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47회

등록 2006.10.11 08:31수정 2006.10.11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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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곡의 예상대로 청룡각 내부인들의 조사에서는 밝혀낸 것이 전혀 없었다. 죽은 시각이 예상보다 조금 더 이른 시각일 것이란 사실 뿐이었다. 하지만 풍철한은 능효봉을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름이 능효봉이라 했나? 자네와 내가 몇 번 보았지?"

능효봉 역시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눈을 마주친 것이라면 이번이 세 번째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능효봉을 보며 풍철한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느꼈다. 예상보다 훨씬 까다롭고 심계가 깊은 자였다. 세 번이라 함은 지금 한 번, 배 위에서 한 번, 그리고 설중행을 도와주던 그때에 언뜻 스쳤을 뿐이었다. 하지만 능효봉이 설중행을 도와둘 때 이미 지켜보던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그러면서도 이리 태연하게 말을 받아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터였다.

"죽이고 싶었겠지?"


풍철한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서교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사지를 찢어 죽이고 싶을 정도였소. 아주 고통스럽게 말이오."


"너무 쉽게 죽였군. 다른 목적이나 의도가 숨어 있거나 그렇게 죽일 시간이 없었던 것이겠지?"

능효봉은 기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은 언뜻 보기에 풍철한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협상을 앞두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의도를 가진 의미를 둔 것 같기도 했다.

"당신들도 이곳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들어온 것이 맞소? 아… 물론 이곳 보주가 청해 억지로 들어왔다고 변명하겠지만 말이오."

풍철한은 잠시 멈칫하다가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대단한 놈이다. 말솜씨도 교묘해서 자신의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해주는 것과 동시에 더는 묻지 못하도록 하게 하고 있었다.

"아직 시간은 많아."

"나 역시 이제는 할 일이 없는 사람이오."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호기심 어린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아주 흥미로운 놈을 발견했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격식은 차려야 하니까…. 자네는 서당두의 사인(死因)을 알고 있나?"

"대충 들은 바 있소."

"그럼 자네의 겨드랑이를 보여 달라고 해도 자네는 순순히 응하겠군."

"뭐 어려울 것 있겠소? 괜히 냄새나 나지."

능효봉은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벗었다. 한 겹 속옷이 있기는 했지만 군살 하나 없는 탄탄한 몸이 강인해 보였다. 그리고는 속옷을 걷어올려 오른쪽 겨드랑이를 보여주었다. 겨드랑이 털이 있기는 했지만 반점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왼쪽도 보여주어야 하오?"

"되었네. 그러면 자네는 독룡조를 십성까지 익힌 게군."

풍철한의 말에 능효봉이 피식 웃었다. 말하는 자나 그것을 듣고 실소를 터트린 자를 보는 함곡과 경후는 두 사람이 농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풍철한은 아니었다. 능효봉은 끝을 알 수 없는 자였다. 저런 자가 왜 동창의 비밀조직에 몸담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언뜻 보기에도 능효봉은 자신의 하수가 절대 아니었다.

풍철한이 다시 물었다.

"자네는 그 방을 나올 때 문으로 나온 것인가? 아니면 창문으로 나온 것인가?"

능효봉은 감탄했다. 풍철한은 무언가 감을 잡고 있었다. 잘못 대답한다면 꼬리를 잡힐 수 있었다.

"창문으로 나왔소."

능효봉의 대답에 경후는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 아까 자신이 들어갈 때 창문이 열려있었느냐고 물었을 때 분명 능효봉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고는 열려있었던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헌데 그는 지금 창문으로 나왔다고 대답하고 있다.

"자네가 서당두의 방에 간 것은 서당두가 불렀기 때문이었나?"

"그렇소."

"방문으로 들어왔겠군."

능효봉은 다시 웃었다.

"억지로 꿰맞추어 나를 흉수로 몰려고 하지 마시오. 나 역시 그런 일에 꼭두각시 노릇을 한 놈이지만 자신이 당하는 것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오."

"자네는 아직 대답하지 않았어."

"창문으로 들어왔소."

"열려 있던가?"

"물론이요."

"자네는 매우 현명한 사람이군."

풍철한은 고개를 끄떡였다. 이미 자신의 머리 위에서 노는 놈이다. 그리고 매우 흥미로운 자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함곡을 바라보았다.

"자네가 일단 정리를 하지."

이제는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는 함곡에게 일을 넘길 필요가 있었다.


31

"아직까지 대형에 대한 사랑이, 아니 미련이라도 남아 있소?"

함곡과 풍철한이 경후의 부름에 나가자 서교민의 방에 남아 있던 철금강 반효가 함곡의 여동생 선화에게 물은 말이었다. 그 물음은 사실 철금강 반효가 묻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오랜 궁리 끝에 던진 것이었다.

그 하지 말아야 할 질문은 어색한 침묵 속에서 애꿎게 방안에 있는 다른 흔적이라도 찾으려 서로 시선을 피하고 있던 두 사람의 보이지 않는 금을 깨버리고,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던 선화를 미세하나마 흠칫하게 하였다. 마치 금기(禁忌)처럼 십여 년간 아무도 자신에게 묻지 않았던 말이었다. 그녀의 오라버니조차 그 어떠한 사건이 있은 이후로 물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죽고 싶은가요?"

그녀의 얼굴에는 얼음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냉기가 감돌았다. 그녀의 전신에 하얀 백기가 감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정말로 죽이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효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미 반효는 그녀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었다. 함곡이 여동생을 대동한 이유는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그녀의 무공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변명하듯 입을 여는 반효를 향해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가 말문을 닫게 했다.

"한마디만 더 한다면 당신은 내 소수(素手)가 당신의 심장을 들고 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보게 될 거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의 유독 흰 손은 이미 가슴 있는 데로 올려져 있었다. 그녀가 익힌 무공은 과거 백인장(白刃掌) 또는 소수인장(素手刃掌)으로 불리던 무공이었다. 하늘에 하얀 손 그림자가 덮이면 온몸이 갈가리 찢겨 나간다는 무공이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너무나 잔혹하고 무서운 것이어서 무림에서는 사공(邪功)으로 치부되고 있었다.

소수가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쉽게 당할 것이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대형과 관련이 있는 여자였다. 같이 드잡이질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더 말을 하지 않고 나직이 탄식을 불어냈다.

"……!"

그녀 역시 반효가 더는 말을 하지 않자 다시 시선을 창문 밖으로 던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방안은 다시 정적을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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