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들의 명복을 빕니다

먼저 가신 분들은 지금도 나를 사랑합니다

등록 2006.10.07 17:15수정 2006.10.0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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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제대 앞에 차례상이 차려졌습니다

제대 앞에 차례상이 차려졌습니다 ⓒ 김관숙

추석 합동 위령미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나는 분향 시간이 기다려졌습니다. 돌아가신 어르신들을 나름대로 기억하며 명복을 비는 시간이라서가 아니라 어쩐지 푸르게 피어오르는 분향이 돌아가신 분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유일한 무엇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해마다 추석미사 때면 그랬듯이 성당 안을 꽉 메운 사람들이 차례대로 한 사람씩 제대 앞에 마련된 차례상 앞에 나가서 분향을 합니다. 그 모습들이 경건하면서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빨간 꽃핀을 꽂은 두어 살 쯤 되는 예쁜 여자아이를 왼팔로 안고 분향을 하는 남자도 있습니다.

분향 시간이 길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기도하는 자세를 하나도 흩트리지를 않고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렸다가 마음을 모아 정성껏 분향을 합니다.

내 차례가 와서 분향을 올릴 때 나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떨려져 왔습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냥 가슴이 떨리기만 했습니다.

분향을 마치고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서야 나는 돌아가신 친정과 시댁, 양가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르신들이 어린아이처럼 그리워졌습니다. 이상합니다. 어르신들 생전에 내가 어수룩했거나 잘못 했던 일들은 하나도 생각이 나지를 않고 그냥 막 떼를 부리듯이 그리워지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생전에 내게 사랑을 듬뿍 주시던 분들입니다. 저 세상에서 명복을 누리시는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미사 중에 문득 문득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성한 이 가을에 추석미사를 봉헌하게 하는 마음을 일게 하고 분향을 통해 명복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주고, 또 내 작은 기도가 당신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도 일깨워 주는 것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미사가 끝나서, 뜰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남편과 같이 이웃들과 어울려 음복을 나누면서 덕담들을 주고받는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지팡이를 짚으신 어르신이 다가 왔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구역미사가 있던 날 나눔의 테이블에서 만났던 어르신입니다. 한번 한 말을 까맣게 잊어먹고 또 하고는 해서 자식들이 아무 말 말고 그냥 계시라고 했다고 무척이나 서러워하던 그 어르신입니다.(사는이야기 '혹시 내가 한 말 또 했니?' 에 나온 어르신입니다.)

남편과 내가 반가워하면서 인사를 하자 어르신은 함박웃음부터 물더니 종이컵을 집어 내밉니다. 남편이 얼른 미사주를 따라 드립니다. 나는 어르신이 떡을 좋아하던 것을 생각하고 송편 접시를 어르신 앞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어르신은 단숨에 종이컵을 비웠습니다.


"내가 요즘 사는 것 같다구. 자네가 가르쳐 준 대로 했지. 내가 한 말 또 하면 일깨워 달라구 아들놈에게 당부했단 말야."
"그러셨군요."

"덕분에 면박 당하는 일은 없어졌다구. 그만만 해두 살맛이 나지 뭐야. 자네 덕분야. 자, 한잔 받아!"
"제 덕분이 아니라 아드님이 효자이신 거죠. 무릎 아픈 건 좀 어떠세요?"

"요즘 살맛이 나서 그런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구 그냥 그러네. 한잔 받으라니까?"

어르신은 내가 두 손으로 내민 종이컵에 미사주를 가득 따랐습니다. 그런 뒤 빨리 마시기를 재촉하는 듯이 검버섯이 듬성듬성 있는 손으로 배 한 조각을 집어 주시기까지 합니다. 너무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하자 대충 사연을 짐작한 남편이 잔득 웃음을 물고 말했습니다.

"저는 안 주세요?"
"엉? 그렇지, 주구 말구."

어르신은 즐거워하는 눈으로 남편에게 미사주를 따라 주고 나서 바로 돌아섰습니다. 얼른 집에 가서 며느리가 끓이는 토란국 간을 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어르신 뒷모습을 보며 남편이 말했습니다.

"좋아 보이시는데."
"나도 그 말 하려던 참인데…."

내 모습도 누군가가 보면 좋아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사 중에 명복을 비는 분향도 하고 먼저 가신 조상님들이 복을 담아 물려주시는 떡도 먹고 미사주도 마셨고, 또 추석빔을 입지도 않았는데 늘그막 나이에 주책없이 어린아이 같이 자꾸 마음이 들떠지면서 즐거워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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