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렐라이 언덕에서 구미호를 떠올리다

[해외리포트]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여자귀신'의 문화사

등록 2006.11.03 16:54수정 2006.11.0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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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라인강 언덕 위에는 작은 마을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라인강 언덕 위에는 작은 마을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 강인규


"옛날부터 전해오는 쓸쓸한 이 말이
가슴 속에 그립게도 끝없이 떠오른다
구름 걷힌 하늘 아래 고요한 라인강
저녁 빛이 찬란하다 로렐라이 언덕"


중고등학교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있던 음악시간은 '감옥'의 좁은 틈으로 비쳐 들어오는 햇살과도 같았다. "아름답고 즐거운 예술이여…"로 시작하는 '음악에 붙임'이나, 노래로 들어가기 전 피아노 전주가 아름다웠던 '노래의 날개 위에'도 그때 배웠다.

왜 한국의 음악교과서가 외국 민요와 가곡으로 채워졌는지는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이유야 어쨌든 영어나 수학보다는 훨씬 더 즐거운 시간이었다(이 과목들도 외국 민요 못지 않게 내게 '이국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당시 귀에 익혔던 모든 가락이 소중한 추억을 이루고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을 사로잡았던 노래는 <로렐라이>였다.

a 라인강을 오가는 페리와 언덕 위의 고성. 성을 지날 때마다 성에 대한 간단한 안내방송이 나온다.

라인강을 오가는 페리와 언덕 위의 고성. 성을 지날 때마다 성에 대한 간단한 안내방송이 나온다. ⓒ 강인규


처녀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버림받고 언덕에서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며, 이후 '물귀신'이 되어 선원들을 하나 둘 노래로 꾀어 수장한다는 이야기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노래의 선율도 매혹적이었지만, 무엇보다 내 머리 속에서 (팔자에도 없는) '로렐라이' 역을 맡게 된 이웃 여학생의 덕이 컸다.

지난 7월, 드레스덴을 방문했을 때 베를린으로 가는 편한 길을 두고 굳이 마인츠에서 쾰른을 경유하는 터무니 없는 길을 택한 데에는 그런 연유가 있었다.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을 때 '지능확인'을 위해 독일어 관사 격변화(유일하게 기억하는 '독일어'다)를 읊어보는 것이 습관이 된 나로서는, 독일에서 '로렐라이'를 안 떠올린다는 것이 오히려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이 놀라운 한국 국정교과서의 위력이여!).

오후 한 시쯤 마인츠 역에 도착한 나는 안내소에 찾아가 보트 타는 곳을 묻는다. 안내소 직원은 시간을 확인해 보더니 마인츠에서 출발하는 배는 이미 떠나고 없으며, 그 대신 빙엔(Bingen)에서 코블렌츠로 가는 배가 두 시 반에 떠난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다시 기차를 잡아타고 빙엔을 향한다.


a '로렐라이' 전설의 무대가 된 로렐라이 언덕.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강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로렐라이' 전설의 무대가 된 로렐라이 언덕. 사랑하는 남자로부터 배신을 당한 후 슬픔을 이기지 못해 강 아래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 강인규

로렐라이, 세이렌 그리고 구미호

빙엔은 강가의 작은 역으로, 이국적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라인강 양편에 자리잡은 나지막한 언덕 위로 바람에 닳고 세월에 씻긴 낡은 성들이 펼쳐진다. 이윽고 배가 출발하고, 성들을 하나씩 지나칠 때마다 갑판의 스피커에서는 성의 간단한 역사가 흘러 나온다. 얼마 후 오른 편에 높은 언덕이 나타나고, 익숙한 '로렐라이' 음악이 울려 퍼진다.


가부장사회가 공통으로 지니고 있는 요소가 있다. 바로 '여자귀신'이다. 여자귀신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지닌 근원적 동경과 공포의 결합물이다. '팜므 파탈(femme fatale)'이라는 모순적 조어는 남성에게 여성이 어떻게 동경과 동시에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되는지를 보여준다.

