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웰(Lasswell)과 캐플란(Kaplan)의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할 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때에 암살의 가능성은 높아지며, 암살은 흔히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주어 상대방의 정치적 의욕을 감퇴시키는 효과를 산출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이 통과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된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은 정치적 도구로서의 암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살아남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해방공간에서 친일파들이 어떤 방법으로 반민특위를 전복했는지에 관한 세 번째 기사다. <필자 주>
5단계 - 암살 음모: 1948년 9월 29일 반민특위의 등장은 친일파들에게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되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에 의해 정치적 보호를 받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일본이 떠난 한국 땅에서 한국 민중들에게 둘러싸인 친일파들 입장에서는 잠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반민특위라는 '미니 공권력'까지 등장했으므로, 그들의 위기의식은 한층 더 심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민특위가 등장함에 따라 친일파들의 표적도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회나 국회 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국회특위)를 주 표적으로 삼던 친일파들은 이제는 반민특위를 주된 표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먹잇감'을 향해 자신들의 감각기관을 총 집중했다.
위원장·부위원장을 비롯한 반민특위의 인적 구성이 완료된 1948년 10월 하순부터 일경(日警) 출신 친일파들은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들이 생각해낸 것은 암살 음모였다.
여기서 친일파들의 무기가 그 이전과 질적으로 달라졌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단계 관망, 2단계 내부단결, 3단계 국회 압박, 4단계 장외투쟁을 거치는 동안 그들의 무기는 ▲집단사직 ▲성명서 발표 ▲개인적인 심리적 압박(이상 2단계)▲의정활동 방해 ▲전단지 살포(이상 3단계) ▲장외 집회(4단계) 등이었다.
이때까지 그들이 사용한 무기는 주로 내부 구성원들을 단결시키거나 친일청산 주도세력을 심리적으로 압박하거나 혹은 일반 대중에게 자신들의 주장을 선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므로 4단계까지 그들이 겨냥한 것은 주로 인간의 '관념'이었다. 친일파나 친일청산 주도세력 혹은 일반 대중의 머릿속 관념에 자신들의 주장을 엔터(입력)하려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때까지만 해도 '적'의 신체에 대해 위해를 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반민특위가 등장한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무기에 질적 변화를 가했다. 반민특위는 자체 경찰(특경대)까지 보유한 일종의 공권력이었다. 다시 말해, 이 조직은 물리적 힘을 보유한 집단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조직을 상대로 더 이상 '관념 전쟁'을 할 수는 없었다.
친일파들은 물리적 수단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암살 음모를 꾸민 것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공권력에 대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힘(암살)으로 맞서겠다는 계산이었다.
'관념전쟁'에서 '암살작전'으로...
친일파들은 이제 갓 출범한 반민특위가 본격적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암살 작전을 개시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하기로 하였다. 1948년 10월에 암살 음모에 참여한 자들은 다음과 같다.
서울시경 수사과장 최난수, 서울시경 사찰과 수석 홍택희, 전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 등등.
이들은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백민태는 한때 일제를 상대로 소위 '테러'를 벌이던 인물이었다. 친일파들은 그런 인물을 이용하여 반민특위 관련자들을 암살하고자 한 것이다.
11월 17일 친일파들은 백민태에게 구체적인 지령을 하달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살생부를 백민태에게 전달했다. 명단에 적힌 암살 대상자들은 다음과 같았다.
김병로, 권승렬, 신익희, 유진산, 서순영, 김상덕, 김상돈, 이철승, 김두한, 서용길, 서정달, 오택관, 최국진, 홍순욱, 곽상훈.
여기서 김상덕·김상돈은 반민특위의 위원장 및 부위원장이었다.
친일파들은 반민특위가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기 전에 반민특위에 대한 암살 공격으로 기선을 제압하고자 했지만, 암살을 개시하기 전에 음모가 발각되는 바람에 5단계 작전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음모자 중에서 최난수와 홍택희는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노덕술과 박경림은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반민특위가 '어른'이 되기 전에 '싹'을 제거하겠다던 친일파들의 5단계 계획은 일단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되었고, 친일파들은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상황은 6단계 '도피와 맞불'로 넘어간다.
