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사슴들의 '대모'가 되다

[바깽이의 일본 간사이 여행기 ⑥] 온 '나라(奈良)'가 사슴 천지

등록 2006.10.22 14:56수정 2006.10.2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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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경

지상으로 올라와 제일 먼저 맞닥뜨린 건 사슴이었다. 나라역 지하도를 빠져 나와 100m도 채 안 걸었는데 짠! 하고 나타난 사슴 무리들. 뿔 달리고 눈망울 말간 사슴을 생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우리 가족이 하나같이 탄성을 지르며 놀랄 만한 이유가 있었다.

울타리에 갇힌 사슴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 위를 사람보다 더 많은 사슴들이 거닐고 있었던 것. 그래서 두 다리는 겅중겅중 자유롭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까만 눈망울은 호기심 가득하다. 이건 대체, 사람이 사슴을 구경하는 건지 사슴이 사람을 구경하는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이다. 정말 사슴들은 사람들의 구경거리라기보다 사람들 속에 한 무리처럼 섞여 있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사슴의 나라(奈良)로

a 사슴과자 150¥. 수익 중 일부는 사슴보호 기금으로 쓰인다고.

사슴과자 150¥. 수익 중 일부는 사슴보호 기금으로 쓰인다고. ⓒ 박경

제대로 된 동물원 하나 없는 지방으로 이사 온 지 4년, 당연히 딸애는 열광한다. 온 누리가 사슴 천지니. 사슴을 위한 과자 시카센베를 하나 사서 남편과 아이가 나누는 동안 벌써 사슴들은 몰려들었다. 떼로 몰려와 몸을 부딪는 바람에 당황한 아이는 요량할 겨를도 없이 과자를 주어 버려 손이 텅 비었다. 눈 깜짝할 새였다.

녀석들은 여행자들보다 한 수 위였다. 여행자들이 나눠주는 과자에 익숙해진 녀석들은 여행자들이 과자를 살 때부터 눈여겨본다. 과자를 사는 순간 녀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들었다.

신기한 것이 손이 가방 속으로 들어가기만 해도 빤히 쳐다보곤 하는 게 영물스러웠다. 더 신기한 것은 바로 앞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과자 냄새를 풀풀 풍기는 과자 장수에게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자를 다 주었다는 표시로 손을 탈탈 터는 시늉을 하면 비로소 녀석들은 미련 없이 긴 목을 돌렸다.

a 첫 과자는 사슴들이 몰려드는 통에 당황해서 몇 초만에 동이 나 버렸다. 사슴과 친해지면 요령이 생긴다. 과자값이 부담스러우면 미리 새우깡을 준비하시길.

첫 과자는 사슴들이 몰려드는 통에 당황해서 몇 초만에 동이 나 버렸다. 사슴과 친해지면 요령이 생긴다. 과자값이 부담스러우면 미리 새우깡을 준비하시길. ⓒ 박경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영화 <모노노케 히메>에서도 숲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슴이 나오는 걸 보면 일본인들에게 사슴은 특별한 존재인 것 같다. 야트막한 구릉과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도시 '나라'의 상징으로 사슴이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천년 세월 훨씬 전부터였다.


'나라' 일대의 권력을 잡던 후지와라 가문은 710년에 신사를 세우고 신을 모셔오게 되는데, 그 신이 타고 온 짐승이 바로 흰 사슴이었다.

사슴은 그로부터 천년 가까이 신성한 존재로 숭앙을 받게 되었고, 에도시대까지도 사슴을 죽인 사람은 생매장 등 극형에 처해졌다고 한다. 특히 나라공원의 사슴들은 1957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아주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하니, 이곳에서만큼은 '사슴팔자 상팔자', '말은 제주도로 사슴은 나라로'라고 속담을 바꿔야만 할 것 같다.


잔디가 융단처럼 깔린 나라 공원을 통과해 지나가는 동안, 아이는 줄곧 사슴과 행복했다. 어느 순간, 발밑에 깔린 까맣고 동글동글한 것이 다름 아닌 사슴 똥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진저리를 치면서도 점점 대담하게 사슴 등과 목을 어루만지고 뿔을 쓰다듬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고 가게를 들르고 토다이지(東大寺) 정문인 난타이몬(南大門)을 넘어서서까지 사슴은 사라지지 않고 함께였다. 사슴의 구역이란 게 따로 없었다. 여기 저기 제 마음껏 돌아다녔고, 도로에는 사슴들의 교통사고를 염려하듯 주의 표지판도 종종 버티고 서 있었다.

사슴에 넋 놓고 따라 걷다 보니 어느 새 토다이지 입구에 이르렀다. 아쉽지만 사슴들에게 잠깐 안녕을 고하고, 세계 최대의 목조 건물과 세계 최대의 청동불상으로 유명한 절 토다이지로 다가갔다.

