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있어 한 시절 넉넉히 행복합니다!

아이들에게 '행복의 지식'을 먼저 가르치고 싶습니다

등록 2006.10.14 15:02수정 2006.10.14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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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여름 끝자락부터 가을 초입, 혹은 그 너머까지 한 시절 저를 행복하게 해주는 꽃이 있습니다. 꽃은 분홍색인데 하얀색 또는 진한 분홍색을 띠기도 합니다. 마치 명절날 떡을 하기 위해 불려놓은 찹쌀에 붉은 물이 살짝 내려앉은 듯하지요. 주로 물가에서 자라며, 특히 하수구 근처와 같은 더러운 물이 있는 곳에서 많이 자라므로 물의 오염 정도를 파악하는 식물로 이용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에게 꽃 이름을 말해주면 열이면 아홉은 반색을 하며 이름을 되묻습니다. 아마도 꽃 이름으로 조금 생소하기도 하고, 맑고 화사한 분홍빛을 띤 꽃치고는 이름이 너무 평범해서 그건가 봅니다. 하지만 이름을 곰곰이 되씹다 보면 고순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입 안에 꽈리가 들어 있는 듯한 착각이 일기도 하지요. 처음엔 존재감이 없다가 만나면 만날수록 새록새록 정이 깊어지는 그런 사람 같다고나 할까요.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꽃 이름이 궁금하다고요? 들꽃에 대해서 일가견이 있거나 어느 정도 관심이 있으신 분은 알만한 이름입니다. 하지만 8~9월에, 혹은 10월 중하순까지도 길가 도랑이나 냇가 물기 있는 곳이면 어디라도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을 눈여겨보거나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고마리’란 꽃 이름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요.

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사람의 취향 문제일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산이나 들, 혹은 길가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꽃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무심코 지나치는 것은 더없이 행복할 수 있는 한 순간을 허망하게 과거의 시간 속으로 묻어버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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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리 ⓒ 안준철

세상에는 땀을 흘리거나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힘쓰지 않아도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혼자서 독점할 필요도 없이 세상 사람들과 공평하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들이지요. 제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한번 나열해보지요.

- 따사로운 햇살. 선선한 나무그늘. 가을 들녘. 플라타너스 우거진 가로수길. 저녁 산책. 노을. 하늘을 나는 새. 맑게 흐르는 냇물. 풀잎에 달린 빗방울. 산. 맑은 공기. 목마를 때 마시는 물 한 모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마음의 양식이 되는 책. 하오 시간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감미로운 음악. 걸어서 찾아가는 순천만 갈대숲. 산책길에 만나는 다정한 이웃들. 그리고 눈길만 주면 내게로 다가오는 헤픈 꽃들의 웃음.

그 많은 것들 중에 요즘 저를 유난히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고마리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가도 청소시간 낙엽이 수북이 쌓인 더러운 하수도에 피어 있는 고마리를 보고는 마음을 풀어버립니다.


우리 아이들도 혹시 누추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안간힘을 쓰며 꽃을 피우고 있는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만약 그렇다면 꽃을 조금 더디 피우거나 이파리가 조금 어긋나 있는 것을 탓해서는 안되니까요.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다만, 저는 아이들이 어느 누구라도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하지만 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얼굴빛이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 않는 아이들도 많아 보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기 자신이 별로 가진 것이 없어서 행복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부모의 경제적 조건이든 개인의 능력이든 말입니다.


아이들 개개인의 행복은 부모의 경제적인 조건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머리가 좋고 나쁜 개인의 능력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욱이 최고나 일류만을 숭배하는 요즘과 같은 사회 분위기 속에서는 대다수 평범한 아이들은 설 땅이 마땅치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고 말은 해주지만 말끝이 공허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일렬로 세워 일등과 꼴등으로 서열을 매기는 사회에서는 열심히 살라는 그 말이 곧 경쟁을 부추기는 말이 되기 때문이지요. 누군가 경쟁에서 이기면 지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저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평범한 교사로서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개선하는 따위의 어마어마한 일은 감히 꿈도 꾸지 못합니다. 그러기는커녕,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의 힘들고 어려운 환경을 바꾸어줄 능력도 재간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아이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에게 행복에 대한 감수성을 키워주는 일입니다. 인간이 애써 얻으려는 모든 재화나 명예도 결국은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니까요.

'인간은 삶을 준비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을 살기 위해 태어났다.'

닥터 지바고를 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한 말입니다. 마음 속에 새기고만 있어도 금세 행복의 침이 고이는 명언입니다. 물론 삶을 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삶을 사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한국의 학생들은 평균적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대학입시를 준비한다고 하지요. 대학에 들어가면 취업준비를 하고, 취업이 되면 결혼준비를 합니다. 그만큼 준비기간이 길었으니 행복도 탄탄대로일 성싶은데 사는 모습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그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삶을 준비만 하고 정작 삶을 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는 하지 않고 입시준비만 해온 것처럼 말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배우는 이의 행동의 변화에 있고, 그 변화는 곧 인간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합니다. 제대로만 배운다면 인간은 누구나 개인은 물론 이웃과 더불어 웬만큼은 행복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도덕 시간에 교사는 학생들에게 이기심을 버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야 인간이 행복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 가르침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주고 실천하게 도와주는 것이 참된 교육이요 시험 점수로만 환산하여 서열을 매기는 것이 입시교육입니다.

이런 입시교육의 틀 속에서 좋은 점수를 받아 일류대학을 나와도 결국 이기심을 버리지 못하면 불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다시 꽃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저는 들에 핀 꽃들을 보면 시절마다 각양각색의 꽃들이 왜 피고 지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어집니다. 괜히 철학자 흉내를 내려는 것이 아니라 정말 궁금합니다. 요즘 생태 문제가 전문가들만이 아닌 사회 대중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저의 궁금증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솔직히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모든 생명의 존재가치를 인간중심으로만 생각했던 과거와는 조금씩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꽃은 인간을 즐겁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인간이 꽃을 즐겁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요즘 벌레 먹은 이파리를 보면서 벌레에게 먹이가 되어준 이파리가 참 고맙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a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꽃을 보면 즐겁고 행복합니다. 그것이 꽃이 세상에 온 이유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고 꽃이 제 인생의 들러리가 되어 저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무릇 생명이 있는 것들은 서로에게 행복의 영향력을 끼친다는 말이지요. 제가 아내를 즐거워하고 아내가 저로 인하여 행복을 느끼듯이 말입니다. 어떤 높낮이가 없이 동등한 관계 속에서.

저는 아이들에게 어떤 지식보다도 이 '행복의 지식'을 먼저 가르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제 마음이 그렇듯이 이렇게 고백하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꽃이여, 나무여, 바람이여 그대가 있어 한 시절 넉넉히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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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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