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허리는 온통 메밀밭"

봉평, 메밀꽃 그리고 가을

등록 2006.09.30 19:03수정 2006.09.30 19:43
0
원고료로 응원
봉평을 찾은 건 지지난 토요일.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봉평의 가을 들녘이 그립기도 하고 강원도에 갈 때 가끔 들리던 진미식당의 막국수와 메밀막걸리가 눈에 삼삼해서였다. 특히 메밀막걸리는 맛이 좋아 이곳에 들를 때면 한잔씩 하고 꼭 몇 통 사가지고 와서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마시곤 한다.

메밀꽃은 9월이 절정이지만 파종의 시기가 달라 좀더 오래 볼 수 있는 밭도 있다. 생가 주변 밭은 10월초까지는 볼 수 있다. 오붓한 여행을 즐기려면 지금이 더 좋을 수도 있다. 꽃은 졌더라도 붉은 줄기를 드러내 그런 대로 깊어 가는 가을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한적하기만 하던 봉평 가는 길은 큰 길이 되어 예전의 정취는 찾기 어렵게 되었다. 율곡 이이가 잉태되었다는 판관대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봉산서재는 큰길의 위세에 눌려 한켠에 물러앉게 되었다.

처음 봉산서재와 판관대를 찾았을 때는 마을 사람들조차 '뭐 이런 곳을 다 찾나' 의아해 하는 눈초리를 보낼 정도로 한적하여 복잡한 서울을 벗어나 있다는 작은 기쁨을 느릴 수 있었다.

이 근방에 있는 팔석정은 강원도 여기저기에 족적을 남긴 양사언이 이곳 경치가 좋아 8일간 머물렀다는 곳으로 마을 앞을 흐르는 개울인데도 강원도가 아니라면 큰산에나 있을 법한 품위있는 기암괴석이 어울려 신비한 풍경을 만들어 내는 곳이다. 이곳도 큰길이 나는 바람에 그냥 지나쳐가기 십상이다.

판관대 앞에는 누렇게 익은 벼와 하얗게 핀 메밀꽃이 예쁜 가을 풍경을 그려 내고 있다. 예전 같으면 벼만 있었을 자리이지만 메밀이 보기 좋게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메밀이 벼를 대신할 만큼 봉평은 메밀이 지천으로 있다
이제 메밀이 벼를 대신할 만큼 봉평은 메밀이 지천으로 있다김정봉
'수익성이 낮아 메밀을 별로 심지 않기 때문에 봉평에서 흐드러지게 메밀꽃을 보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라고 한 몇 년 지난 책 글귀는 틀린 얘기가 되어 버렸다.


작년 축제 기간에만 50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녀갔을 정도로 이젠 외지인의 발길이 분주해졌고 메밀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 음식점도 많이 생겨나면서 메밀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수익성이 낮아 메밀 농사를 짓지 않는 것은 옛말이 되었다.

메밀묵과 막국수는 말할 필요없이 메밀로 메밀 전병, 메밀 막걸리, 메밀 꿀, 메밀차까지 만들어 먹고 건강음식으로 대접받으면서 메밀의 수요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봉평면에 접어들어 남안교를 건너면 양 옆으로 온통 메밀밭이다. 메밀 전문 음식점이 요지를 점령하고 있을 뿐, '달밤에 나귀를 몰고 다니고 길이 좁아 외줄로 늘어서 가야하는' 메밀밭 오솔길은 없다. 메밀밭에 들어가려면 입장료를 내야 할 만큼 인색하게 변한 것도 다른 풍경이다.

남안교 근처 메밀밭은 포토존 역할만 한다
남안교 근처 메밀밭은 포토존 역할만 한다김정봉
'잡스러운 동상과 기념비를 세울 예산으로 이효석의 생가를 복원하고 거기에 눅눅히 앉아 그를 기릴 작은 정자와 메밀이나 심어 놓았다면...'이라고 아쉬워한 유홍준 교수도 메밀밭이 지천으로 있는 지금보다 그때를 더 그리워할지도 모를 일이다.

'잡스러운 동상과 기념비'는 이제 상업적으로 꾸며진 메밀밭의 풍경과 썩 잘 어울리고 가물 때나 장마 때나 쉼 없이 돌아가며 부드러운 곡식 빻는 소리 대신 날카롭게 찧어 대는 쉰 소리를 내는 물레방아는 사람을 반기지 않는 메밀밭 한 가운데에 있는 원두막과 '잘도' 어울린다.

쉼 없이 쪼아 대는 물레방아는 쉰 소리가 난다
쉼 없이 쪼아 대는 물레방아는 쉰 소리가 난다김정봉
이효석의 문학적 업적을 기릴 메밀밭은 정도를 벗어나 상업적 메밀밭으로 변해 오붓한 여행을 즐길 여유를 주지 않는다. 서둘러 빠져 나오고 싶은 광경이다.

