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35회

등록 2006.09.18 08:24수정 2006.09.1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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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등의 말과 달랐다. 좌등이 기억을 정확하게 하지 못한 것일까? 좌등은 분명 보주께서 나오시고 난 후에 회운사태가 들어갔다고 말했었다.

"같이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그럴 시간이 없었네. 사태가 들어오고 난 이후 곧 바로 나와야했네. 회운사태는 이미 오전 나절에 만난 적이 있었고, 철담이 뭔가 이야기하기 위해 부른 자리라서 곧바로 나왔지."

그렇다면 좌등이 말이 반드시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차이는 편하게 기억될 수 있는 노릇이다.

"철담 어른이 회운사태와 만나 무슨 말을 할 것인지 들으신 바라도 있었습니까?"

"모르지. 사태를 만나보면 알게 아닌가?"

"성곤 어른도 철담 어른의 거처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다녀오신 후에 술을 드셨다고 하던데…."


집요했다. 함곡은 조그만 단서라도 잡으려는 듯 세세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성곤이 노부에게 오려다가 좀 전에 말한 청송자와 사공도장 두 분과 만나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모양이야. 그래서 아마 철담에게 가지 않았나 싶네."


함곡은 보주의 말에 조금도 허점이 없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내심 보주가 흉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보주가 말한 '살해할 시간'은 분명 없었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설사 보주가 그 이후에 철담을 찾아가서 죽였더라도 철담이 죽은 위치는 그 자리가 아니었다.

아까도 풍철한에게 말했듯이 보주와 철담이 친구라고는 하나 분명 이곳은 운중보였고, 운중보주라면 그 어느 곳에 가더라도 상석(上席)에 앉는 것이 관례였다. 만약 운중보주가 대화 중에 철담을 심인검으로 죽였더라면 철담이 죽은 그 자리에는 보주가 앉아 있어야 할 곳이었고, 그 반대편에 철담이 앉아있을 것이었다.

함곡은 고개를 저었다. 심인검은 보주의 독문무공이었다. 쇄금도 윤석진이 흘렸듯이 그를 제외하고 심인검을 익힌 사람은 누구일까? 그는 문득 앞에 앉아있는 장문위와 옥기룡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시선을 돌려 보주를 보았다. 그의 행동은 의미심장한 것이어서 아마 보주나 두 제자도 눈치 챘을 것이다.

"심인검을 익힌 다른 분이 계십니까?"

운중보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질문도 타인이라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어떠한 무공을 누가 익히고 있느냐는 사실은 문파의 극비가 될 수 있었다.

"노부는 다섯 제자에게 모두 심인검의 구결을 알려주었네. 하지만 심인검은 깨달음의 무학이네.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는 자신만이 아는 것이지."

다섯 제자. 그렇다면 그들도 흉수 중 한 명이 될 수 있었다. 사안이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심인검을 보주만이 익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들의 예상은 빗나갔다. 이것은 사실 너무나 간단한 이치였는데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보주가 후계자를 정한다는 말은 이미 제자들에게 자신의 절학을 모두 전해주었다는 말이었다. 그 성취야 다르겠지만 닷새 후에 정해질 보의 후계자는 이미 보주와 버금가는 능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다섯 아이들은 자네들의 조사에 기꺼이, 그리고 솔직하게 응할 것이네."

이 말은 함곡과 풍철한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장문위와 옥기룡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보주의 직전제자들을 신문한다는 것은 함곡과 풍철한으로서는 부담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을 보주가 배려한 것이었다. 함곡은 나중에 다섯 제자들을 만나보리라 생각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묻겠습니다. 혹시 보주께서는 철담 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이나 그 날 차를 마시던 당시에 특별히 이상한 점이나 뭔가 보통 때와 다른 점을 느끼신 바 있으십니까?"

"글쎄…."

보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헌데 그 때였다. 문 밖에서 좌등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주. 좌등이외다."

"들어오시게. 무슨 일이신가?"

특히 급한 일이 아니면 식사 중에는 들어오는 일이 없는 좌등이었다. 그가 식사 중에 왔음은 무슨 일인가 있다는 의미였다. 문이 열리고 좌등이 들어와 부복했다.

"쯧… 좌노제 때문에도 소화가 안 되는군."

부복한 것을 지적한 말이었다. 장문위와 옥기룡은 십수 년 전부터 두 사람 간에 매번 이렇게 다투는 것을 보았다. 언제나 탓하는 사부도 그렇고, 그리 윗사람이 말을 하는데도 언제나 똑같은 태도로 모시는 수하도 지독한 사람들이었다.

"속하가 무능하여 또 한 가지 일이 발생했소이다."

주위에 외인이 있는 관계로 말을 아끼고 있는 것 같았다. 머뭇거리는 것도 그렇고 목소리 역시 침울했다. 보주가 고개를 끄떡였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오일 동안 본 보의 식구가 되었네. 말해 보게나."

좌등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청룡각(靑龍閣)에서 사람이 살해되었소이다."

"청룡각?"

청룡각에는 오늘 풍철한과 함께 도착한 신태감의 일행이 머무는 곳이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해되었다니… 보주의 얼굴이 처음으로 찌푸려졌다.

"누군가? 살해된 사람이?"

"신태감을 모시고 온 서당두란 자외다. 신태감이 아끼는 수하가 아닌가 싶은데 자신의 거처에서 살해된 채로 발견되었소이다."

보주는 잠시 말이 없었다.

"흉수가 누구인지 밝혀졌는가?"

"신태감과 그 일행도 조금 전 안 모양이외다. 더구나 신태감은 상부호가 저녁을 초대해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지라 급히 청룡각으로 돌아가면서 보주께 알려 달라 하셨소이다."

운중보가 세워진지 이십육 년이 흘렀지만 이 안에서 의문의 살인이 벌어진 것은 철담 하후진이 처음이었다. 그런데 오늘 또 살인사건이라니…? 더구나 동창의 인물이 살해되었다면 시끄러움을 피하기 어렵다.

"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동창에 면목이 없군. 하지만…!"

보주는 침음성을 흘리며 좌등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네는 스스로를 탓할 필요가 없네. 청룡각 밖에서 그가 살해되었다면 자네의 책임이라 하겠지만 청룡각 안이라면 자네의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곳이네. 이 일로 인하여 쓸데없는 생각을 갖지 않기를 바라네."

"……!"

좌등은 대답하지 않았다. 철담 살해사건 이후 그는 특히 운중보 내의 경비를 배로 늘리기는 했지만 허술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외부인이 침입하기 어려운 지형적인 특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운중보 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일이 극히 드물어서 삼엄하게 경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경비할 인원도 얼마 안 되어 삼엄한 경비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렇다 해도 좌등은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청룡각 내라지만 손님이 살해된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 본 보주가 좌등의 자책을 눈치 채고 미리 부담을 덜어 준 것이다. 자칫 좌등의 성격으로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칠 수 있는 우려가 있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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