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작가는 죽어서 탐정을 남긴다

반 다인의 <드래건 살인사건> <카지노 살인사건> <가든 살인사건>

등록 2006.10.13 10:20수정 2006.10.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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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건 살인사건
드래건 살인사건해문
미국의 추리작가 반 다인이 만들어낸 탐정 파일로 반스는 추리소설 역사상 유명한 탐정 중의 한명일 것이다. 반 다인은 파일로 반스가 등장하는 12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12편의 많지 않은 작품 수에도 불구하고 파일로 반스가 유명해진 이유는 '심리분석추리'라고 하는 그 독특한 수사방법에 기인한다.

또한 반 다인은 '6이라는 짝수는 기분좋은 질서 바른 숫자다. 한 작가에게 6개 이상의 추리물을 구상할 능력이 과연 있는지 의문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반 다인은 자신의 말과는 달리 총 12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스스로 입증하기라도 하듯이, 후기 6편의 작품은 초기 6편에 비해서 수준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어떤 면에서 후반기 6편은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탐정 파일로 반스라는 인물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작품의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은 곧 파일로 반스가 그 작품 속에서 제대로 된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파일로 반스는 친척으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30대의 남성이다. 뉴욕의 호화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빼어난 미남에다가 180cm의 장신에 패션감각까지 두루 갖추고 있는 인물이다. 동시에 포커와 골프, 펜싱에 능하고 심리학과 예술에 조예가 깊다. 게다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서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파일로 반스가 가지고 있는 심리학에 관심을 갖을 필요가 있다. 파일로 반스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존의 수사법과는 달리 심리학적인 면으로 접근해가기 때문이다.

파일로 반스는 첫번째 작품인 <벤슨 살인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파일로 반스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은 편이 못된다. 반스는 많은 장면에서 냉소적이고 비꼬는 말투를 툭툭 던지면서 독자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반스의 오랜 친구인 지방검사 매컴과 경시청의 히스 경사도 이런 반스의 모습에 흥분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보면 <벤슨 살인사건>에서 반스는 그럴수 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 반스가 벤슨살인사건에 뛰어들게 된 것은 '사건현장에 동행하고 싶다'고 그가 매컴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다. 파일로 반스는 그 현장에서 사건의 본질을 한눈에 꿰뜷어 본다. 하지만 수사경험이 없는 그의 의견을 매컴 검사와 히스 경사가 들어줄리 만무하다. 당연히 반스의 입장에서는 냉소적이 될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반스의 태도는 그 이후에 여러 사건을 거치면서 전면 달라지게 된다. 후반기 작품인 <드래건 살인사건> <카지노 살인사건> <가든 살인사건>에 와서 사건수사의 주도권은 완전히 파일로 반스에게 넘어오게 된다. 매컴 검사와 히스 경사는 항상 사건의 현장에 동행한다. 하지만 거꾸로 반스의 수사를 도우면서 그의 명령을 따르는 입장이 되고 만다. 그리고 수사의 주도권을 잡은 반스는 더이상 냉소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매컴과 히스를 다독거리고 위로하기도 한다.


카지노 살인사건
카지노 살인사건해문
파일로 반스는 그의 초기 사건에서 매컴과 의견충돌을 하면서 자신의 범죄관을 피력한다.

"범죄란 단순한 상황증거나 물적증거를 근거로 한 추리로서는 해결되지 않아."
"살인이란 것은 동기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야."
"물적 사실과 심리적 사실이 모순될 때는 물적 사실이 틀리는 법이야."

파일로 반스는 이런 주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추리 체계를 구축한다. 추리소설 역사상 전무후무한, 그 유명한 '심리분석추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기도 하다.

심리분석추리란, 범행의 현장에서 발견되는 범인의 성향과 심리를 파악해서 이를 근거로 추리해 나가는 방법을 가리킨다. 현대의 '프로파일링' 기법의 원조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파일로 반스는 말한다.

"행위의 정확한 심리적 본질이 드러나면 남은 일은 주어진 조건 아래에서 이런 종류의 계획을 세웠을 경우, 이번 사건과 똑같은 방법으로 해치울 기질과 정신을 가진 인물을 찾아내기만 하면 되는거야."

