 면에 부동산이 왜 두 곳이나 있을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는 법이라는 경제상식을 떠올렸다. 이곳에서 땅을 찾는 외지인이 많다는 이야기다.

투망의 한쪽 끝에서 시작한 길은 중간쯤 돌아서 다른 한 쪽으로 나갈 수 있도록 이어져 있다. 가운데에는 회남재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을 사이에 두고 날줄로 연결된 마을길이 이어지고, 그 길옆엔 다랭이논이 투망의 그물코마냥 다닥다닥 걸려 있었다. 회남재로 향하는 길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삼촌, 회남재는 여기서 얼마나 걸려?" "아마 3~4시간 정도 가야 하지 않을까?" "그래, 빨리 걷자." 악양 초입부터 눈에 들어온 회남재를 향해 한 시간 동안 걸었지만 회남재는 좀처럼 가까워지지 않았다.

얼마 전, 회남재 가는 길에 포장도로를 만들려고 했으나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반대해 중단됐다. 하지만 악양에서 회남재까지 가는 구간의 90% 이상은 이미 아스팔트로 덮인 상태였다. 아스팔트 밑에서 답답해하는 땅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아스팔트의 퀴퀴한 기름내와 열기 때문에 땅은 여름에 더 힘들 것이다. 땅속 생물들의 외침은 그렇다쳐도, 등줄기에서 물처럼 흘러내리는 땀줄기는 몸속 수분을 다 배출해야만 멈출 것 같았다. 조카의 몸도 어느새 흠뻑 젖어 있었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
터벅터벅 걸어가는 우리를 본 동네 할머니들은 쉬어가라며 말을 건넸다.조태용
오후 3시. 태양은 산간마을을 폭염으로 덮어버렸다. 열기 때문에 힘이 빠져 아스팔트 오르기를 멈춘 조카는 뜨거운 아스팔트에 엉덩이를 붙였다가 풀숲으로 옮겼다. 조카는 배낭을 메고 앉아서 다리를 쭉 뻗고는 머리를 젖혔다. 더는 못 가겠다는 표정이었다.

"삼촌, 얼마나 더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거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조카는 편하게 교실에 앉아 공부하던 순간을 떠올린 것 같았다. 하지만 조카는 아직 세상에서 가장 힘든 것은 힘든 그 시점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열기 때문에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여기서 벗어나면 곧 그냥 추억으로 남을 뿐이라는 것을.

"야, 얼른 가자.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아직 멀었다. 조그만 더 가면 회남재가 나올 거야."

조카는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겨우 힘을 내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든 첫 발을 내딛는 게 힘든 법. 조카는 그 첫 발을 다시 내딛었다.

"어떤 대열의 속도를 결정하는 게 뭔지 알아?" "뭔데?" "뭐긴 뭐야. 그 대열에서 가장 느린 사람이지. 우리 대열의 속도는 네가 결정하는 거야. 삼촌이 앞서 가고 있지만 속도를 결정하는 건 너라고. 알았어?" 조카는 힘없이 대답했다.

회남재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계곡이 나오고 농지가 나오기도 했지만, 마지막 언덕은 나오지 않았다. 아마 그 언덕에 오르면 길은 꺾이고, 오른 것만큼 긴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늘은 파랬다. 뭉게구름이 파란 하늘에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이 길 끝에 뭐가 있긴 한 걸까?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열기도 이어졌다. 아스팔트길을 터벅이며 오르느라 몸이 후끈 달아올랐지만, 그래도 길은 이어졌기에 우린 가야 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후 3시를 넘어섰다. 회남재의 긴 아스팔트도 이제 그 막을 내리고 있었다. 막이 내리는 종점에선 산사태로 무너져 내린 아스팔트를 보수하고 있었다. 한낮의 열기를 식힐 그늘도 없는 그곳에서 포클레인은 토사를 옮겼고 인부들은 길을 치우고 있었다.

우리는 판자를 이용해 만들어놓은 갓길로 그 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인부들이 먹다 남긴 수박이 보였다. 순간 수박을 먹고 싶은 욕망이 한낮의 열기처럼 맹렬하게 솟구쳤다. 조카 녀석도 수박이 먹고 싶었나 보다. 우리 둘은 수박에서 시선을 잠시 멈췄다가, 서로 얼굴을 보고는 씩 웃으며 길을 재촉했다.

드디어 길고 긴 아스팔트길이 끝났다. 하지만 아직 회남재를 다 오르지 못했다. 정말 길다.

더위에 지친 조카. "삼촌, 얼마나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것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
더위에 지친 조카. "삼촌, 얼마나 가야 하는데. 너무 덥다. 방귀뀔 힘도 없는 것 같아. 이것 너무 힘들다. 아빠가 공부가 제일 쉽다고 했는데 오늘에야 그 의미를 알겠어!"조태용

덧붙이는 글 | 농민에게 힘을 주는 직거래 참거래 농민장터(www.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

덧붙이는 글 농민에게 힘을 주는 직거래 참거래 농민장터(www.farmmate.com)에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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