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비닐봉지, 비행기 타고 한국 오다

바깽이의 일본 간사이 여행기 ⑤

등록 2006.10.14 15:29수정 2006.10.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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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사이 스루 패스의 진가를 발휘할 순간이 왔다. 한국에서 미리 구입해 간 3일권 패스가 성인권 한 장에 5000¥이니(어린이 2500¥), 하루에 1666¥ 어치 이상의 교통수단을 이용하면 본전은 뽑는 셈이 된다.

교토에서 이미 이틀을 사용했다. 이제 마지막 하루는, 본전을 뽑고도 남을 곳인 히메지 성 가는 데 쓰는 건 당연한 일. 히메지에 가는 데 가장 빠른 편은 JR이지만 패스를 가진 이상 시떼쯔(私鐵)인 한큐나 한신을 이용해야 한다. 히메지까지 직행하기 위해서는 한신을 타야 한다. 설사 패스가 아니더라도 직통 특급인지는 반드시 확인하고 타야 한다. 특급이든 보통이든 가격은 마찬가지이니 말이다. 히메지까지는 1250¥, 왕복이면 2500¥, 본전을 넘고도 한참을 넘으니 마음이 뿌듯하지 않을 수 없다.


패스를 잘 이용하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낯선 여행지에서 버스 잘못 탔다고, 버스비 날릴까봐 내릴까 말까 주저할 필요도 없다. 얼마든지 갈아타도 패스 한 장이면 된다. 버스를 타고 내릴 때마다 급하게 호주머니를 뒤적거리거나 거스름돈을 받기 위해 뒷사람 앞길 막고 기다리거나, 거스름돈 제대로 받았는지 세어 보거나 할 필요도 없다. 우아하게 패스 한 장 내밀면 된다. 이뿐이랴. 각종 입장료도 10% 안팎으로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초록 모자를 쓴 귀여운 여자 아이 쓰루토짱 그림이 그려진 버스라면 모두 통한다. JR을 제외한 시떼쯔 노선 무제한, 오사카·교토·고베·나라 시내의 지하철과 버스를 맘껏 탈 수 있다.

a 간사이 스루 패스(좌) 한 장이면 쓰루토짱이(우) 그려진 버스를 포함해 지하철과 시떼쯔를 유효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간사이 스루 패스(좌) 한 장이면 쓰루토짱이(우) 그려진 버스를 포함해 지하철과 시떼쯔를 유효기간 동안 무제한으로 탈 수 있다. ⓒ 박경

여행은 길 위에

여행은 먹고 타고 보고 자는 일로 압축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보고 어디에서 자는가도 그렇지만, 무엇을 수단으로 어떻게 돌아다니느냐가 여행의 성격을 규정짓기도 한다. 여행의 감흥을 죽이고 살리는 일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여행은 길 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곳 저곳이 아니라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그 어디쯤에. 그래서인지 매끈하게 가 닿은 곳보다 힘겹게 다다른 곳이 더 애틋하게 기억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턴가 차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에서 더 이상 감흥을 느낄 수 없게 됐다. 등산을 하면 올라갔던 길을 반드시 되짚어 차 있는 곳으로 도로 내려와야만 한다는 사실에 숨이 막혔고, 어디를 떠나더라도 차 덕분(!)에 휘리릭 옷자락 휘날리며 종횡무진 돌아다니는 통에, 가랑비에 젖듯 젖어드는 여행은 오래고 오랜 전설이 돼 버렸다. 인적 드문 시골 정류장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홀로 기다리던 그 고적함은 빛바랜 추억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게, 누가 차 갖고 떠나래? 마음 한 켠에서는 이런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어느새 자동차는 내 신발처럼 편해져 벗어던질 수도 없게 돼 버렸다. 참으로 모순이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동차 없는 여행을 간절히 소망하게 됐다.


어쩌면, 그래서 나는 신나게 해외여행을 나서는지도 모르겠다. 나 자신, 특별히 허영기 빵빵한 아줌마도 아니고 내 땅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니 오히려, 젊은 날 쏘다니며 내 발에 저장해 둔 내 땅에 대한 기억으로 가슴 저리는 평범한 한국 사람인데 말이다. 어쨌든 미련 없이 애인 차버리듯 차를 뻥 차버리고 훌훌 떠날 수밖에 없는 게 바로 해외여행이다 보니, 그 중독성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 듯싶다.

하얀 새 히메지 성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노라니,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라는 아카시 대교가 차창 밖으로 언뜻 지나간다. 고베를 지나 어느새 히메지에 닿았다. 역에서 나와 쭉 뻗은 도로를 20분 가량 걷다 보니, 저 멀리에 우뚝 서 있는 히메지 성이 한눈에 들어왔다. 백로성이라는, 말 그대로 한 마리 새처럼 하얗고 고고한 모습이다.