신발 신고 불상 엉덩이를 보다

a 토다이지(동대사)

토다이지(동대사) ⓒ 박경

토다이지 입구 한쪽에는 나무조각으로 된 부처의 제자가 떡 버티고 앉았는데, 특이한 그 모습에 고개가 절로 갸웃한다. 왼손엔 연봉오리 같은 것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중생의 우환을 풀어준다는 의미의 시무외인(施無畏印) 모습을 하고 있다.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고 있긴 하지만 여기까진 그래도 제법 점잖은 모습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가부좌를 근엄하게 틀고 앉아서는 시뻘건 보자기를 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쫄쫄이처럼 오므려 머리까지 뒤집어 쓴 모습이 마치 어른이 아이 비옷 빼앗아 입은 것처럼 어울리지 않고 우스꽝스럽다. 생경한 모습에 어색해하고 있는데 서양 사람이 다가온다.

그는 앞에 와 서서 그 제자상을 어루만지더니 제 머리통을 열심히 문지른다. 알고 보니, 내 몸 가운데 아픈 부분을 제자상의 같은 부위에 문지른 후 내 몸에 문지르면 병이 낫거나 좋아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 서양인의 머리는 대머리였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머리 숱 적은 것은 똑같이 고민인가 보다. 이 멀리까지 와서 남들 눈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를 문질러대는 걸 보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서양인의 소원이 이루어질까 의문이다. 제자상의 머리가 너무 높아 똑같은 신체부위를 문지르기란 불가능해 보이는데 말이다. 하긴 여행지에서의 이런 행위는 효험을 꼭 믿어서라기보다는 재미를 더하기 위함인데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떻겠는가.

a 토다이지 앞 부처 제자상. 바라건대 저 유쾌한 여행자의 머리에 지금쯤 새싹이 돋기를.

토다이지 앞 부처 제자상. 바라건대 저 유쾌한 여행자의 머리에 지금쯤 새싹이 돋기를. ⓒ 박경

토다이지의 불상 다이부쯔는 과연 컸다. 불교를 통한 국가의 평화와 번영을 바라는 마음에서, 쇼무 일왕이 전국의 동 500t을 모아 26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한다.

불상의 손바닥에만 16명의 사람이 올라설 수 있는 크기라고 한다. 특이한 것은 불상을 내부의 벽에 붙여서 앞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불상의 뒷모습을 보며 돌아나가게끔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불상이 방안의 중앙에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절집에서는 불상이 실내에 자리한 이상, 한 번도 그 뒤태를 본 적이 없는지라 그것 또한 새로웠다.

하지만 여느 절처럼, 마음 모으듯 신발 벗어 모은 뒤 사뿐사뿐 걸어 들어가는 대웅전도 아니고 불상이 방 끝에 안정감 있게 자리 잡은 것도 아니어서인지, 다소 어수선하고 소란스러워 좀처럼 경건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밥 먹을 때만큼은 사슴이 귀찮아

토다이지를 나서는 순간 우리를 반기는 건 사슴들이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아까 나라역에서 내려 도시락을 샀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먹어야 할 텐데 사슴 피하랴 사슴 똥 피하랴 점심 먹을 곳이 마땅치 않다. 냄새 풍기며 도시락을 벌여 놓으면 사슴들이 다가와 헤살놓을 게 뻔한 노릇. 그렇다고 사이좋게 사슴 한입 나 한입 김밥을 나눠 먹을 수도 없잖은가.

사정이 바뀌었다. 아까는 사슴을 졸졸 따라다녔는데 이제는 사슴을 슬금슬금 피해 다닌다. 따라오는 사슴을 쫓으며 우리 가족은 밥 먹을 자리를 찾아, 온 동산을 헤맸다.

사방을 둘러보고 사슴이 없는 안전지대(?)라는 걸 확인하고 자리를 잡으려는 순간, 어김없이 언덕 너머에서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고, 달아나듯 담벼락을 돌아서면 그곳엔 더 많은 사슴 무리가 불쑥 나타났다.

그렇게 사슴들에 쫓긴 우리 가족은 토다이지 뒤편에 있는 산가쯔도 니가쯔도(三月堂 二月堂)라는 작은 절에 이르렀다. 떡심 풀린 딸과 나는 대청마루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다고 절집 마루에 앉아 도시락을 까먹을 수도 없고. 끼니 때우기를 거의 포기한 채 주린 배를 움켜 잡고 있는데, 절 주변을 둘러보던 남편이 소리치며 다가온다. 찾았단다. 밥 먹을 만한 곳을. 듣던 중 반가운 소리. 벌떡 일어나 단숨에 달려갔다.

a 허기진 채 마루에 걸터 앉아서 니가쯔도 한 컷. 저 계단을 올라가 건물 뒤로 돌아가면 훌륭한 쉼터가 나온다.