파일로 반스는 위의 말과 같은 방법으로 사건을 수사해간다. <벤슨 살인사건>에서는 총으로 피해자의 머리를 쏠수있는 범인의 심리 상태와 기질을 추적한다. <카나리아 살인사건>에서는 타협하는 대신에 무모하게 모든 것을 걸고 도박하는 성향의 인물을 범인으로 지목한다.

<비숍 살인사건>에서는 수학자들이 다루는 미시와 거시의 세계, 그리고 그런 수학자들의 균형감각과 억제된 감정을 논하며 추리해간다. 그리고 <케닐 살인사건>에서는 애완동물을 키울 만한 성향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며 사건을 수사한다.

반 다인의 후기 6작품이 초기 6작품과 비교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후기 작품인 <드래건 살인사건> <카지노 살인사건> <가든 살인사건>에서, 파일로 반스는 이런 심리분석을 근거로 범인을 추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무시하던 정황증거와 물적증거를 바탕으로 수사를 하기도 한다. 파일로 반스 특유의 논리적인 추론과 분석, 인간의 심리에 관한 명쾌한 강의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이런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기도 할것이다.

가든 살인사건
가든 살인사건해문
<드래건 살인사건>에서는 음울한 전설이 깃든 대저택의 살인을 다루고 있다. 파일로 반스는 작품에서 드래건에 관한 수많은 전설과 신화를 설파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사건의 핵심과 연결되지 못하고 주변을 돌 뿐이다. <가든 살인사건> <카지노 살인사건>에서는 재산을 둘러싼 가족과 주변인물의 암투를 다루고 있다. 역시 여기서도 파일로 반스의 심리분석은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물론 위의 세 작품은 나름대로 뛰어난 추리소설이다. 초기 작품들에 비해서 구성도 떨어지지 않고 분위기를 이끌어 가는 것도 성공하고 있다. '6편 이상의 작품을 쓸 능력이 있는지 의문이다'라는 반 다인의 말처럼, 어쩌면 반 다인은 후반기에 들어서 새로운 작풍(作風)으로 변신을 꾀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반 다인은 1939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겨울 살인사건>도 그 해에 발표되었다. 반 다인의 마지막 작품 제목이 '겨울' 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반 다인은 총 12편으로 자신의 작품생활을 마감할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쩔수 없이 작품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그리고 추리작가는 죽어서 탐정을 남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불멸의 탐정을. 반 다인의 마지막 작품인 <겨울 살인사건>은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파일로 반스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초기 작품 속의 파일로 반스는 냉정한 면이 강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파일로 반스의 모습도 조금씩 변해간다. 후반기 작품에서는 냉정함 대신에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보인다. 천하의 파일로 반스가 여자 때문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일 정도로.

<카나리아 살인사건>에서 파일로 반스는 35세였다. 그리고 그가 매컴을 도와서 탐정활동을 한 기간은 4년 동안이다. 그러니 후반기에서는 마흔에 가까운 나이였을 것이다. 파일로 반스도 나이를 먹으면서 좀더 여유를 갖게 된 것일까. 그리고 더 나이들기 전에 무대에서 퇴장한 것도 어떻게 보면 행운이었을지 모른다.

덧붙이는 글 | <드래건 살인사건> 반 다인 / 이정임 옮김. 해문 출판사
<카지노 살인사건> 반 다인 / 이정임 옮김. 해문 출판사
<가든 살인사건> 반 다인 / 김민정 옮김. 해문 출판사

덧붙이는 글 <드래건 살인사건> 반 다인 / 이정임 옮김. 해문 출판사
<카지노 살인사건> 반 다인 / 이정임 옮김. 해문 출판사
<가든 살인사건> 반 다인 / 김민정 옮김. 해문 출판사

가든 살인사건 - 파일로 반스 미스터리 1

S.S. 반 다인 지음, 김민정 옮김,
해문출판사, 2004


드래건 살인사건 - 파일로 반스 미스터리 3

S.S. 반 다인 지음, 이정임 옮김,
해문출판사, 2004


카지노 살인사건 - 파일로 반스 미스터리 2

S.S. 반 다인 지음, 이정임 옮김,
해문출판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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