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46회

등록 2006.10.10 08:33수정 2006.10.10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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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솔직하게 말한 것뿐이야. 그런 명령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고, 그런 명령이 의논된 적도 없어. 아주 완벽한 종지가 정확하게 서당두에게 전해진 것뿐이지."

"그렇다면 첩형께서도 모르는 일이라고 해 둡시다. 신태감은 알고 있었소?"


경후의 얼굴에 불쾌한 빛이 서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도 미세한 살기가 흘렀다.

"자네는 매우 무례하군. 아직까지 본관은 자네의 상관이야."

"상관...? 좋아하지 마쇼. 이미 끝났소. 당신도 이 일에 관여했다면 반드시 죽여 버릴 거요. 아쉬운 것은 서교민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지만 죽이지 못했소. 하지만 신태감이라도 이 일에 관여했다면 신태감은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오."

능효봉의 얼굴에는 이미 살기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당장 손을 쓸 기세였다. 이미 이성을 가지고 조직의 일원이라면 지켜야할 위계의 선을 넘어 버렸다.

"열여덟 명 중 열네 명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했소. 두 명이 도망쳐 살아남았고, 두 명이 그들에게 붙잡혔소. 아… 참…."


능효봉이 경후를 놀리듯 말을 이었다.

"동창에서는 대답을 잘 해야 할 거요. 그들에게 생포된 두 명은 매우 입이 무거운 형제들이지만 장담할 수 없으니 말이오. 물론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동창이 철기문 따위에 연연하지도 않겠지만 말이오."


큰일이었다. 두 명이 생포되었다면 그들의 입이 아무리 무겁다지만 입을 열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없었다. 심각한 사태가 올 수 있었다. 경후로서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었다.

"그 가짜 종지에 의한 일은 완벽하게 실행된 것인가?"

"가짜라면 왜 그 결과에 대해 물으시오? 어차피 실행되었든 아니든 상관없을 텐데…."

"그 상대가 죽은 것과 산 것은 큰 차이지."

그렇다. 그 결과에 따라 변명도 달라지게 될 것이고, 빠져나갈 구멍도 큰 차이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능효봉의 말은 경후에게 절망적으로 들렸다.

"일은 성공했소. 크큿…."

능효봉은 잠시 자조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우리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일을 대신해주어 성공한 것이지만 말이오. 우리는 그저 혼란을 일으키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소. 혈간의 곁에 있던 세 명의 타수는 바로 철기문의 세 장로(長老)였소. 혈간을 보기도 전에 그 세 인물에게 우리는 속절없이 죽어가야 했던 것이오."

충분히 가능한 말이었다. 그들 열여덟 명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혈간과 철기문의 세 장로가 있었다면 비영조는 혈간을 보기도 전에 죽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혈간이 죽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철기문의 세 장로는 어찌되었나?"

"한 명은 내 손으로 죽였소. 또 한명은 설중행의 손에 죽었소. 나머지 한 명은 혈간을 죽인 자들에 의해 죽었소."

"혈간을 죽인 자들?"

"두 명이었소.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누군지 확인도 하기 전에 이미 절반 이상이 죽었고, 나머지 역시 도망쳐야 했소. 그리고 그 뒤에는 철기문의 구천각에 의해 모두 사냥을 당하며 죽어야 했소."

누굴까? 혈간을 죽일 능력을 가진 자는 이 중원에 손을 꼽을 수 있을 정도. 있다면 친구들인 중원오우 정도다. 이 중원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후는 섬뜩한 느낌에 침음성을 터트렸다.

"자네 말이 사실이라면 그 가짜 종지를 가지고 장난 친 자들도 그들이겠군."

"변명이오?"

"사실을 말한 것뿐이야."

"그 말이 사실이길 빌겠소."

능효봉은 아직까지 경후나 동창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말에는 살기 어린 가시가 돋쳐 있었다. 같이 지내던 동료요, 수하가 속절없이 죽어간 것을 생각하면 그의 태도가 과장된 것은 아니었다.

"자네가 서당두의 방에 들어갔을 때 창문이 열려있던가, 아니면 닫혀 있던가?"

그 말에 능효봉은 검미를 찌푸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 했다.

"열려있었던 것 같소. 아니 열려 있었소. 이상한 냄새가 방안에서 났는데 그래서 아마 창문을 보았는지 모르오."

"이상한 냄새라니…?"

"뭐 그런 것 있잖소? 남녀 교접을 하였거나 하면 퀴퀴하면서도 밤꽃 내 같은 것 말이오."

능효봉의 말에 경후는 내심 그의 말이 맞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미 홍교라는 시비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는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그는 불쑥 다시 물었다.

"정말 서교민은 자네가 죽인 것이 아닌가?"

"나를 흉수로 몰려고 하지 마시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무는 법이오."

이것은 협박이었다. 능효봉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모종의 결심을 한 것 같았다. 자신을 흉수로 몬다면 모든 일을 까발리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다만 이곳 일은 본관 혼자서 처리하는 게 아니야. 함곡과 풍철한이란 인물이 같이 조사하고 있네."

"상관없소."

"자네는 서교민의 방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사람이야. 그들이 물으면 어찌 대답할 텐가?"

"있는 그대로… 믿고 안 믿고는 그들 마음이오."

능효봉은 개의치 않는 듯 보였다. 실제로 자신이 죽이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어 그러는지 알 수 없었다.

"본관은 자네가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을 것이라 믿네."

경후는 다짐을 받듯 말하더니 밖을 향해 외쳤다.

"하번역. 게 있는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가서 함곡선생과 풍대협 두 분만 모셔오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밖에서 하종오가 대답이 들려오자 경후는 다시 한번 다짐을 주었다.

"자네가 잘 대답하리라 믿네."

경후는 의외의 사태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의 머리 속은 온통 혈간의 죽음에 대한 변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서교민의 죽음은 이제 그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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