허기진 채 마루에 걸터 앉아서 니가쯔도 한 컷. 저 계단을 올라가 건물 뒤로 돌아가면 훌륭한 쉼터가 나온다. ⓒ 박경

a 니가쯔도의 쉼터. 녹차를 마음껏 마시고 스스로 설거지를 할 수 있게 싱크대가 마련되어 있다. 단, 녹차를 물병에 담아가는 것은 금지.

니가쯔도의 쉼터. 녹차를 마음껏 마시고 스스로 설거지를 할 수 있게 싱크대가 마련되어 있다. 단, 녹차를 물병에 담아가는 것은 금지. ⓒ 박경

밥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 밥 먹고 차까지 마시라고 만들어 놓은 그럴 듯한 쉼터가 그 곳에 있었다. 얼마든지 녹차를 공짜로 마음껏 마실 수가 있고, 마시고 난 그릇은 각자가 씻게끔 싱크대가 있고, 식탁과 의자가 넉넉하게 마련된 아주 훌륭한 장소였다.

참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하마터면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슴을 피해 다니며, 도시락을 손에 든 채 걸어가며 밥 먹는 신세가 될 뻔했다. 사람들도 많지 않아 한적하고, 부른 배 두드리며 내려다보는 경치도 제법 그럴 듯했다.

그래서 기억에 남는 건, 꼭 유명하고 큰 게 아니다. 세계 최대라는 토다이지의 불상보다도 밥 한 끼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해 준 토다이지 뒤편의 작은 절이 더욱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 북적대고 시끌대던 토다이지의 대웅전보다도 차 한 잔의 여유를 베풀어 준 산가쯔도 니가쯔도 사진이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딸, 사슴의 대모가 되다

이제 도시락도 다 먹었겠다, 다시 사슴들이 그리워지는 순간.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가 '도시락 먹기 전과 후가 다르다'로 바뀌어야 될 판. 토다이지 부근을 벗어나 나라역까지 되돌아 나오는 동안, 딸은 사슴들과 어울리는 기회를 원 없이 누렸다.

이제 사슴에게 과자를 나누어 주는 일까지 능숙하게 해 낸다. 요령이 생긴 것 같다. 먼저 과자를 사서 반을 갈라, 반은 사슴 눈 속여 가방 속에 집어넣고 반만 가지고 나누어 준다. 그것도 한 번에 과자 하나를 선심 쓰듯 헤프게 주지 않고 잘게 잘라 조금은 인색하다 싶게 찔끔찔끔.

딸은 그새 사슴과 친밀해져서, 사슴이 마구 들이대도 피하지 않고,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어이구 먹구 싶어쪄 그래쪄"라며 갓난아기 어르듯 사슴들과 대화하는 경지에까지 도달했다.

뿐만이 아니다. 나라역 부근까지 와서는 다가오는 사슴들은 물론, 사정거리에 있기만 하다면 제 발로 찾아가 빠짐없이 골고루 과자를 나누어 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사슴을 거두어 먹이는 모습이 사슴의 대모라도 된 듯하다.

그 많은 사슴들 중에는 뿔이 멋진 녀석도 있지만, 보기 흉하게 삐뚜름히 나 있는 녀석도 있고 백내장을 앓았는지 한쪽 눈동자가 하얀 막에 뒤덮인 녀석도 있었다. 처음 그 모습을 목격한 딸은 흠칫 놀라며 물러섰지만, 그 녀석 역시 다른 녀석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걸 이내 깨닫고는, 오히려 그 녀석에게 더욱 과자 인심을 쓰는 측은지심까지 발휘했다.

사슴과 헤어져야만 하는 순간, 아이는 발길을 떼지 못했다. 도도한 사슴들은 과자의 유혹이 없는 한 한 발짝도 더는 따라오질 않는다. 아쉬운 마음을 남겨둔 채 떠나와야만 했다.

아이와 함께하는 일본 여행이라면, '나라'에 꼭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마도 아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아름다운 사슴들의 언어를 간직하게 될 것이다. 아이들 말에도 동물들 말에도 더 이상 귀 기울이지 않게 되어 버린 어른들이라면, 키 낮은 풀숲 어딘가에서 반짝이는 작은 보석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a 거리에서 만난 표지판들. (좌) 일본. 나라.  (우) 캄보디아. 프놈바캥.

거리에서 만난 표지판들. (좌) 일본. 나라. (우) 캄보디아. 프놈바캥. ⓒ 박경

a "이제...안녕. 널 만나서 행복한 하루였어."

"이제...안녕. 널 만나서 행복한 하루였어." ⓒ 박경

덧붙이는 글 | 200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8박 9일 동안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8박 9일 동안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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