6단계 - 도피와 맞불: 이제 1948년이 지나고 1949년이 밝았다. '워밍업'을 마친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5일 중앙청 205호에 사무실을 차리고 본격적으로 활동에 착수했다. 친일파들도 '타석'에 들어섰다. 반민특위와 친일파의 한판 대결이 예고되고 있었다.
6단계에서 반민특위의 무기가 '검거'였다면, 친일파들의 반응은 '도피'와 '맞불'로 나타났다. 반민특위의 검거 활동에 대해 친일파들은 도피하든가 아니면 맞불을 놓든가 하는 대응 방식을 보인 것이다. 그럼, 그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반민족행위자 7천여 명의 신원을 파악한 반민특위는 검거활동에 착수했다. 1월 8일에는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을, 10일에는 대동신문 경영자 이종형을 검거하였다. 이종형에 관해서는, 앞선 4단계에서 잠시 살펴본 바 있다. 반민법 제정 과정에서 반대 여론을 조성하기 위하여 매일같이 열심히 신문 기사를 썼던 자다.
반민특위가 거물급 친일파들을 연달아 '삼진아웃' 시키자 '대타 전문' 이승만이 또 등장한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다"며 입법부 및 사법부의 관대한 조치를 촉구하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과거보다는 미래'라는 구호는 예나 지금에나 친일청산의 단골 논리였음을 여기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담화문에 맞서 반민특위에서도 대응조치를 내놓았다. 김상돈 특위 부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이승만의 간섭을 비판한 것이다.
반민특위는 이승만의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검거활동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1월 13일에는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인 최린을, 14일에는 친일 변호사 이승우와 일본 귀족 이풍한을 검거했다. 그리고 18일에는 이성근과 이기용을 검거했다. 이성근은 평북 특고과장과 충남지사를 역임한 자였다. 그리고 25일에는 친일 경찰 노덕술을 잡아들였다.
반민특위의 검거 선풍은 친일파들의 전선을 분열시켰다. 친일파는 움츠려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때 친일파들 사이에서는 2가지 상반된 반응이 나타났다. 한쪽은 도피하는 자들이었다. 또 한쪽은 맞불을 놓으며 정면 대항하는 자들이었다.
반민특위 검거선풍에 도피·정면대항으로 분열
처음에 나타난 반응은 도피였다. 반민특위의 '강속구'에 놀란 일부 친일파들은 "일단 숨자"는 결단을 내렸다.
친일파들 중에는 일본 밀항을 선택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어떤 자들은 밀항 직전에 붙잡히기도 하였다. 전 중추원 참의 방의석은 밀항 직전에 붙들렸고, 전 수도청 부청장 이구범도 밀항 직전에 부산에서 시민 제보로 체포되었다.
한편, 밀항 대신에 군대로 도피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상당수의 일경 출신들은 반민특위의 검거를 피하기 위하여 헌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반민특위의 위세가 아무리 당당할지라도 설마 군대까지 건드릴 수 있겠느냐'는 계산을 한 것이다.
그들이 헌병대를 믿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헌병사령관 전봉덕이 바로 친일파였기 때문이다. 전봉덕은 친일파들을 영관급으로 임용해 주었다. 한편, 채병덕 참모총장도 군대에 들어오는 친일파들을 비호해 주었다. 국가 권력이 민족진영(국회·반민특위) 대 친일파(행정부·군대·경찰)로 양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친일 경찰의 대다수는 여전히 경찰 조직에 잔류하고 있었다. 반민특위는 이들을 표적으로 삼았다. 친일 경찰 30여 명이 반민특위에 구속되었다.
반민특위의 검거 작업은 거침없이 진행되었다. 일제 헌병 및 경찰에 이어 중추원 참의 출신들도 붙들렸다. 그리고 일본 군국주의 전쟁을 선동한 아사히신문 서울특파원 정국은도 체포되었다. 2월 7일에는 친일파 문인 최남선과 이광수도 반민특위에 끌려 왔다.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을 거침없이 잡아들이자, 정부측에서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을 했다. 이때부터 서서히 친일파들의 맞불 작전이 시작되었다.
