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드라마로 고민 중인 중국 역사학자들

등록 2006.09.21 15:29수정 2006.09.21 15:29
0
원고료로 응원
역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최근 TV에서는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가히 “드라마가 역사를 새로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 이후 한국에서 이런 경향이 한층 더 두드러진 듯하다.

이처럼 역사는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지만, 정작 이를 바라보는 역사학자들은 딱히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 정서를 품고 있는 듯하다. 한편으로는 자기 전공인 역사가 대중적 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 반가운 일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드라마가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일탈해 있다는 점 때문에 내심 불편한 정서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서동요>에서 백제 군주가 ‘황제 폐하’로 지칭되는 것, <연개소문>에서 양만춘이 아닌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것, 같은 <연개소문>에서 젊은 날의 연개소문이 김유신의 여동생과 ‘야반도주’를 하는 것, <주몽>에서 ‘송일국’이 눈감고도 과녁을 백발백중시키는 것 등등. 엄연한 객관적 사실에서 벗어난 드라마를 지켜보면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한마디로 형언하기 힘든 어떤 미묘한 느낌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드라마 PD나 작가를 상대로 어떤 항변을 하기도 쉽지 않다. 반응은 너무나도 뻔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다.”
“어디까지나 픽션일 뿐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대중이 반드시 역사학적 방법을 통해서만 역사를 배우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사실 대중은 어렸을 때부터 신화나 문학을 통해 역사를 배운다. 만약 대중에게 역사학적인 실증적 방법으로만 역사를 배우라고 강요한다면, 그런 강요 자체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대중은 역사로부터 금방 멀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 하에서 최근 많은 역사학자들은 역사와 매스미디어의 관계 설정에 관한 지적 고민에 들어갔다. 예를 들어, 작년에 <팩션시대, 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라는 책을 낸 바 있는 경기대 김기봉(서양사 전공) 교수는 “역사 드라마가 최소한 객관적 사실만큼은 침해하지 않도록 역사학자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객관적 사실을 1과 2로 본다면, 역사 드라마의 자유 영역은 1과 2의 중간일 뿐이지 1과 2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지적이다. 드라마 작가는 역사적 사실의 범주 안에서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에 반해, 대중이 역사 드라마를 흥미롭게 시청하더라도, 대중은 그것을 어디까지나 픽션으로 받아들일 뿐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이 매스 미디어에까지 관여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학자들만 이러한 고민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과 역사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최근 동일한 고민에 빠져 있다. 최근의 역사 열풍 속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영화나 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역사학자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지만, 그런 매체들이 역사를 잘못되게 혹은 왜곡되게 기술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중국에서는 특히 청나라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청나라의 태평성대를 열었던 강희제·옹정제·건륭제 등을 소재로 한 드라마도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서태후를 소재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지금 중국에서는 역사 드라마가 무협지의 인기를 이미 능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대중의 인기를 끌고 있는 이러한 드라마들이 역사적 사실관계에서 일탈해 있다는 점 때문에 불만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말의 중국을 소재로 한 <공화제를 향하여>에서 서태후가 이홍장의 이름을 부르는 장면이 있었다고 한다. 이홍장은 19세기 말 중국의 외교·정치·경제를 장악한 실권자였다. 당시의 서양인들이 광서제를 만나는 것보다도 북양대신 이홍장을 만나는 것을 더 영광으로 생각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홍장은 막강한 권세의 보유자였다. 중국 청화대학의 한 역사학자는 “서태후가 그런 이홍장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는 것은 결례”라며 드라마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또 역사가 대중적 인기를 끄는 상황 속에서 대중적인 재야 역사 전문가들이 부각되는 것에 대해서도 중국 역사학자들은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얼마 전에 <인민일보>와 CCTV가 공동 주관한 한 교양 프로그램에서 어느 재야 전문가가 초빙되어 함풍제 시기를 역사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 재야 학자는 함풍제에 대한 부정적 평가의 근거로 ▲처음부터 황제 재목이 아니었다 ▲8국 연합군이 베이징을 침략했을 때에 함풍제가 베이징을 이탈했다 ▲8명의 섭정 대신을 잘못 임명했다는 점을 제시했다고 한다.

