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공 잔혹사' 그들은 기계였다

70년대 60만명 종사, 그 많은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등록 2006.10.17 13:43수정 2006.10.18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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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 선거날, 여성들의 힘으로 만든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여성노동자의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사측과 남성노조원 일부가 똥물을 끼얹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1978년 2월 21일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 선거날, 여성들의 힘으로 만든 민주노조를 지키려는 여성노동자의 투쟁을 저지하기 위해 사측과 남성노조원 일부가 똥물을 끼얹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 우먼타임스

[정박미경 여성가족부 여성사전시관 학예연구실장]“난 아침 8시부터 점심시간까지 죽 재봉틀 앞에 앉아 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아무도 움직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동그랗게 모여 앉아 점심을 함께 먹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재봉틀 앞에서 먹어야만 한다. 한입 떠먹기도 전에 내 점심은 먼지로 뒤덮인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몸에 붙은 먼지 하나도 털어 내려 하지 않는다. ……2천명이 넘는 노동자가 일하는데 화장실은 겨우 3개. 화장실에 가려고 줄을 서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면 점심식사 후 휴식을 취하거나 다른 동료 노동자들과 어울려 이야기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1974년 평화시장의 한 여성노동자의 일기)

‘3번 시다’를 아십니까

동일방직이나 YH무역 등 규모가 큰 방직공장은 근무조건이 그나마 나아 여성들이 선호하는 일자리였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공장에 취직하는 대신 첫달 월급을 공장주에게 주거나, 사장 집에서 봉급 없이 몇 달을 가정부로 일하는 조건으로 취직을 약속 받기도 했다.

취직 단계에서부터 시작된 착취는 노동 과정 내내 계속되었다. 재단사와 미싱사, 시다(조수) 등으로 구성된 공고한 위계질서 속에서 자기가 담당한 일을 군소리 없이 해내야 했고, 사실상 성과급으로 지급되는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기계와 재봉틀은 쉼 없이 돌아갔다.

좁은 공간에 더 많은 노동자를 들이려는 봉제공장 공장주들은 다락방을 만들어 1평당 4명의 노동자들을 구겨 넣었다. 어린 시다들은 일이 끝난 후 이 다락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이름도 없이 ‘3번 시다’로 불리고, 기숙사에서 허드렛일까지 하고서도 남성 노동자들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감수해야 했다.

산업화의 구체적인 현장이었던 공장과 회사에서의 가족주의는 이들 미혼 여성들을 가장 열악한 위치에 고정시켰다. “당신은 가족에게 충실하고 가족을 위해 일해야 합니다”라는 슬로건은 공장에 막 취직한 어린 여성들이 처음 접하는 구호였다.

가족의 위계질서를 그대로 모방한 공장에서 사장은 물론이고 관리와 감독은 거의 남성들의 몫이었고 작업장과 기숙사에는 미혼의 여성들을 통제하고 착취하기 위한 온갖 규율이 동원되었다. 이들은 거시적으로는 노동을 통해 국가에 헌신하는 ‘산업전사’였지만, 현장에서는 가부장의 권위에 복종해야 하는 미혼의 어린 소녀로 위치 지워졌던 것이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싸운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에 순응하지 만은 않았다. 이 시기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자기의 노동 경험을 일시적인 것으로 의미화 하면서 결혼에 진입했다는 사실을 두고 노동자 정체성을 ‘완벽히’ 체득하지 못했다고 평가하거나, ‘공순이’라는 사회적인 비하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가부장적인 시선이다. 여성 노동자를 끊임없이 가족주의의 위계 속으로 개별화시키고, 그 노동을 주변적이고 비공식적인 노동으로 가치 절하하는 권력에 대해 여성들은 스스로의 방식으로 대응했고 저항했다.


자기 노동이 갖는 의미를 찾기 위해 끼리끼리 그룹을 지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공순이’라서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더욱 더 열심히 공부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가족과 고향을 떠나 있다는 것은 다른 방식의 사회적 규율 하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것이 주는 가능성과 해방감까지 포획하지는 못했다. 어린 여성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난 그 용기로 자기 세계를 만들어나갔고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여성연대를 구축해갔다.

남성 노동운동이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던 1970년대, 군부독재의 노동 탄압에 맞서 노조를 만들고 노동운동을 정치화시킨 것도 YH무역 여공들과 같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1978년의 그 유명한 동일방직 ‘똥물 사건’의 주역들은 지금까지 복직을 위해 28년 동안 싸워오고 있다. “우리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싸운다”라는,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단호하면서 강력한 항변은, 여성 노동자의 힘만큼이나 진실한 것이다.

a 사측의 부당폐업을 고발하고자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여성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키고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은 광범위한 반유신 투쟁을 불러일으키며 한국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사측의 부당폐업을 고발하고자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던 YH무역여성노동자들을 경찰이 강제로 해산시키고있다. 여성노동자들의 저항은 광범위한 반유신 투쟁을 불러일으키며 한국노동운동사에 큰 획을 그었다. ⓒ 우먼타임스

누구를 위한 산업 역군?

한국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여성 노동자들의 역할과 공헌에 대한 평가가 기존의 역사 서술 속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저임금을 감수하면서 뼈와 살이 으스러지도록 일한 결과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하게 한 ‘산업 역군’으로 언술된다.

교과서에서도 언급되는 ‘산업 역군’이라는 단어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이 바로 산업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의 위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개별 여성들의 노동 경험을 ‘근대화’라는 가치 지향으로 설명해내는 집단화된 호명으로서의 산업 역군은, 산업화의 지향과 방향에 대한 폭력적인 합의를 강요하면서 노동하는 자로서의 여성들이 노동권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것을 차단했던 것이다.

여성들의 노동 경험과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숱한 이야기들은, 여성 스스로의 삶과 여성들이 만들어 가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의 근대화 프로젝트를 정당화하는 재료로 쓰이다가 버려지는 것이다. 여성 노동자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어온 지금까지의 역사 서술은 아직도 이러한 레퍼토리를 포기하지 않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가부장적인 역사 서술을 바꿔나갈 차례다.

덧붙이는 글 | 우먼타임스-여성사전시관 공동기획

덧붙이는 글 우먼타임스-여성사전시관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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