1949년 2월초 정부측에서는 국무회의를 열어 '반민족행위처벌법 일부 개정의 건'을 통과시켰다. 반민법을 유명무실한 내용으로 바꾸려는 의도였다. 2월 15일에는 또 이승만이 반민법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특별담화문을 발표했다.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사람을 구금·고문한다는 보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게 개정 필요성의 근거였다.
이에 대해 반민특위는 물론 김병로 대법원장도 반발하고 나섰다. 이승만은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병로 대법원장과 회동하여, 반민법 개정에 동참시키려고 설득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측의 개정안이 국회에 제안되었지만, 국회는 2월 23일 회의에서 정부측 개정안을 부결시켰다.
이즈음에 반민특위는 이승만에게 정부 내 친일파 조사를 요청했다. 이승만은 처음에는 이를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곧 태도를 돌변했다. 이승만은 한술 더 떠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게 노덕술의 석방까지 요구했다. 김상덕 위원장이 이를 거부하자, 이승만은 또 "반민특위 활동에 신중을 기하라"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런 행정부의 압박 속에서 반민특위는 1949년 3월 초부터 약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친일파들의 계속되는 압박이 반민특위의 힘을 빼놓고 있었던 것이다. 3월 4일에는 친일파 이광수가 도로 석방되었다. 최남선도 곧 석방되었다. 이는 중간자적 입장에 있는 특별재판부가 서서히 반민특위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경 출신 친일파들의 방해공작도 조직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금·정보·조직 면에서 반민특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1차 표적으로 김상돈 반민특위 부위원장을 골랐다. 특위 활동에 가장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이승만 반대에 적극적인 인물을 골라 본때를 보여 주자는 계산이었다.
3월초 김태선 서울시경국장과 최운하 서울시경 사찰과장이 반민특위 와해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후 경찰은 특위위원들에 대한 내사에 착수하였다.
여기서 친일 경찰들은 자신들 생각에 반민특위를 와해시킬 만하다고 여겨지는 '굉장한' 정보를 하나 건져냈다. 김상돈 부위원장도 알고 보니 자신들과 똑같은 친일파였다는 것이다. 그 근거는, 김상돈 부위원장이 일제 때 총대(總代)를 지낸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총대는 지금의 동장이나 이장에 해당하는 지위다.
이런 '굉장한' 사실은 이승만에게까지 보고되었다. 이 문제는 국회로까지 비화되어, 3월 19일에는 김상돈 부위원장에 대한 긴급 파면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다. 반민특위에 대한 역공을 개시한 것이다. '친일'에는 '친일'로 맞불을 놓겠다는 전략이었다.
하지만, 국회는 이를 부결시켰다. 김상돈 부위원장을 친일파로 몰려는 '진짜 친일파'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고 말았다.
"친일에는 친일로" 김상돈 부위원장 친일파로 몰아
친일파들의 맞불 작전은 계속되었다. 반민특위가 자신들을 물리적으로 잡아들이면, 자신들도 반민특위에 물리적 위해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반민특위 위원들에게 테러를 시도했다.
일례로, 3월 19일 반민특위 강원도지부 김우종 조사부장의 호위경찰이 김우종 부장에게 총을 발사하였다. 김우종 부장은 이 때문에 몸에 부상을 입었다. 호위경찰은 오발이라고 변명했지만, 이것은 위장된 오발이었다. 그 호위경찰도 친일파의 끄나풀이었던 것이다. 친일파들의 관여를 증명하는 지령문도 발견되었다.
이와 같이, 6단계에서는 반민특위와 친일파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반민특위는 검거로, 친일파들은 도피 혹은 맞불로 맞섰다.
이제 이들의 대결은 최종 라운드로 다가가고 있었다. 다음 기사에서는 7단계 '물리적 타격과 국회프락치사건'을 다룬다. 반민특위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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