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패망 60년이 넘도록 식민지 피해배상 문제가 완결되지 않은 것은 한국 정부의 무능 때문인가 아니면 일본 정부의 몰염치 때문일까?
그러나 한·일 과거사 문제에 있어서 미국이라는 최대 변수를 제외하고는 올바른 인식을 도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제 패망 이후에 동북아 패권국가로서 한일관계를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제1공화국 당시 한·일 식민지 배상문제에서 미국이 어떤 기능을 수행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기자 주>
식민지 배상청구 문제는 정부수립 이전부터 주요 현안으로 떠올랐다. 남조선 과도정부(南朝鮮過渡政府) 시기부터 이 문제가 논의되었던 것에서 그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남조선 과도정부란 1947년 6월 3일 군정법령 제141호에 의해 민정 이양을 목표로 설립된 기구로 미 군정청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출범 2개월여 만인 1947년 8월 13일 남조선 과도정부는 '대일 배상요구조건 조사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서 산정한 대일 배상요구액은 1948년 4월말 현재 기준으로 410억 9250만 7868엔이었다.
그리고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7일 기자회견과 9월 30일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한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대일 배상요구 문제에 참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대일배상 문제에 있어서 한국이 정당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점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관심을 가질 만한 부분은 한국이 연합국 즉 전승국의 일원으로서 대일 배상요구에 참여해야 한다는 당시 한국 정부의 입장이다. 이는 한국이 식민지 배상 협상에서 일본보다 우월적 지위를 가지겠다는 의지의 천명이었다.
이승만의 선택
당시의 이승만이 국내 친일파들을 편들고 친일청산을 방해한 것(국내문제)과, 그가 일본에 대해 식민지 배상을 요구한 사실(국제문제)은 상호 별개의 문제라 할 수 있다. 권력 유지 차원에서 친일파들을 비호한 것과 별개로, 이승만은 식민지 배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 노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이 민족적 대의명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승만 개인의 입장에서는 대일 강경노선을 취하는 것이 권력 유지에도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경한 대일 노선을 취함으로써 자신과 친일파의 유착을 은폐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반일 분위기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행동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초창기의 한국 정부는 친일문제와 관계없이 식민지 배상문제에 있어서만큼은 강경하고 원칙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피해배상을 받기 위한 한국 정부의 노력은 계속해서 구체화되었다. 1949년 1월 24일 제13회 국무회의에서는 초대 법무장관 이인(李仁, 1896~1979)이 대일 배상요구문제 조사를 위한 특별기관의 설치를 제안했다.
이에 따라, 다음 달인 2월 기획처 기획국에 대일배상청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는 대일 배상요구의 원칙으로 '보복의 부과'가 아닌 '희생의 회복'을 설정했다.다시 말해, 일본에 복수 차원의 배상 요구를 하는 게 아니라 원상회복을 요구하는 수준에서 그치겠다는 원칙을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대일배상청구위원회는 1949년 3월 및 9월에 대일배상요구조서 1·2부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한국의 대일 배상문제가 1947년에 비해 1949년에 한 걸음 더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1947년 8월 13일 구성된‘대일 배상요구조건 조사위원회’는 조사 기구 차원이었지만, 1949년 2월에 구성된 대일배상청구위원회는 조사 차원이 아닌 청구 차원의 집행기구였던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순항할 것처럼 보였던 한국의 대일 배상요구는 하나의 암초에 직면한다. 국사편찬위원회 박진희 연구원은 지난 6월에 수선사학회 발행 <사림> 제25호에 기고한 '한국의 대일정책과 제1차~제3차 한일회담'이라는 논문에서, 한국의 대일 배상요구와 관련하여 중요한 변수로 떠오른 것이 미국의 대일정책의 변화라고 밝힌 바 있다.
참고로 이 논문은 식민지 배상문제를 한일관계 차원이 아닌 한·미·일 3국 관계 차원에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1949년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조기 강화 쪽으로 선회하면서, 대일 배상요구 반대를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의 논리는 이런 것이었다.
"징벌적인 대일 배상요구를 실시하면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 그렇게 되면 미국의 일본 점령 비용이 증가한다. 또 그렇게 되면 결과적으로 미국 납세자들의 부담이 늘어난다."
이것은 미국이 대일강화조약 체결과정에서 스스로 배상을 포기하는 논리였고 다른 동맹국들의 배상 요구 포기를 종용하는 논리였다고 박진희 연구원은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의 대일 배상요구에도 제약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보다 우월한 전승국의 입장에서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무대로 ▲식민지 배상을 받아 내겠다는 한국의 정책에 수정이 가해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의 '꿈'은 왜 무산됐나
미국의 대일 전략이 수정되고 한국이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배제됨으로써 대일 배상요구에 대한 한국의 '꿈'은 문자 그대로 꿈이 되고 말았다. 한국은 전승국의 대우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요구는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대부분 기각되었다.
이제 한국은 자국의 정책을 수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월한 전승국의 입장에서 일본과 협상하겠다는 꿈은 이미 물 건너가고 말았다. 이제는 일본과 대등한 지위에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더 이상 일본을 패전국이나 죄인으로 다룰 수도 없게 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를 무대로 일본과 협상하겠다는 꿈도 이미 물 건너가고 말았다. 다자간 무대가 아닌 한·일 간의 양자간 무대에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미국에 의해서 한국의 기가 꺾인 상태에서 차선책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다. 한일회담은 기본적으로 한·일 양국이 전승국-패전국 관계를 떠나서 상호 대등하다는 전제 위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럼, 한일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어떤 공방을 주고 받았을까? 이 과정에서 미국은 또 어떤 역할을 했을까?
덧붙이는 글 | 이후 한일회담의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제2편에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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