일본 문화유적 가운데에 처음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히메지 성(姬路城)은 일반적으로 검은색을 띤 다른 일본 성들과 달리 흰색이라는 점부터 특이하다.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전쟁과 화재를 겪지 않아 내부를 거의 손대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최근 대대적으로 공사를 한 오사카 성이나 구마모토 성, 나고야 성과는 달리 전통적 구조를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데 그 매력을 더한다.

히메지 성은 1333년에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 1580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간사이 서부 지역(특히 큐슈 지방)을 공략하기 위한 근거지로 삼기 위해 히메지 성의 텐슈카쿠(天守閣)를 만들었다. 그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가 성주로 군림하면서 8년에 거쳐 웅장한 히메지 성을 완성 시켰다. 지금의 모습으로 성채가 정비된 것은 1618년의 일이라고 한다.

a 히메지 성.

히메지 성. ⓒ 박경

a 버섯 갓의 주름을 연상 시키는 히메지 성.

버섯 갓의 주름을 연상 시키는 히메지 성. ⓒ 박경

텐슈카쿠를 보자면 궁금해진다. 성을 받치고 있는 커다란 돌들도 대단하지만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문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 성의 가장 큰 특징인 텐슈카쿠(天守閣)는 성 내의 가장 중심으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다. 쉽게 점령 당하지 않도록 텐슈카쿠로 올라가는 길은 미로처럼 되어 있다. 전쟁에서 텐슈카쿠를 점령한다는 것은 성 전체를 점령한다는 의미. 즉, 텐슈카쿠는 성의 상징이다.

a 히메지 성의 텐슈카쿠. 외관은 5층, 내부는 지상 6층과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히메지 성의 텐슈카쿠. 외관은 5층, 내부는 지상 6층과 지하 1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 박경

텐슈카쿠 주변의 좁은 길을 따라 돌아 들어가니 뒤쪽에 가파른 계단이 드러났다. 계단을 짚고 올라가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내가 본 내부는 제법 폐쇄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생각보다 실내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되어 있어, 밖에서 보았던 새의 이미지와는 묘하게 대비됐다.

바깥과 안의 이미지가 제멋대로 섞이면서, 건축에 문외한인 나에게 히메지 성은 왠지 갇힌 새 같다는 이미지로 다가왔다. 아름답지만 더 이상 날 수 없는 새, 박제되어 버린 새. 한 시대를 군림하던 가문들의 근거지였지만, 이제 더 이상 그들의 숨결은 없었다. 이방인에게, 남의 나라 과거나 역사란 그런 것일까. 박제된 어제.

계단을 따라 꼭대기 층까지 올라갔다. 과연 밖에서 본 것처럼 오를수록 방은 점점 작아지고 높아질수록 창을 통하는 바람이 점점 시원해졌다. 세상을 향해 열린 작은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니, 히메지 일대가 눈앞에 펼쳐지고 역까지 가는 길이 곧게 뻗어 있었다.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했겠다 싶다. 실내의 오르내리는 계단은 아마도 관람자들을 위해 만든 것일 테고, 본래는 계단 없이 안에서 사다리를 내려 주면 타고 올라갔을 거라는 말도 있다.

꼭대기에 올라 창가에 다가서니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돌았다. 이제 겨우 여행 5일짼데 우리 가족은 많이 지쳤다. 아무래도 더위 탓인가 보다. 히메지 성을 둘러보고 점심까지 먹고 나니 겨우 오후 3시. 남은 오후 시간은 거창한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오사카 거리나 어슬렁거리자고 입을 맞춘 후 우리 가족은 히메지를 떠나왔다.

a (좌)성주의 문장이 새겨진 기와 (우)텐슈카쿠 꼭대기층에 있는 오사카베 신사.

(좌)성주의 문장이 새겨진 기와 (우)텐슈카쿠 꼭대기층에 있는 오사카베 신사. ⓒ 박경

a 히메지 성 텐슈카쿠의 내부.

히메지 성 텐슈카쿠의 내부. ⓒ 박경

a 텐슈카쿠 안에서 바라본 히메지 일대. 쭉 곧은 길은 역으로 이어진다.

텐슈카쿠 안에서 바라본 히메지 일대. 쭉 곧은 길은 역으로 이어진다. ⓒ 박경

비닐봉지가 비행기 탄 사연

어디를 꼭 가야 하고 무엇을 꼭 봐야 한다는 목표 없이 낯선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건, 무대에서 내려와 청바지로 갈아 입는 것처럼 홀가분한 일이고, 시험날도 아닌데 공부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일이다.

