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재혼,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부모의 노후를 파탄 시키는 자식은 애물단지입니다

등록 2006.10.27 19:51수정 2006.10.28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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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성당 현관 안입니다 만남의 장소로 손색이 없습니다

성당 현관 안입니다 만남의 장소로 손색이 없습니다 ⓒ 김관숙

그 심성 착한 친구가 커피를 산다고 해서 나는 부지런히 집을 나섰습니다. 물론 장소는 언제나처럼 저만큼 보이는 성당 현관 안에 있는 자판기 앞입니다. 자판기가 있을 정도로 현관 안은 넓습니다. 이쪽저쪽 벽 밑을 따라 의자들도 있어서 여럿이 커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아주 안성맞춤인 것입니다.


그 심성 착한 친구만 생각하면 나는 가슴이 아픕니다. 십여 년 전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고 아들 딸 모두 결혼과 동시에 분가를 해서 혼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알뜰하게 살기도 했지만 워낙 이재에 밝았던 탓에 노후 생활비 걱정은 없어서 이런 저런 운동 열심히 하고 취미생활도 하고 여행사 상품 따라 국내외 여행도 다니고 가끔씩 딸애가 맡기는 아이를 봐 주기도 하는데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입니다.

지난 여름 친구들이 나섰습니다. 그 친구만이 남편이 없는 것입니다. 그 친구에게 황혼재혼을 전재로 학력이며 성격이 비슷한 성실한 남자를 연줄 연줄로 찾아서 맞선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직 건강미가 살짝 남아 있는 흰머리에 남자 역시 상처를 했고 외아들은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해서, 남자는 혼자서 아파트에 살며 준비해 둔 노후자금으로 여행도 다니고 책도 읽고 등산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나고 나름대로 안정적인 문화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심성 착한 친구도 그 남자도 생활고는 없는 것입니다. 밥도 같이 먹고 여행도 같이 가는, 편안하고 즐거운 여생을 만들어 가며 같이 보낼 수 있는 동반자만이 없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등을 떠밀지는 않았지만 맞선 이후 그들은 서로가 자식들에게는 교제를 비밀로 하고 며칠에 한 번 만나서는 점심 아니면 저녁을 같이 먹고 헤어지고는 하는 정도로 만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후 두 달이 지난 지금 그 심성 착한 친구가 친구들에게 커피를 사겠다고 불러내는 것을 보니까 아마도 진행이 잘 되어서 국수를 먹게 되는 모양입니다.

이미 친구들이 와 있었고 그 친구가 연신 자판기 커피를 뽑아서 돌리고 있었습니다. 나도 한 컵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원래 주름이 없는 편인데다 롤 스트레이트파마를 새로 해서인지 연보라 마이를 걸친 친구의 얼굴은 유난히 예뻐 보이고 밝았습니다. 모두들 국수 언제 먹는 거냐고 궁금해 죽겠다고 빨리 팡팡 터뜨리라고 야단입니다.


그런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난 그 친구의 입에서 뜻밖에 말이 흘러 나왔습니다.

"나 그 사람과 헤어졌어. 그거 공표하려구."
"헤어졌다구? 왜?"


모두들 놀란 눈으로 집중사격을 하듯이 그 친구를 바라보았습니다. 친구는 여전히 웃음을 물고 남의 얘기를 하듯이 말했습니다.

"아직 자식들을 만나야 할 정도의 사이가 아닌데도 하루는 그 사람이 아들을 데리고 나왔더라구. 함께 밥을 먹고는 헤어져서 돌아오는데, 글쎄 그 아들이 그 사람 몰래 쫓아와서는 사업자금 좀 해 달라는 거야. 로또나 다름없는 아파트에 사시니까 어쩌구 하면서 말야. 사업자금 주면 아버지의 재혼을 적극 찬성하겠다는 눈치까지 보이면서. 그런 수모가 어딨니? 이 나이에 말야!"

친구들은 눈을 똥그랗게 뜨면서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효도는 못할망정 아버지의 노후를 파탄시키는 자식은 애물이 아니라 애물단지 중에서도 가장 못된 애물단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이구동성으로 그 남자와 헤어지기를 백 번 잘했다고 했습니다. 하마터면 황혼재혼 이전을 그리워하는 가엾은 신세가 될 뻔했다는 극단적인 말도 했습니다.