그러나 여기서 실망할 필요는 없다. 여기는 강원도 봉평은 봉평인가 보다. 남안교 주변을 조금만 벗어나면 메밀밭을 따라 생가로 이어지는 좁은 길이 있고 외딴 집 서너 채가 산자락을 등에 지고 들어박혀 있어 강원도 산간마을의 가을 풍경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남안교만 벗어나면 봉평은 봉평다운 풍경을 그려 낸다
남안교만 벗어나면 봉평은 봉평다운 풍경을 그려 낸다김정봉
여기쯤 와서야 하얀 메밀꽃과 붉은 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메밀꽃은 산허리까지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라는 구절 때문에 이곳에 메밀을 심어 놓은 것 같지는 않지만 이 밭을 보고 있으면 그 대목이 절로 생각이 난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다김정봉
'대궁(줄기)'이 붉은 것은 장에 다녀오던 어머니를 잡아먹고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 하던 호랑이가 아이들의 꾀에 넘어가 메밀밭에 떨어져 죽은 호랑이의 피 때문이라는 전설이 있다. '붉은 대궁'은 하얀 꽃과 대비되어 유난히 붉게 보인다.

'애잔한 붉은 대궁'
'애잔한 붉은 대궁'김정봉
메밀꽃이 눈에 질릴 쯤 몇 걸음 가다 보면 좁쌀이 내게 인사하듯 고개숙인 채 서있고 그 밑에는 여기서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는 메밀에 아랑곳하지 않고 김장철을 기다리는 연록(軟綠)의 무와 배추가 자라고 있다.

참깨를 수확했는지 빈 밭에는 어린 가을 열무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촌옹(村翁)이 열무가 너무 촘촘히 심어졌는지 듬성듬성 솎아 주고 계신다. "그게 가을 열무지요?"라고 물어도 입가에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이 없다. 메밀꽃을 구경 왔으면 메밀꽃이나 구경하고 가라는 심상(心想)이다.

가을 열무를 솎아 주고 계시는 촌옹
가을 열무를 솎아 주고 계시는 촌옹김정봉
참깨를 베고 나면 밑동만 남게 되는데 그 밑동 사이에 가을 열무를 심는 걸 얼마 전 고향을 갔을 때 처음 알았다. 그래서 촌노(村老)에게 제법 아는 체를 했던 것이다.

고향에서 물이 자작하고 열무치곤 뿌리가 제법 큰 열무김치를 먹곤 했는데 그 때 먹은 김치가 가만 생각해 보니 가을 열무로 담근 열무김치였다. 가을 열무는 물이 많이 나지 않고 뿌리가 쓴맛이 적고 씹을 것이 있을 정도로 제법 크다.

가을 열무와 밭에서 일하는 촌노를 보니 어느새 생각은 어머니의 메밀밭에 이른다. 더도 덜도 아닌 두서너 평 밭에 기르고 있는 소박한 메밀밭이다. 묵을 쑤면 광주리 하나 정도, 아들딸 집에 두서너 모씩 돌아갈 정도의 양이다. 채를 친 묵에 국물을 자작하게 넣어 김과 김치를 얹어 해주시던 묵밥까지 따사로운 가을 햇볕을 맞으며 하염없는 생각에 잠겨 본다.

소박한 어머니 메밀밭
소박한 어머니 메밀밭김정봉
이런 저런 생각과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며 몇 분 걸어가면 이효석 생가터에 이른다. 생가는 예전의 집은 아니고 그 자리에 다시 지은 것이라 가옥의 구조가 바뀌어서 별 볼거리를 제공하지 않지만 생가터와 가산이 뛰놀던 집 뒤편 언덕, 집 뒤의 산세, 오래된 밤나무, 메밀밭을 보면 가산의 숨결이 느껴진다.

가산 이효석 생가터
가산 이효석 생가터김정봉
관광버스에서 내렸는지 한 무리의 인파가 생가 뒤편 메밀밭으로 몰려든다. 입장료도 낼 필요도 없다. 제지하는 사람이 없어도 너도나도 "애잔한 붉은 대궁"이 꺾일세라 서로서로 조심한다.

생가를 찾은 많은 사람들
생가를 찾은 많은 사람들김정봉
메밀꽃을 보러 왔든, 가산을 기리기 위해 왔든 가산의 생가를 찾은 많은 사람들을 보면 비록 가산이 36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다 하더라도 행복한 사람이요, 죽어서도 제일 대접받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성욕 드러내면 "걸레"... 김고은이 보여준 여자들의 현실
  2. 2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연극인 유인촌 장관님,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3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딸 바보' 들어봤어도 '아버지 바보'는 못 들어보셨죠?
  4. 4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울먹인 '소년이 온다' 주인공 어머니 "아들 죽음 헛되지 않았구나"
  5. 5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도이치' 자료 금융위원장 답변에 천준호 "아이고..."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