그런데 '발길 닿는 대로'라기보다는 '눈길 닿는 대로'가 더 맞는 말인지 모르겠다.
요즘 한창 멋부리는 4학년짜리 딸애는 도톤보리와 연결된 신사이바시 거리에 눈길을 빼앗겨 자꾸만 내 손을 잡아당겼으니 말이다. 하긴 눈 돌아가게 화려한 유행 패션이 가득하고, 아기자기한 기념품이 넘쳐나고, 키티 인형이 손짓을 하는데 여자아이라면 누구라도 껌뻑 넘어가게 되어 있다. 교토에서도 어찌나 예쁜 민예품이 많던지, 딸은 다리 아프다고 징징대다가도 기념품 구경할 때만큼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남편은 먹고 자고 타고 보는 것에다 쇼핑까지 하나 더 넣어야겠다고 투덜거리며 먼저 호텔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요것도 예뻐, 조것도 예뻐 감탄하면서도, 짐 생각, 돈 생각에 들었다 놨다를 여러 번, 결국 사들고 오는 건 별로 없는 걸 보면, 윈도쇼핑에 지나지 않으니 '보는 것'에 끼워 넣어도 무방할 듯싶다.

여행 기념품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은 책갈피 꽂이이다. 책갈피 꽂이는 가볍고 부피도 작고 값도 그다지 비싸지 않아서 선물하기에 좋고 수집하기에 좋다. 신사이바시 거리에서도 나는 책갈피 꽂이를 골랐다. 선물용으로 대나무 책갈피 꽂이를 여러 개 골랐는데, 물어보지도 않고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하나 하나를 포장해 준다.

a 여행 가서 사온 북마크들. (왼쪽부터 차례로) 우리 나라, 베트남, 나머지 세 가지는 일본. 일본 북마크는, 향기나는 것과 대나무로 만든 것과 꽃을 압착한 것으로 다양할 뿐 아니라 값도 일, 이천원 내외로 싼 편이다.

여행 가서 사온 북마크들. (왼쪽부터 차례로) 우리 나라, 베트남, 나머지 세 가지는 일본. 일본 북마크는, 향기나는 것과 대나무로 만든 것과 꽃을 압착한 것으로 다양할 뿐 아니라 값도 일, 이천원 내외로 싼 편이다. ⓒ 박경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는 늘 그랬다. 돈을 받기는커녕 묻지도 않고 비닐봉지에 물건을 넣어 주었고, 그것도 모자라 작은 물건 하나하나를 포장해 주는 일까지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상점마다 비닐봉지가 넘쳐났고, 사람들 손에는 쇼핑백이 겹겹이다.

심지어 교토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종이로 만든 작은 접시를 두 개 샀는데, 하나 하나 포장을 한 점원은 포스트 잇에 뭔가를 열심히 그리더니 포장 겉에다 붙인다. 뭔가 하고 봤더니, 세상에! 그것은 접시에 그려져 있던 각각 다른 무늬였다. 하나는 잠자리 그림, 하나는 꽃 그림. 포장을 해버려 어느 게 어느 것인지 구별할 수 없으니, 포스트 잇에 그려 넣은 무늬를 보고 구분하라는 뜻이다. 참 나,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친절이 지나치다 싶다.

점원의 성의를 생각하면 울 수도 없고, 환경을 생각하면 웃을 수도 없고. 비닐로 싸인 걸 포장지로 감싸고 그 위에 포스트 잇을 붙이고 나중엔 쇼핑백까지 무료로 준다.

환경에 대한 인식만큼은 우리가 훨씬 앞서 있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우리야 동네 가게를 가도 비닐봉지조차 돈을 내야 한다는 생각에, 알뜰한 아줌마들 가방엔 거울 대신 장바구니가 비상대기한 지 이미 오래. 돈 주고 사온 비닐봉지도 다시 팔겠다는 생각에 감히 버리지도 못하고 차곡차곡 모아두는 게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괜히 억울한 생각마저 들었다. 같은 지구에 살면서, 한마음으로 후손 위해 환경을 보호해야 할 판에, 우리는 아끼고 고생하는데 이것들은 펑펑 쓰면서 지구를 망치려 드네, 뭐 이런 심정이랄까.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나도 잘한 건 없다. 점원이 묻지도 않고 포장을 하면, 그냥 됐다고, 노 프러블럼, 한 마디면 될 것을, 공짜로 받는 거 손해 볼 거 없다는 심보에 그냥 무심해져 버렸다. 덕분에 우리 숙소엔, 물이며 간식거리를 살 때마다 딸려온 비닐봉지들이 날마다 쌓여 갔다.

거기서 끝나냐 하면 또 그게 아니다. 고민은 그때부터다. 그게 다 한국에서는 돈이라는 생각에, 버릴까 말까, 쓰레기통에 넣었다 뺐다를 여러 번. 그냥 한국에서 하던 대로, 비닐봉지 마다했다면 쓸데없는 고민 같은 건 안했을 텐데 말이다. 결국 비닐봉지들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까지 날아오는 호강을 하고야 말았다.

한국 사람들이여, 여기서 배운 좋은 습관 밖에 가서도 써먹을지어다.

덧붙이는 글 | 200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8박 9일 동안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2006년 8월 12일부터 20일까지 8박 9일 동안 일본 간사이 지역을 여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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