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과 인간, 그 거대한 이야기

[내 인생의 책 2] 도스토예프스키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등록 2006.10.31 19:15수정 2006.10.31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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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악령>열린책들
개인적으로 도스토예프스키에 빠져들게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에 공감했다는 것이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끊임없이 주위와 부딪히고 싸우며 세상의 오만가지 고민들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런 등장인물들에게 내 감정을 이입할 수 있었던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빠져들게 된 첫째 원인일 것이다. '절망을 호흡하고 희망이 사라져버렸을 때, 우리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 한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나는 자신을 가리켜서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어야할 인간'으로 규정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독특한 사상에 이끌렸기 때문이다. <악령>,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내용 전개나 갈등 구조가 아니었다. <악령>의 끼릴로프와 샤또프, 스따브로긴 그리고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 등이 바로 그런 독특한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다. 이들이 뿜어내는 독특한 생각과 사상이, 내가 이 작품을 처음 접했던 그 시절에 꽤나 자극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는 이렇게 신선한 사상을 가진 인물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작품 속에서 항상 정반대되는 두 부류의 인물을 각각 설정하고 있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와 스비드리가일로프, <악령>에서 끼릴로프와 샤또프,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드미트리 까라마조프와 알료샤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죄와 벌>에서 라스꼴리니꼬프의 반대에 섰던 인물이 스비드리가일로프라면,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알료샤의 반대에 있는 인물은 드미트리 까라마조프와 이반 까라마조프이다. 방탕한 인물인 드미트리는 행동의 측면에서, 이반은 사상의 측면에서 각각 알료샤와는 반대에 서 있다. 이들의 운명 또한 제각각이다. 누구는 자살하고 누구는 파멸하고, 누구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역시 흥미로운 인물들은 극단적으로 자기 주장을 하는 인물들이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끼릴로프, 이반 까라마조프 등의 인물이 거기에 해당한다. <악령>의 끼릴로프는 '신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끼릴로프는 신이 사라진 시대에 자기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한다. 그리고 자신의 사상에 마침표를 찍듯이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렇다고 끼릴로프가 위악적인 인물은 아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떨어지는 낙엽과 눈부시게 빛나는 태양을 이야기하고, 공을 가지고 천진하게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한다. 끼릴로프의 비극은 그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던 사상의 흐름과, 가슴으로 느껴지는 진실이 서로 어긋난다는 데 기인한다. 자신이 선택된 비범한 인간인가를 알고 싶어서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택한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처럼.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열린책들
반면에 이반 까라마조프는 더 도발적이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원칙에 따라서 살인하고, 끼릴로프는 원칙을 위해서 자살한다. 하지만 이반 까라마조프는 끊임없이 질문하고 고민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펼쳐간다. 라스꼴리니꼬프와 끼릴로프는 자신의 사상을 행동으로 옮겼고, 그래서 결국 파국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반은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 대신에 도발적인 질문들을 알료샤에게 던지더니 망상에 빠진 채 인사불성이 되어 버린다. 알료샤는 이반의 생각을 '반역'이라고 몰아붙이지만, 이반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알료샤를 괴롭힌다.

"내가 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야. 무슨 얘기인지 알겠어? 나는 다만 그가 창조한 세계, 이 신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거지. 나는 결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어."

끼릴로프와 이반 까라마조프는 라스꼴리니꼬프에서 기원한다. 라스꼴리니꼬프는 쏘냐에게 죄를 고백하기 전에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이 골목에서 어머니가 구걸을 시키려고 밖으로 내보낸 아이들을 보지 못했어? 그런 곳에서는 아이들이 아이들로 남아 있을 수가 없지. 그곳에서는 일곱 살짜리 아이가 음탕해지고 도둑이 돼. 그런데 아이들은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하잖아.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잖아."

이런 생각들은 보다 더 근본적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생각이기도 할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을 발표하기에 앞서, 다음 작품의 주제에 대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모든 생애를 괴롭혀 온 거대한 문제, 신의 존재"라고 직접 말했다.

그리고 이런 작가의 문제를 극대화한 작품이 바로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작 <악령>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다. 그래서인지 이 두 작품은 <죄와 벌>과 다르다. <죄와 벌>의 첫 장면은 라스꼴리니꼬프가 하숙집에서 나와서 길을 걷는 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죄와 벌>이 라스꼴리니꼬프 개인의 영혼과 내면에 초점을 둔 작품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악령>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엔 긴 도입부가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장소와 인물에 관한 장황한 서술로 작품을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 등장인물들은 한 명 한 명 무대로 올라와서 서로 얽히고설키며 거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지루하게 느껴질지 모를 이 도입부를 넘기고 나면 개성이 강한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등장인물들의 감정표현이 격렬하기 때문에 더 쉽게 몰입할 수 있다. 후반에는 법정에서의 공방전도 흥미진진하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3명의 전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형제 사이지만 너무도 다른 3명의 인물. 드미트리 까라마조프, 이반 까라마조프 그리고 알렉세이 까라마조프(알료샤).

3명의 인물에겐 각각의 개성이 있다. 드미트리는 탐욕스럽고 방탕하며, 이반은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한다. 알료샤는 신앙과 자기희생을 대표한다. 드미트리의 모습은 <죄와 벌>에서 스비드리가일로프와 비슷하다. 드미트리는, '가장 자기를 잘 속이는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 더 즐겁게 사는 겁니다'라고 말했던 스비드리가일로프의 확장판이다.

그리고 이 3명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모습도 투영되었을 것이다. 무절제한 생활과 도박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도스토예프스키, 거의 만성적인 빈곤 속에서도 합리적인 사고를 놓지 않으려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인생에서 위기가 올 때마다 성서를 펼쳐들었던 신자로서의 도스토예프스키의 모습이 각각 투영되었을 것이다.

이 3명은 대단원에서 각기 다른 운명을 맞는다. 드미트리는 파멸하고 이반은 혼수상태에 빠지고 알료샤는 아이들과 함께 활짝 웃는다. 그리고 이 작품이 완결되고 3개월 후에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망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는 알료샤의 편을 들었던 것일까? 쾌락주의는 파멸하고 신의 세계를 거부했던 이반은 자신을 견뎌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마지막에 활짝 웃었던 수도사 알료샤처럼, 도스토예프스키도 신의 존재라는 문제에 대해서 알료샤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이 작품에는 또 다른 등장인물로 알료샤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가 있다. 조시마 장로를 통해서 나오는 이야기야말로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낙원은 우리들 마음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있습니다'라며 그리스도적인 가르침을 풀어놓는 조시마 장로야말로 이반 까라마조프의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일 것이다.

시대는 바뀌어도 고전은 영원하다. 120여년 전에 도스토예프스키가 작품을 통해서 던진 질문과 메시지들은, 지금에 와서는 어찌 보면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아니 '고전은 영원하다'라는 말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렇더라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은 선과 악, 신과 인간, 죄와 벌에 관해서 생각해볼 많은 이야기들을 던져준다. '고전은 영원하다'는 말은 그래서 아직도 유효하다.

덧붙이는 글 |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당신의 책, 그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응모글입니다

악령 - 상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열린책들, 2009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 상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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