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각하에 대한 충성심은 직설적으로, 강력히"

[내 젊음을 바친 군대 22] 대학생 정신교육용 영화와 대통령 '말씀' 자료 논란

등록 2006.11.06 11:31수정 2006.11.0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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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정훈감 시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중창작전 참관.

정훈감 시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진중창작전 참관.

1980년대 중반, 전두환 독재정권은 민주화를 외치는 대학생들만 가만 있어 준다면 타이완처럼 총통제를 만들어서 영구 집권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겐 역사적 진실을 추구하며 정의를 부르짖는 대학생들이 가장 골치 아픈 존재였다.

'국가안보, 북괴의 침략야욕'은 예나 지금이나 친일 독재 세력이 국민 협박용으로 내세워온 단골 메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면 가차 없이 불그죽죽한 색깔을 칠해 제거해 버렸다. '북괴의 침략 야욕' 논리는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해온 일품 무기였다.


그들은 국민 안보의식을 강화하기 위함이라며 대학생 병영훈련 제도를 만들었다. 학생들을 최전방에 보내 병사들과 함께 기거하며 국토방위를 직접 체험하게 한다고 설명했지만, 말이 훈련이지 사실 젊은이들에게 겁을 줘서 기를 꺾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한 공포조성 작업이었다.

'공권력의 힘을 너희들이 아는가, 매운 맛을 보여 주겠다'는 식이었다. '민주화니 뭐니 떠들어 봐야 총칼과 몽둥이 앞에선 아무 의미가 없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니 당한 자만 손해요 억울하다'고 은근히 협박해 젊은이들 사이에서 패배주의와 좌절감을 확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나라의 장래야 어찌되든, 젊은이들에게 자포자기와 패배주의를 조장해 도전의식을 잠재우고 독재체제에 순응하게 만들기 위한 참으로 무지몽매한 발상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 후, 난 "대한민국의 대학생으로서 이 시대에 데모에 가담해 본 적이 없는 자는 장차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없다, 정의감도 양심도 도덕적 용기도 없는 사람들이 지도적 위치에 오르면 나라의 장래가 어떻게 되겠는가"하고 말해 눈총을 산 적이 많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이들에게 민주화 요구 등 현실참여를 자제하도록 교육해야 하는 육군 정훈 병과의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오르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정신교육 영화, 틀을 새롭게 짰으나...

전임 정훈감한테 인수받은 업무 중에 중앙군사학교 등에서 군사훈련을 받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정신교육용 영화 제작 사업이 있었다. 지휘부에서는 빨리 추진하지 않는다고 심하게 독촉했다. 시나리오 내용을 읽어보니 상투적으로 애국심을 강변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너무나 설득력이 미약해 오히려 학생들의 반발심만 더 조장할 것이라고 판단한 난 영화사 사장과 시나리오 작가를 육군본부에서 만났다. 밤새 이런저런 궁리를 한 끝에 영화 제목을 <폭풍의 계절>이라고 직접 지었다.


영화사 사장과 시나리오 작가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제발 좀 북괴의 도발 가능성이니 뭐니 하는,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상투적인 말은 그만합시다. 진실하게 대학생의 처지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기술하십시오! 젊은이들의 정의감과 꿈 자체를 문제 삼으며 꺾어버리려는 표현은 적절치 않습니다."

무조건 몰아치지 말고 대학생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진실한 애정의 메시지가 담긴 내용으로 바꾸라고 주문했다.


그들 모두 전적으로 동감했다. "사실 그래야 하는데, 통상 지금까지 군에서는 그와 전혀 다르게 요구했습니다." 군에서 원하는 대로 그냥 써 왔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 때문에 그들 세계에서 나를 '괴짜 장군'이라 부른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쾌하지만은 않았다.

몇 번 검토한 끝에 영화를 완성했다. 육군본부의 모든 장군을 상대로 시사회를 열었다. 물론 반응은 아주 좋았다.

며칠 후 전두환 대통령이 국방부를 방문했을 때 육군참모총장은 "육군에서 대학생 군사훈련 정신교육용 영화를 하나 만들었는데 아주 효과적일 것 같습니다!"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자랑삼아 보고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기백 국방장관은 자신이 보고받지 못한 사항을 참모총장이 대통령한테 직접 말하는 건 너무 한 것 아니냐는 생각에 잔뜩 화가 난 것 같았다. 자신을 핫바지 취급했다고 받아들인 것 같았다.

보안사령관은 더 불쾌해 했다. 그런 내용은 전적으로 보안사가 책임지는 사안인데 육군에서 나서 자기 위신이 손상됐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고 했던가. 나와 정훈감실만 혼났다. 우선 영화를 만든 경위에 대해 보안사의 조사를 받았다. 육군 차원에서 계획을 세워 전임 정훈감 때부터 추진하던 사업이었기 때문에 딱히 추궁할 구실을 찾지 못한 보안사는 내용을 가지고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보안사는 '데모를 방지하려는 영화인지, 아니면 방조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영화인지 매우 애매하다'면서 상영을 중지했다. 아울러 군인 아파트 지역의 가족들을 상대로 상영 후 반응을 분석한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야 불을 보듯 뻔한 일.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답이 만들어졌고 영화 상영은 흐지부지됐다. 그들의 조치는 내게 너무나 큰 실망과 충격을 안겨줬다. 그리고 우리 정훈감실 직원들은 이런 '고래싸움'의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야근을 해야 했다.

'대략난감'한 대통령의 '연두 말씀'

새해가 되면 대통령은 '공자님 말씀' 같은 내용을 장황하게 발표했다. 군은 이것을 슬라이드로 만들어 모든 부대에 배포하고 열심히 교육했다. 들어보나 마나한 이야기들이었지만, 그렇게 했다. 어두컴컴한 강당에서 그런 슬라이드 교육을 받으면서 졸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난 교육 내용을 좀 더 설득력 있게 만들고 싶었다. 우선 제목을 '새해에 어머니가 부쳐온 글'이라고 정했다. 후방의 어머니가 아들을 걱정하면서 보내는 편지에 "오늘 아침 신문에 보니 대통령께서 한 해 동안의 나라살림에 대한 말씀을 했더구나! 한 집안 살림도 이렇게 어려운데" 하는 이야기를 담아 전개하는 방식으로 교육 자료를 만들었다.

그리고 시사회를 열었다. 그날 시사회가 끝난 다음 참모총장은 주위 사람들에게 "어떠냐"고 물었다. 다들 '참 잘 만들었구나!'하는 표정이었지만, 총장의 뜻에 맞춰 대답해야 하기 때문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눈만 껌벅껌벅하고 있었다.

이윽고 총장이 직접 트집을 잡았다. "대통령 각하의 말씀인데 간접적으로 표현할 이유가 뭐고? 직설적으로, 강력히 충성심이 표현되도록 하는 기라! 기왕 만들었으니 이번만은 그냥 하도록 해!"

이래저래 내겐 너무나 무겁고 긴 '폭풍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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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을 부하인권존중의 ‘민주군대’, 평화통일을 뒷받침 하는 ‘통일군대’로 개혁할 할 것을 평생 주장하며 그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해왔음. 만84세에 귀촌하여 자연인으로 살면서 인생을 마무리 해 가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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