위에 언급한 청화대 학자는 “그가 제시한 근거는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매스컴의 취향에 맞고 언변이 좋은 사람들이 대중에게는 최고 전문가로 부각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처럼, 중국 역사학자들은 매스 미디어가 학술적 가치보다는 대중적 인기에 따라 역사학자들을 ‘선별’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갖고 있는 모양이다. 한편, 매스컴 일부에서는 역사 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에 학계와 연대하려는 경향도 있다고 위 학자는 언급했다.

엄청난 파워를 보유한 매스 미디어의 위력 앞에서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무기’의 초라함을 느끼고 있는 듯하다. 엄청난 파급력을 갖고 있는 매스컴과 비교할 때에, 역사학자들의 무기인 ‘학술지’는 그 효과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일반인들이 학술지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령 일반인들이 학술지를 입수한다 해도 전문용어와 각주로 빽빽한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대중과의 소통’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 대중과의 소통에 실패하면 역사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일종의 위기감 때문이다. 역사는 인기를 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학은 그렇지 못한 오늘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역사학이 좀 더 대중에게 다가서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방치하면, 역사 소비자(대중)를 문학 분야에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학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중국 학자들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제시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청화대 역사학과 교수인 어느 중국인 역사학자의 해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이 이야기는 최근 한국을 방문한 다른 중국인 학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위의 청화대 교수는 다음과 같은 3가지 방법을 내놓았다고 한다.

첫째, 매스 미디어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대학원 신입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원은 전문적인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라는 인식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는 그런 측면이 있다.

매스 미디어 종사자들을 역사학자로 훈련시킴으로써, 이들이 훗날 매스 미디어에 다시 나가서 대중에게 실증적 방법으로 역사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작년에 청화대 역사학과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매스 미디어 종사자를 대학원 신입생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둘째, 역사가 자신이 대중적 글쓰기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관계에 충실하면서도 아놀드 토인비처럼 알기 쉬운 언어를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관련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 같은 용어를 쓸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는 미국인 중국사 학자인 조나단 스펜서에 관한 코멘트도 있었다. 조나단 스펜서처럼 학술 서적과 대중 서적을 각각 다른 방식으로 집필하는 훈련을 하자는 것이다. 이른 바 학술 버전(version)과 대중 버전을 구분하자는 것이다.

셋째, 대중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대중에게 정확한 역사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이 매스 미디어의 역사 교육에 대해 비판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다. 일례로, 미국 도시의 시민 문화 센터에서는 실제로 그러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위 청화대 학자는 소개했다. 이 학자는 자신의 미국 방문 경험을 토대로, 미국의 시민 문화 센터에서는 역사문제에 관한 고급 담론이 벌어진다고 소개하였다.

지금까지 소개한 바와 같이,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역사의 풍요’ 속에서 전개되는 ‘역사학의 빈곤’에 대해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으며 또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많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위와 같이, 이미 역사전쟁에 돌입한 동아시아에서 대중과 정치는 역사에 심취해 있지만, 정작 역사를 전공으로 하는 역사학자들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 동아시아의 역사학자들이 이 문제에 관한 고민에 빠져 있는 만큼, 앞으로 이에 관한 많은 대안들이 나오리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역사와 역사학’ 그리고 ‘역사학과 매스 미디어’ 또한 ‘역사와 정치’가 향후 어떤 방식으로 상호 갈등을 해소해 나갈지도 주목된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하루가 지옥" 주차장에 갇힌 주택 2채, 아직도 '우째 이런일이'
  4. 4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5. 5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체코 대통령, 윤 대통령 앞에서 "최종계약서 체결 전엔 확실한 게 없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