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조선이 중국 왕조보다 수명이 길었던 이유

한·중 왕조의 수명 비교 ②

등록 2006.10.05 16:35수정 2006.10.05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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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천여 간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관찰할 때, 중국에서 통일 기운이 조성되면 한국에서도 유사한 기운(통일 혹은 압축)이 조성되었고, 중국에서 분열 기운이 생기면 한국에서도 어김없이 분열 기운이 생겼다.

그리고 중원의 통일왕조가 명멸(明滅)하면 한국측 왕조들도 그로부터 영향을 받곤 하였다. 당나라가 멸망(907년)하면서 발해(926년)와 신라(935년)가 비슷한 시기에 멸망한 것도 그 한 예가 된다. 또 송나라(북송)가 5대 10국의 분열을 통일하던 시기에 고려가 후삼국의 분열을 통일한 것도 또 한 예가 된다. 이처럼 중원과 한반도는 긴밀한 상호 연관성을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호 연관성이 12세기부터 현저히 약화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에서는 북송-요나라, 남송-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통일왕조 혹은 대규모 왕조가 명멸했지만, 한국측에서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1번밖에 바뀌지 않았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2가지의 이유가 있다. 한 가지는 한국측 내부의 사정이고 또 한 가지는 중국측 내부의 사정이다.

먼저, 중국측 내부의 사정이란 것은 송나라 이후로 중국에서 분열 기운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5호 16국 시대로부터 송나라 건국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분열과 통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로는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20세기 초반에 군벌 정권의 분열이 있기는 했지만, 이 시기의 분열은 과거의 분열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중화민국 건국(1912년) 이후의 군벌정권들은 대체적으로 중화민국이라는 정부의 정통성을 차지하기 위해 상호 대결하였다. 그리고 이 정권들은 기본적으로 통일 중국을 지향하고 있었다. 과거 분열시기의 왕조들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경향을 보여 준 것이다.

이러한 중국측 내부의 사정에 관하여는 이후 다른 시리즈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이번 글에서는 한국측 내부의 사정을 집중적으로 검토하기로 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중원에서 분열 혹은 통일 기운이 조성되면 한반도에서도 동일한 혹은 유사한 기운이 조성되었고, 중원의 통일왕조가 명멸하면 한국측 왕조도 유사한 운명에 처하곤 했다. 그런데 고려시대부터 한·중 간의 정치적 상호 연관성에 뚜렷한 변화가 생겼다. 상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 초기에 동아시아는 고려-북송-요나라의 3자 정립 구도를 보였다. 금나라가 요나라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북송도 남송으로 교체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러한 변화가 한국 왕조의 운명에 영향을 미쳤겠지만, 고려는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그대로 유지했다. 이렇게 해서 동아시아는 고려-남송-금나라 시대로 접어들었다.


다음 시기에 칭기즈칸의 몽골이 출현하여 남송과 금나라의 자리를 차지했다. 이 시기에도 고려는 그대로 왕조를 유지하였고, 동아시아는 고려-원나라 시대로 이행하였다.

그런데 다음 시기인 14세기에는 중원과 한반도가 동일한 운명에 처했다. 주원장(朱元璋, 1328~1398) 군대가 중원에서 몽골을 몰아낸 이후 중원에서는 명나라가 건국(1368년)되었고, 얼마 안 있어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세워졌다.

그러다가 16세기에 이르러 중원과 한반도는 다시 엇박자를 보였다. 임진왜란(1592~1599년)의 여파로 중원과 일본에서는 권력교체가 동시에 일어났다. 중원에서는 명나라가 청나라로 교체되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 시대가 열렸다. 이때 동아시아 전체의 권력교체 열풍 속에서도 조선만큼은 그대로 왕조를 유지했다.