친구가 알아보니까 그 남자의 아들은, 2년 전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를 아버지와는 의논 한마디도 없이 멋대로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가 아버지가 마련해준 처자식들과 살고 있는 25평짜리 아파트까지 날려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그런 아들에게 냉정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더 도와주다가는 자신의 노후생활이 엉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성 착한 그 친구는 동갑인 그 남자와 만나는 동안 무척 즐거웠다고 합니다. 그 남자 집에 가 본 적은 없지만 지적인 냄새가 풍기는 외양처럼 소설 음악 그 옛날 학생시절에 본 외국영화 등등 무슨 이야기를 하든 서로 통하는 점이 많아서 이야기를 하다 보면 마치 오래 전에 죽은 남편같이 편안한 느낌까지 들더라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사나흘에 한번씩 만나서는 가까운 공원에 가서 나란히 걷기도 하고 자판기 커피를 빼 먹고 대중음식점에 가서 밥을 사먹고 그러면서 이야기들을 나누고 웃고는 하였을 뿐인데 그것이 활력소 구실을 해서 어떤 사정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안 만나고 전화만 주고받아도 하나도 외롭지가 않고 즐겁기만 하더라고 했습니다. 별일 없이 그대로 예쁘게 발전을 했다면 자식들에게도 공개를 하고 아름다운 황혼재혼을 준비했을 거라고 했습니다.

분통으로 이글거리는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친구가 일부러 방글거리며 코맹맹이 소리로 물었습니다.

"근데 말양, 폭 썼덩 콩 꺼풀은 어떻게 했닝?"
"내가 이십 대냐? 콩 꺼풀은 무슨. 손도 안 잡아 봤구 그냥 편안감만 느꼈을 뿐야. 근데 그 사람이 헤어지던 날 그런 말은 하더라, 못 잊을 거라구."
"히야, 완전 멜로넹. 황혼에도 멜로능 있었꾸낭---"

한바탕 웃음이 터졌습니다.

그 심성 착한 친구는, 친구들을 따라 웃다가 아무래도 황혼재혼 복을 타고 난 사람은 따로 있는 모양이라고 하면서 며칠 전 자신의 생일에 아들 딸 가족들이 모인 분위기를 이야기했습니다.

느닷없이 사위가 '혼자 사지 마시고 황혼미팅도 하고 그러세요, 즐겁게 사셔야죠. 제가 신청해 드릴게요'하고 나왔는데 딸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바람 넣지 마! 난 싫으니깐'하고 노골적으로 화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친구는 솔직히 혼자 사는 자신의 외로움을 몰라주는 딸애가 섭섭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주 잠시였다고 합니다.

"나 지금까지 자식들과 별 마찰 없이 살아왔다구. 어떤 면에서는 큰 소리까지 치면서 당당하게 살아왔어, 근데 재혼하면 그러지 못 할 거 같아. 나 그냥 이대로 당당하게 살 거야. 외로움은 내가 생각하기에 달렸어. 아프면, 니들이 있잖아. 자식들도 있구. 그니까 다시는 나 시집 보내려구들 하지 마."

"너도 안됐지만 그 사람도 안 됐네. 아들이 걸림돌이 되다니. 그니까 자식들을 너무 상전처럼 가꾸면 안 돼, 끝없이 손 내미니까 말야."

그러자 방글거리며 코맹맹이 소리하던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커피를 마시고 난 빈 종이컵을 마이크 삼아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친애하능 친구님 덜! 이제부터라두 자식들을 상전처럼 가꾸지덜 맙시당! 그 자식이 부모님 노후에 걸림돌이 됩니당! 옛말 하나두 그른 거 없습니당!"

모두들 '맞아 맞아'하면서 웃습니다. 그 심성 착한 친구도 웃고 있습니다. 전에처럼 밝게 그렇게 웃고 있습니다.

그런 친구를 보고 있자니까 문득 늙어서 말벗 해 주고 등 긁어 줄 사람은 부부밖에 없다는 말이 떠오르면서 그 친구가 전에 없이 안쓰러워집니다. 물론 웃고 있는 친구들 역시 가슴 속은 나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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