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는 판사? 진보주의자? 옳은 편 손들어줄 뿐"

[판사, 법원을 말한다 ⑤] 양심적 병역거부, 내기골프 무죄 판결한 이정렬 판사

등록 2006.10.25 13:16수정 2006.10.2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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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서울고등법원 민사2부 이종렬 판사

서울고등법원 민사2부 이종렬 판사 ⓒ 오마이뉴스 조경국

'종교적 신념,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는 무죄.'(2004년 5월)
'전국공무원노조 조합원의 연가투쟁 선고유예.' (2004년 5월)
'예비군 훈련 상습 불참자, 검찰 요구보다 높게 실형 선고.'(2004년 7월)
'내기 골프는 도박으로 볼 수 없으므로 무죄.'(2005년 2월)
'전업주부의 노동은 숙련된 특별인부의 가치로 인정.'(2005년 6월)


공통점이 느껴지는가? 우선 우리 사회에 논쟁과 고민을 던져준 법원의 판결이라는 점. 또 한 가지, 이정렬 판사(37·서울고등법원 민사2부)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판결이 나올 때마다 찬사와 비난으로 언론과 네티즌의 반응은 뜨거웠다.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서고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정렬이라는 이름 앞에 '튀는 판사'라는 말을 붙이기도 하고, 판결 성향에 따라 '진보주의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세간의 평가처럼 이 판사는 정말로 튀고 싶었을까, 아니면 법원에도 진보적인 판사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까.

"나는 그저 옳은 말 하는 편의 손을 들어줄 뿐입니다."

의외로 담담하게 밝힌 그는 지난해 7월 미국연수를 떠났다가 올해 5월 서울고등법원 배석판사로 돌아왔다. 그는 인터뷰를 몇 차례 고사했다. "이젠 열심히 일하면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계속 설득하자 그가 '소주나 함께 마시자’는 말로 수락했고, 지난 17일 저녁 신촌의 소금구이 집에서 만나게 됐다.

그에게 판결의 뒷얘기와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평가에 대한 소회, 합의부 판사로서 경험한 재판 이야기 등을 들어보았다. 인터뷰는 저녁 7시부터 밤 11시까지 4시간 동안 진행됐다.

"정치요? 나라 말아 먹을 일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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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조경국

- '여호와의 증인 사건'을 비롯하여 많은 판결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는데요. 이 판사에게 '튄다', '별나다', '돈키호테 기질이 있다', 이런 표현도 씁니다. 억울하거나 서운하지는 않던가요.
"처음에는 날 몰라서 하는 소리겠지 싶었는데, 미국에 있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요. 내가 뭔가 잘못하고, 미흡한 게 있으니까 그러는 게 아니겠어요. 어느 정도 조화를 찾을 수 있고, 접점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걸 무시했던 건 아닌가 싶고요.

(내 판결의) 결론이 틀렸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문제는 우리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고민했어야죠. 어쨌든 다른 사람이 안하는 생각을 한다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틀렸다, 이건 아니죠. 다른 사람들이 비판을 해주면 고마울 것 같은데 그런 비판은 못 받아봤어요."


- 정치나 다른 데에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분들도 있는데요.
"정세판단을 기가 막히게 못하는 제가 정치를 한다고요? 나라 말아먹을 일 있습니까.(웃음) 적어도 내가 앞으로 뭘 하려고 하는데, (튀는 것을)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어요. 문제는 뭐냐면 제 이름 달고 나가는 판결이 설득력이 있을까, 별로 없을 것 같아요. 적어도 법원이나 사회에서 인정받는 판사와 토론하고 연구도 하고 그렇게 해서 나가는 게 설득력 있지 않을까, 이정렬이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닌 것 같네. 제가 지금 추구하고 얻어야 될 바가 이것 아닌가 싶어요."

- 진짜로 이 판사가 튀는 것일까요, 아니면 법원이나 사회가 아직까지 시대 변화에 못 따라가는 것일까요.
"둘 다일 겁니다. 제가 엇나가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또 그만큼 법원이나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도 있고요. 저도 판사 10년차인데, 지금 법원 직원, 판사로 들어오는 분들의 생각 따라갈 수 있을까요? 저보고 되게 보수적이네, 아마 그럴 거예요."

