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기 아버지가 남긴 세 가지 교훈

아버지는 눈물 속에 추억을 만드는 마술사

등록 2006.10.08 12:33수정 2006.10.0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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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때가 되면 항상 잊었던 아버지를 떠올린다. 언제나 아버지의 작은 유품들을 보면서 아버지를 추억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것도 어렵게 되었다. 아버지의 유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손에 있겠지만 아쉽기도 하다.


유난히 자식 사랑이 지극했던 아버지. 동네에서도 유명했던 아버지의 '자식사랑병'은 화제거리가 될 정도였다. 삶이 자식 중심일 정도로 아버지는 가시고시처럼 자식을 사랑했다. 아들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주려고 하셨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식을 지키셨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직도 나의 인생 가치관을 만들어 가고 있다.

아버지는 술만 드시면 나에게 항상 세 가지 교훈을 말씀하시곤 했다.

"정직해라. 입장 바꿔 생각해라. 가난한 사람을 돌봐줘라."

아버지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 하며 늘 똑같은 가르침을 강조하곤 하셨다. 특히 인생이란 입장이 바뀐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셨다. 추억에 남은 아버지의 이야기 몇 가지를 나누고 싶다.

① 정직해라


a 추억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든다

추억은 따뜻한 이야기를 만든다 ⓒ 이성재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문구 회사에 취직했다. 직원들이 모두 합숙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당시에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장 부인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가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 보라고 했다. 서로 눈치만 볼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랬더니 주위 동료들은 키득거리며 아버지를 비웃었다. 사장 부인이 아버지를 불러냈다. 동료들은 그런 모습에 더더욱 손가락질까지 하며 아버지의 행동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런데 사장 부인이 이가 있는 사람을 찾은 것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겨울 내복 2벌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였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버지는 정직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아 승진했고, 몇 년 후에는 문구공장을 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아버지에게 일본유학을 주선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할아버지의 반대로 일본 유학은 떠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정직한 작은 행동은 해방 이후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사업을 하실 때도 이어졌다.

아버지가 공무원으로 나라의 녹을 먹을 때 공출되는 쌀을 개인이 착복할 수 있는 구멍이 많았다. 조합장인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쌀 한 톨도 집으로 가져가지 않으셨다. 몇 년 후 비리 감사에 아버지만 걸리지 않았고 그 결과로 표창을 받으신 일을 늘 말씀하셨다.

② 입장 바꿔 생각하라

6.25전쟁 때 동네 유지와 지식인들이 모두 공산군에게 잡혀 중학교 강당에 갇히게 되었다. 아버지 같은 사람들을 찾아낸 것은 어느 부잣집에서 머슴으로 일하다 공산군 청년당원이 된 사람들이었다.

공산군이 후퇴하면서 모두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아버지를 구해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머슴으로 일하던 사람인데, 아버지가 그 집에 갔을 때 그 머슴의 동생이 소아마비로 아픈 것을 보고 한의사 친구에게 말해 한약을 지어다준 작은 친절이 아버지의 생명을 살렸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 아끼던 축구공과 야구 글러브가 없어졌을 때도 다른 아이들이 내 것을 가지고 있어도 훔쳐간 것을 본 것이 아니면 그냥 잊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 아버지가 약해 보였고 화가 났다. 그래서 내가 다시 그 집에 가서 몰래 가져오려고 했던 기억도 있다. 결국은 개에 물려 피를 흘려야 했다.

③ 어려운 사람을 돌봐 줘라

아버지는 자신의 것을 잘 나누는 분이셨다. 입고 있던 양복도 필요하다면 그 자리에서 벗어주셨다. 지갑에 돈을 넣어 가지고 다니는 것은 거지 아이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셨다.

그리고 고모부의 사업 실패로 큰고모, 작은고모 식구들과 먼 친척 아이들까지 함께 살았다. 다른 식구들이 우리 집의 주인 같았다. 1-2년도 아니고 7-8년을 그렇게 살았다. 어떤 면에서는 어머니가 고생하셨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은혜를 잊어버린 사람들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심어 놓은 씨앗들은 열매로 나타날 것으로 믿는다.

또한 내 물건도 팔촌 주영이와 동생 상영이에게 후하게 주셨다. 내가 울고불고 야단을 떨어졌만 결국 그 물건은 내 손에서 떠나야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내 머리맡에는 새 장난감과 새 옷, 그리고 과자가 가득했다. 아버지가 새로 사 오신 것이다. 나는 아까워 조심스럽게 사용하지만 결국 며칠 후에는 다른 아이들 손에 장난감이 들어가곤 했다.

그리고 진패라는 뇌성마비 청년이 있었는데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려고 우리 집에 왔었다. 애국가가 나오기 전부터 우리 집에 와서 애국가가 나와야 그제야 엉덩이를 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떤 날은 우리 식구들은 잠을 자고 진패는 텔레비전을 보기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는 귀찮아하지 않으셨다. 묵묵히 이해해 주셨다. 나는 그런 진패가 싫어서 다투기도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나를 혼내셨다.

매 맞은 나는 골방 들어가 한없이 울었고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들이라고 했던 엿장수 아저씨 말이 떠올라 더 서럽게 울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내가 집을 나갔다. 집에서 난리가 났고 나는 열어 놓은 대문 뒤에 숨어 밤늦게까지 있었다.

동네를 다니면서 울고 내 이름을 부르고 다니는 아버지 어머니의 목소리가 쉬고 기진맥진했을 때 나는 나타났다. 그러면 아버지는 울면서 회초리로 때리셨다. 그러다가 중간에 나를 부둥켜안고 우시곤 했다. 나는 아버지 품에서 잠이 들었다. 그런 날이면 아침에는 내가 좋아하는 쇠고기무국과 아버지가 만든 주먹밥이 상에 올라오곤 했다.

추석 날 아침, 쇠고기무국을 보면서 아버지의 사랑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이 땅에 없지만 교훈과 가치관은 살아 아직도 내 속에서 온기를 낸다.

"아버지! 당신은 나의 숨결 속에 살아 있고, 눈물 속에 추억을 만드는 마술사입니다."

덧붙이는 글 |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덧붙이는 글 나관호 기자는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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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제이 발행인, 칼럼니스트다. 치매어머니 모신 경험으로 치매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크리스천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이다. 기윤실 선정 '한국 200대 강사'로 '생각과 말의 힘'에 대해 가르치는 '자기계발 동기부여' 강사, 역사신학 및 대중문화 연구교수이며 심리치료 상담으로 사람들을 돕고 있는 교수목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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