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과 함께 한 영상유언 작업

서울노인복지센터 영상유언프로그램 자원봉사 체험기

등록 2006.10.04 12:54수정 2006.10.0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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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노인가을축제 '탑골사람들'

노인가을축제 '탑골사람들' ⓒ 모경옥

누구나 노인이 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러므로 삶의 막바지에 이르러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생을 떠나야 할 것인지에 많은 이들이 관심을 둘 법하다. 그러나 젊은이들에게는 다소 미뤄도 될 것 같은 미래의 과제로 여겨지기 쉬울 테고 지금 노인으로 사는 이들에게나 절박한 고민일 것이다.


서울노인복지센터에서 9월 14일부터 노인들의 가을축제 ‘탑골사람들’이 열렸다. “사(生)는 이야기 사(死)는 기쁨”이란 테마로 열린 이번 축제 기간 중 9월 21~22일 이틀간 ‘아름다운 인사’라는 영상유언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나는 여기서 행사 촬영 자원봉사를 했다.

안국역과 인사동 사이를 수없이 오가면서도 노인복지센터에 들어가 자원봉사를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소수자를 위한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센터 안에 들어가면 낯선 풍경과 만남이 즐비하다. 새롭게 알게 되고 배우게 되는 것들이 많다.

a 영상유언프로그램 '아름다운 인사' 접수장

영상유언프로그램 '아름다운 인사' 접수장 ⓒ 모경옥

무료급식을 하는 식당에 들어가 노인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면서 팔순 할아버지 두 분과 대화를 나눴다. 한 분은 지팡이를 짚으면서까지 송파구에서 오셨고 다른 한 분은 더 먼 김포에서 오셨다.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신단다. 그 먼 곳에서 가누기 힘든 몸으로 센터까지 찾아오시는 이유를 상상하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키가 작아도 정정하시던 ‘김포’ 할아버지와 달리, 마르고 키가 크지만 지팡이를 짚어야 할 만큼 기력이 쇠해 보이는 ‘송파구’ 할아버지는 배식을 하지 않고 수저만 들고 계셨다. 왜 식사를 안 하시느냐고 여쭈어보았다. “아침 8시에 밥을 먹어 아직 배가 고프지 않아. 뭘 먹어도 입맛이 없고.” 그때가 낮 12시였다. 소화력이 약해진 탓이겠지만 식욕도 입맛도 없어 그렇다는 말씀에서 아무리 건강하게 나이 들더라도 쇠잔한 육체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노인의 과제임을 매우 현실감 있게 느낄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그런 과제는 간단하지도, 쉽지도 않을 것인데 그들은 누구에게 그런 변화를 털어놓고 위로받고 있을까. 공감하는 이들과 터놓고 나누는 대화란 그것만으로도 마음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샘솟게 하는 중요한 동력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이 바쁜 시절에 잠시 앉아 노인들과 대화 나누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바로 그런 이유로 서울노인복지센터가 매일 붐비는 것이리라. 이곳엔 같은 경험과 고민을 나눌 만한 또래가 있고, 노인과 삶과 대화를 나누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친절한 복지사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으니까. 게다가 식사가 무료일 뿐만 아니라 배우고 익히고 즐기는 문화프로그램들이 무료로 제공되는 곳이니까.

하루 2000명이 넘는 이들에게 무료급식을 하는데도 찾아오는 노인들을 모두 수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노인을 위한 이런 공간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부족한지 증명한다.


a 할머니의 영상유언을 준비하고 있다

할머니의 영상유언을 준비하고 있다 ⓒ 모경옥

영상유언 ‘아름다운 인사’는 올해 첫 선을 보이는 특별기획 프로그램이다. 삶을 정리하는 과제가 절박한 그들에게 프로그램 제목만으로도 괜찮은 기획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 작업에 들어가니 정말 앞으로도 꼭 필요한 프로그램이란 생각이 굳어졌다.

다만, 길고 알찬 사전작업을 통해 평생을 살면서 마음에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는 접근기회를 더 잘 살리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짧은 시간이나마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노인들은 마음 바닥에 숨겨 놓은 이야기며 반드시 남기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내는 일에 매우 진지했고, 경우에 따라 어떤 이들은 재산 분배 등 문제를 확고히 해 두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프로그램 기간 동안 영상유언에 참여한 복지사들은 노인들과 함께 종종 울었다. 사전에 안면이 있고 사정을 잘 아는 복지사들은 적절한 질문으로 유언이 내실 있고 의미 있도록 애썼는데 그 과정에 나오는 노인들의 유언에 마음 저린 이야기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불민한 탓에, 시신기증 프로그램은 사회를 위한 선한 동기가 전부인양 막연히 생각하고 있다가 가슴이 쿵 내려앉는 할머니의 유언을 듣기도 했다. “내가 너희들 힘들게 돈 들지 않도록 시신기증에 서명했으니 너희들은 내 장례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노인의 경제적인 무기력함과 가난한 가족의 어려운 살림살이가 줄 상처와 아픔에 대해 부끄럽게도 그때서야 생각이 미치게 된 것이다. 그러한 동기로 시신기증을 하는 노인들이 많을 법했다.

a 영상유언 촬영장

영상유언 촬영장 ⓒ 모경옥

유언의 초점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는데 어떤 분은 어릴 적부터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차분하게 남기고 싶어 하기도 하셨고 어떤 분은 노래하는 모습을 남기기도 하셨고 어떤 분은 “사랑하는 여보!”라고 운을 떼며 배우자들에게 뜨거운 애정을 표현하고 싶어 하셨다. 그런가하면 자식들에게 제발 나를 보러 오라고 말하는 독거노인의 가슴 아픈 고백도 있었다.

유언이었지만 개인이 홀로 수행하는 작업과 달리 건강한 삶과 죽음으로 접근할 수 있는 노인복지센터의 프로그램이란 점에서 앞으로도 이와 유사한 작업이 계속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단지 센터만이 아니라 뜻있는 이들이라면 노인들과 함께 해야 할 일들이 많아 보인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인 노인이거나 이미 노인이므로 그들과 함께 살기를 고민하고 실천하는 일이란 남의 일이 아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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