'마초'로 둘째가라면 서러웠을 옛 서양의 뱃사람들은 뱃머리에 여자 세이렌의 나무조각상을 매달았다. '여자 물귀신'을 막기 위한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전략이었다. 그들은 여자를 멸시하면서도 여자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기원했던 것이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유행했던 이 풍습은 선주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장식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선원의 안전을 지켜주는 정령의 처소였다. 뱃머리 조각(Klaboutermannikins)은 죽은 뱃사람의 넋을 달래는 역할도 했다. 이 조각 없는 배에 탔다 목숨을 잃은 선원들의 원혼은 영원히 바다 위를 떠돌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아내를 학대하고 배에 오른 서양의 선원들은 바닷바람이 토해내는 날카로운 절규에 마른 침을 삼켰을 것이며, '사흘에 한 번씩 여자를 때린' 우리의 선비들은 밤길을 흔드는 짐승 울음소리에 사타구니를 적셨을 것이다.

파도소리를 죽음을 예고하는 세이렌의 노래로 듣거나, 바람에 흔들리는 토란잎을 구미호로 착각하고 혼비백산 도망쳤던 사내들. 여자귀신은 이성을 무력화하는 여성의 매력에 대한 공포와 가부장제가 학대하고 희생시켜 온 여자들에 대한 일말의 자책이 낳은 결합물이다.

a 로렐라이 언덕 아래쪽에는 비탄에 잠긴 모습의 로렐라이 상이 있다. 로렐라이의 모습과 노래에 홀린 선원들은 넋을 잃고 있다가 좌초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희랍의 세이렌(Siren),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닉세(Nixe) 등 유럽의 여러 문화권에 유사한 '물의 정령'의 전설이 있다.

로렐라이 언덕 아래쪽에는 비탄에 잠긴 모습의 로렐라이 상이 있다. 로렐라이의 모습과 노래에 홀린 선원들은 넋을 잃고 있다가 좌초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희랍의 세이렌(Siren), 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의 닉세(Nixe) 등 유럽의 여러 문화권에 유사한 '물의 정령'의 전설이 있다. ⓒ 강인규

유혹의 노래 사라진 로렐라이 언덕

라인강은 로렐라이 언덕 부근에서 갑자기 굽어지며 폭이 좁아진다. 이로 인해 물줄기는 급속히 빨라지고, 유속은 바위 많은 근처의 지형과 결합해 '사고다발 지역'을 만들어냈다. 바위에 부딪힌 물소리는 로렐라이 언덕의 메아리 효과로 증폭되어 사람이 흥얼거리는 듯한 묘한 소리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 이상 로렐라이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 보트와 페리의 엔진 소리가 관광객을 유혹할 뿐이다. 하긴, 난파시킬 도리 없는 철선들을 향해 노래를 부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a 유럽에서 19세기까지 유행했던 뱃머리조각(Klaboutermannikins). 선원들은 이 세이렌이 자신들의 목숨과 영혼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유럽에서 19세기까지 유행했던 뱃머리조각(Klaboutermannikins). 선원들은 이 세이렌이 자신들의 목숨과 영혼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 강인규

쾰른의 번화가에서 만난 로렐라이

라인강변에서 만날 수 없던 그 '로렐라이'를 나는 쾰른의 번화가에서 만났다. 굽이치는 머리칼로 가슴을 가린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변함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과거 선원들의 목숨을 지켜주던 (그리고 앗아가던) 세이렌. 이제는 거대 커피체인의 수익을 지켜주는 상징이 되었다. 세이렌은 이제 녹색 원 안에서 사람들을 유혹해서 '커피' 속으로 빠뜨린 후 영혼 대신 주머니를 턴다.

로렐라이의 유혹을 받으며 나는 생각한다. 왜 남자들이 몸을 던진 전설은 전해지지 않는 걸까? 남자들은 실연당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실연한 여자는 자신의 몸을 던지지만, 실연한 남자는 상대 여자를 내던지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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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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