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의 알갱이와 죽정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달내일기(76) 달내마을의 가을걷이를 보면서

등록 2006.10.27 14:28수정 2006.10.27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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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기 전의 달내마을
추수하기 전의 달내마을정판수
'부지깽이가 곤두선다'는 속담이 있다. 아궁이에 척 하고 드러누워 있어야 할 부지깽이도 누워 있을 틈이 없이 곤두서서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 몹시 바쁜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바로 이맘때의 시골이 그렇다.


그래도 달내마을의 가을걷이는 얼추 끝나간다. 아랫들은 다 끝났고, 산 쪽으로 계단처럼 자리잡은 다랭이논만 조금 남아 있다. 이 정도 결과를 얻기 위해선 바인더만으로 하기엔 적잖은 힘이 들었으리라.

어제 퇴근길에 차를 대놓고 내일 수업에 학습자료로 쓸 쑥부쟁이를 꺾으러 아래로 내려가니 한골어른께서 할머니와 아들과 함께 나와 벼를 베고 있었다. 아들은 울산에서 회사 다닌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월차를 내 부모님을 도와주러 온 것이리라.

베어 차곡차곡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인사 겸하여 어른에게 한마디 했다.

"올해 벼농사 잘 됐나 봐요?"
"처음 자랄 때는 잘 되는 줄 알았는데……."
"아니 그럼 무슨 일 있나요?"
"죽정이가 너무 많이 생겼어요. 비가 올 때는 많이 오고, 안 올 때는 전혀 안 와서 그런지 알이 채 박히지 않은 게 많아서……."

마을어른 내외가 추수하는 모습
마을어른 내외가 추수하는 모습정판수
어른의 논은 문자 그대로 문전옥답(門前沃畓)이다. 바로 대문(실제로는 없지만) 앞에 펼쳐진 기름진 땅이 아닌가. 새벽같이 일어나 가장 먼저 둘러보고, 가장 많이 비료와 거름을 주고, 가장 많이 발걸음 소리를 벼에게 들려준 논이었다. 그런데도 거둬들이는 벼에 죽정이가 많다니.


대신에 산 중턱에 자리잡은 천수답의 벼는 잘 됐다고 하셨다. 천수답(天水畓)은 역시 문자 그대로 물이 없으면 자랄 수 없는 논이다. 그냥 모내기만 한 뒤 비료도 약도 제대로 치지 않는다. 따라서 수확은 다른 곳의 절반이 채 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거기 논은 올해 낟알이 실하게 박혔다는 것이다.

문득 논에 말리려고 늘어놓은 벼를 보면서 우리 교육이 떠오른다. 벼 자람에 아이들 자람을 빗대보기엔 좀 어폐가 있지만 거기에 들이는 정성은 매한가지니까.


문전옥답에 온갖 정성을 다 들였건만 죽정이가 많은 벼는 극성스러운 정도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란 요즘 아이들이 연상된다. 천수답에 자란 벼는 먹고살기에 바빠 아이 키움에 들일 시간이 없었던 옛날의 아이가 될 테고. 그럼 요즘 아이가 예전 아이보다 훨씬 나은 인간으로 자라는가?

논에 예쁘게 늘어놓은 벼
논에 예쁘게 늘어놓은 벼정판수
또 이렇게도 빗대 본다. 심은 얼마 동안은 아주 잘 자랄 것처럼 보였는데 추수할 때가 되니 엉망이 돼 있는 경우는 어릴 때는 크게 될 인물처럼 보였으나 나중에 형편없는 인물이 된 것에.

그와 반대로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워낙 멀고 깊은 곳에 위치한지라) 모 심고는 그냥 내버려 두다시피한 천수답의 벼는 처음에는 형편없어 보이지만 땅힘을 받아 깊이 뿌리를 내려 황금물결을 자랑하듯이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이겨내는 힘을 갖게 된 아이에 비유해본다.

즉 하루 벌어 하루 살기에도 힘들어 부모님이 제대로 챙겨주지 않은 아이들 중에도 스스로 잘 갈무리하여 훌륭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은 챙김을 받아 잘 된 아이들보다 스스로 어려움을 이겨냈기에, 만약 살아가는 동안 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그것을 쉬 극복할 수 있다.

벼를 먹기 위해선지 잠시 쉬기 위해선지 추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까치 두 마리
벼를 먹기 위해선지 잠시 쉬기 위해선지 추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까치 두 마리정판수
잘 베어 늘어놓은 벼를 멀리서 보면 알갱이와 죽정이를 구별할 수 없다. 그러나 가까이 가 들여다보면 훤히 보인다. 사람도 겉으로 본 모습과 속내는 다르다. 첫인상과 끝인상의 다름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이렇게 따져보면 벼와 아이들은 많이 닮아 있지만, 그 둘의 차이 또한 확연히 존재한다. 한 번 죽정이는 영원히 죽정이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들의 아이는 죽정이였다가 알갱이로 변신할 수 있는 게 다르다. 그렇게 만듦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가 부모님과 바로 우리 교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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