- 진보주의자라는 수식어도 붙지 않습니까. 동의하시나요.
"사실 진보면 어떻고, 보수면 또 어떻습니까. 문제는 그렇게(진보주의자로) 비춰지는 게 좀 그렇더라구요. 얼마 전에 조정을 하는데 한 노동자가 저를 언론에서 봤대요. '당신 노동자편 드는 사람 아니냐'고 해요. 전 동의 못하죠. 제가 노동법 공부하긴 했지만, 판사가 편이 어디 있습니까. 맞는 게 맞는 거지. 노동자 말이 맞으면 노동자가 이기는 거고, 사용자가 옳으면 사용자가 이기는 거죠. 노동자 사건이면 당연히 (노동자가) 이겨야지, 이런 생각 안 해요."

"군대 안 가겠다는 사람 전투시키면 질텐데 왜 보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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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조경국

- 판결 얘기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만일 병역거부 사건을 다시 맡게 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결론이 달라질까요?
"결론은 같겠죠. 하지만 좀 더 (판결을) 자세히 썼을 것 같아요. 저는 (무죄가)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사람들은 '군대 안 가는 게 말이 되느냐' 이러고 있는데, 저는 OECD 국가로서 인권을 생각해보자 이랬으니, 씨도 안 먹힐 소리를 하고 있었던 거죠.(웃음) 병역 거부는 잘못됐지만, 국가가 이런 것까지 처벌해야 하느냐, 이런 걸 좀 더 설득력 있게 전개했어야 되는데… 반성해야죠."

- 군복무자들에게 욕도 많이 먹지 않았습니까.
"비난의 논지는 크게 3개였어요. 변호사한테 돈 먹었다, 저 사람 군대 안 갔다, 마지막으로 생각 이상한 놈이다. 그 사건 변호사 없었고, 저 특전사 지원해서 갔다 왔거든요. 남은 건 뭡니까? 생각이 이상하다. 제가 병신된 거죠.(웃음)"

- 어떤 분은 '이정렬 판사의 판결은 개인의 권리와 자유의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고 분석했던데요.
"그런 거 생각하고 쓴 적 한 번도 없어요. 저는 이론적으로, 학문적으로 심오한 사람, 절대 아닙니다.(웃음)"

- 그런 문제의식을 던져준 것은 맞지 않습니까.
"그거야 똘똘하신 분들이 생각해 주시는 거고. 실망하실지 모르겠는데, 양심적 병역거부 판결의 단초는 이거에요. 죽어도 군대 못 가고 차라리 감옥 가겠다는 사람들, 선봉에 보내서 전투시켜보십시오. 당연히 깨질 거 아닙니까. 지는 게임 뭐하러 합니까. 개인의 자유니 인권이니 하는 건 판결 쓰면서 뭔가 숭고한 가치를 찾다보니까 나온 거고.(웃음)"

"훈련해서 되면 도박 아니고, 안되면 도박"

- 어느 여성단체는 이 판사가 전업 주부의 노동가치를 높이 샀다고 평가하던데요.
"민사 재판하면서 주부의 경우는 일용 노임을 더 쳐줘야 된다는 결정을 했는데, 그걸 보고 여성인권 신장에 기여했다고 말하더라고요, 그런 거 모릅니다. 저보고 나가서 돈 벌어올래, 살림 할래, 하면 돈 번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드니까요. 힘들면 일당 더 주자, 그거죠."

- 내기 골프는 도박이 아니다, 이것도 논란이 많았던 판결 아닌가요.
"골프 치는 사람들 매일 연습장 가고, 외화 들여다가 국가대표 축구 외국인 감독 들여오고, 다 이기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고도리나 포커 훈련해서 잘 칠 수 있다면 당연히 해야죠. 결국 훈련해서 되면 도박 아니고, 안 되면 도박인거죠."

- 전공노 조합원들의 선고유예 판결은 고민이 많았을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무죄냐, 헌법재판소에 위헌제청하느냐도 고민했죠. 판단해보니 집단행동은 맞는데, 공무원들이 휴가를 냈고 국민의 봉사자로서의 의무를 져버린 것도 아니었어요. 공무원 노조법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이런 생각 하니 처벌의 가치가 없다고 본 거죠. 제가 좀 더 연구했어야 하는데…"