서세동점으로 동아시아가 일대 위기에 처한 19세기말 이후 한반도와 중원은 다시 동일한 운명에 처했다. 서양세력(일본 포함)의 계속되는 압박 속에 대한제국(1910년)과 청나라(1912년)가 2년 간격으로 나란히 멸망한 것이다.

이후 중원에서는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지만 일본의 중국 침략정책으로 인해 중국의 민족적 자주성은 심히 훼손되었다. 한국은 아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1948년과 1949년에 한반도와 중원에서는 새로운 독립국가들이 생겨났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따르면, 12세기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는 총 6차례의 대규모 정세 변화가 있었다. 그중 3차례의 경우에는 한반도와 중원이 동일한 운명에 처했지만, 나머지 3차례의 경우에는 두 지역이 서로 엇박자를 보였다. 12세기 이전까지 한반도와 중원이 매번 동일한 혹은 유사한 운명에 처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12세기 이후로는 두 지역의 상호 연관성이 현저히 약화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그 이유는 무엇일까? 양 지역이 서로 다른 운명에 처했던 경우와 동일한 운명에 처했던 경우로 나누어 그 이유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한반도와 중원이 서로 다른 운명에 처했던 12·13·16세기의 경우를 살펴보기로 한다. 12세기는 고려-북송-요나라 시대에서 고려-남송-금나라 시대로 바뀐 시기다. 그리고 13세기는 고려-남송-금나라 시대에서 고려-원나라 시대로 바뀐 시기다. 또 16세기는 임진왜란 이후의 동아시아 권력교체기였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국제적 지각변동이 생기면 기존 질서를 전제로 한 정치권력이 약화되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는 정치권력이 내부와 외부로부터 도전에 직면한다. 내부로부터의 도전은 다시 2가지로 세분된다. 지배층 내 경쟁세력으로부터의 도전과 민중으로부터의 도전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12·13·16세기에 고려와 조선은 국제적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왕조를 유지했다. 이 시기에 고려와 조선이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최대 요인은 바로 ‘외교적 수완’에 있었다.

12세기에 여진족의 금나라가 떠오르자, 그 여진족이 이전에 고려에 사대(事大)하던 종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치욕을 무릅쓰고 금나라에 사대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사대를 했다 하여 정치적 자주성을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동아시아의 사대는 강대국을 상국(上國)으로 인정하면서 그 상국의 패권을 인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고려는 자주성을 유지하는 전제 하에 사대의 대상을 변경함으로써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13세기에 몽골이 떠오르자, 처음에 항쟁하던 고려는 결국 금나라에 대해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몽골(원나라)에 대해서도 사대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6세기에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들어서자, 이번에도 조선은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왕조를 유지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원의 통일왕조보다도 고려·조선의 수명이 훨씬 길었던 것이다. 고려가 475년간 존속하는 동안, 북송-요나라는 각각 167년 및 209년간, 남송-금나라는 각각 152년 및 119년간, 원나라(몽골제국 시기 제외)는 110년간 존속했다. 그리고 조선이 518년간 존속하는 동안, 중원에서는 명나라가 276년간 존속하다가 그 뒤를 이은 청나라가 295년간 존속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권력교체 시기에 고려와 조선은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왕조의 수명을 연장하곤 하였던 것이다. 물론 왕조의 수명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왕실 자체적으로는 좋은 일이겠지만, 정치공동체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왕조교체로 생길 수 있는 사회변화의 이익을 향유하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방법으로 왕조를 유지하는 것은 최선의 방법은 아니다. 사대의 대상을 바꾸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수모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려와 조선은 그러한 방법으로 국제적 지각변동에도 불구하고 왕조를 지킬 수 있었다.

한국측이 12·13·16세기에 사대의 대상을 변경함으로써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면, 14세기와 20세기 초기 및 중기에 한반도와 중원이 동일한 운명에 처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14세기와 20세기 초기에 각각 고려와 조선이 왕조를 지키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왜 이 시기에는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그 점에 관해서는 3편에서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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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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