- 간통, 향토예비군법 위반에 대해선 중형을 선고하기도 했는데, 뜻밖이라고 보았습니다. 그건 어떻게 판단하신 건가요.
"전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남들도 다 지키는 건 지켜야지요. 간통이 법의 영역이냐, 도덕의 영역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법의 영역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애정 문제지만 책임은 져라, 당하는 사람(배우자)는 어떻겠느냐 이겁니다. 또 예비군 훈련 안간 사람 봐주면, 열심히 받은 사람은 뭐가 됩니까. 이렇게 말하면 보수적이죠?(웃음)"

"'간통' 애정문제지만 책임은 져야... 아직은 법의 영역에 가깝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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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조경국

- 이 판사의 판결 중 상당수가 상급심에서 파기되었는데, 예상 못하셨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특히 양심적 병역거부 같은 경우 무죄가 유지될 가능성이 없다고 봤을 때 차라리 군면제가 되는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하는 게 낫지 않았나요.
"참 가슴 아픈 것이 뭐냐면 기껏 무죄해놨는데, (상급심에서) 1년 6월형을 받았으니 차라리 진작 하지, 당연히 그런 소리 나오겠죠. 결과적으로 제가 아무 영향도 못 미치고, 오히려 피해를 끼쳤을 수 있어요. 그렇다고 결과가 이랬으니 초장에 하자?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 되도록 좀 더 다졌어야 하는데, 아쉽죠."

- 단독판사를 하다가, 올해 5월부터 고등법원 배석 판사로 가셨죠. 재판장으로 있을 때와 많이 다를 텐데요.
"고등법원(항소심)에서 보니까 제가 여태껏 못 보던 큰 그림이 조금씩 보여요. 이런 것도 있구나, 이래야 되는구나 하는, 그동안 못 느끼고 생각 못했던 것 말이죠. 최근에는 경찰의 수사관행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사건에 매달리고 있어요. 배석판사 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다음에 대법원으로 가면 더 큰 그림이 보이겠죠."

- 배석 판사라서 답답한 것은 못 느끼십니까?
"배석이라서 답답하다기 보다는 크게 보니까 현실이 답답하고, 시스템이 답답하다는 생각은 들어요. 재판 당사자들과 많이 얘기해 볼 그런 기회가 적으니까 그건 좀 아쉽죠. 다행히 우리 재판부는 운영이 배석 위주로 조정을 하고, 준비절차도 진행합니다. 만족합니다."

- 제도의 문제일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판사들은 학창시절 공부만 해서 20대에 판사가 됐는데 세상을 알면 얼마나 알겠냐, 세상 물정 모르는 거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세상 잘 모르는 것은 맞는데, 이 사람 말하는 거 거짓말이다, 이 사람 나쁜 사람이다, 이건 알겠더라고요. 일반인의 눈에 맞고, 관념에 맞는 재판을 하자. 판사들 너희들 잣대로 보지 마라, 일반인의 잣대로 봐라, 맞습니다. 판사를 못 믿는다면 배심제합시다. 이건 당연한 거예요. 법도 국민의 대표가 만들고, 나라도 국민의 대표가 다스리는데 재판은 왜 국민의 대표가 안 합니까. 이게 국민을 섬기는 거죠."

- 법원이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배심제가 빨리 도입되어야 한다?
"판사가 신뢰를 얻었으면 그런 제도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는 돈 안 먹고 있는데, 돈 안 먹는 구조를 만들라면 어떻게 만듭니까. 중요한 건 믿음을 심어줘야 되는데 백날 얘기해도 안 믿어요. 결국 머릿수가 많아지는 구조로 가야죠. 배심원 100명인데 천만원씩 먹였다? 됩니까? 안되죠. 믿음을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가겠다, 그거죠. 한편으론 참 서글픕니다."

소주 3병이 비워질 때쯤 이 판사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졌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 100명이 악질적인 교도관 1명을 집단폭행했다. 100명 모두 법정에 섰다. 유일한 증거는 지나가던 헬기가 항공 촬영한 사진 1장. 사진 속에는 99명이 폭행하고, 1명은 숨어서 지켜보는 장면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모두 유죄인가, 아니면 무죄인가."

이 판사는 "우리 사회가 때로는 한 명이 지니고 있는 가치를 지켜야 할 때도 있다"고 에둘러 답했다. 나도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왜냐고? 그 한 명은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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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법원공무원(각종 강의, 출간, 기고) 책<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 등/ 강의(인권위, 도서관, 구청, 도청, 대학에서 생활법률 정보인권 강의) / 방송 (KBS 라디오 경제로통일로 고정출연 등) /2009년, 2011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jundorap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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