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무협소설 <천지> 72회

등록 2006.11.15 08:27수정 2006.11.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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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며 선뜻 두 남녀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지 않고 있는 동안 능효봉과 설중행은 웬일인지 먼저 다가가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어쩌면 젊은 나이라 두 남녀의 벌거벗은 시신에 호기심이 일었을지도 몰랐다.

"흉수는 정말 인내심이 깊은 자군."


"쇄금도 같은 고수를 당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오."

시신을 건들지는 않고 있지만 그들은 세심하게 살피며 침상 보를 걷어올려 침상 아래까지 조사하고 있었다. 죽어있는 상태로 보아 누구라도 흉수는 침상 밑에 있다가 침상 밑에서 검을 솟구쳐 올려 두 남녀를 꼬치 꿰듯 꿰어 버린 것이 분명했다.

"저 자식들 무슨 소리하는 거야?"

풍철한이 침상 곁으로 다가가며 함곡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치며 무언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군. 흉수는 이들의 방사가 절정에 이를 때 손을 썼다는 말이군. 그러고 보니 자식들…, 꽤 쓸만한데…? 앞으로 종종 써먹어야겠어."


시신들의 피부는 약간 검붉었다. 그것은 혈맥이 팽창되는, 절정의 흥분을 느끼고 있는 순간에 죽었다는 의미다. 흉수는 분명 침상 밑에 있었다. 그렇다면 흉수는 죽은 두 남녀가 이 방에 들어와 방사를 하기 전에 이미 침상 밑에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거나 적어도 두 사람의 방사를 지켜보다가 침상 밑으로 숨어들었음이 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절정의 순간을 맞이하는 순간 살해한 것이다.

검은 정확히 쇄금도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어 흉수는 여자보다 쇄금도를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풍철한과 함곡 역시 시신 주위를 돌며 세심하게 조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특별한 단서나 더 이상 다른 가정을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해 낼 수 없었다.


"죽은 시각은 어젯밤 술시(戌時)에서 자시(子時) 정도로 보이는군."

"자네 생각이 옳을 것이네."

시신의 피부를 눌러보기도 하고 눈동자나 겨드랑이를 살피고 난 풍철한이 말하자 함곡이 고개를 끄떡였다. 풍철한이 몸을 엎드려 침상 밑을 살펴보다가 갑자기 짜증스런 목소리로 능효봉과 설중행에게 말했다.

"둘이서 침상 좀 들어봐. 그렇다고 옮기지는 말고 잠시 들고 있어."

아마 체구가 큰 그로서는 몸을 납작 엎드려 침상 밑을 살피기가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능효봉과 설중행은 마주보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언제는 흉수로 몰아대더니 이제는 마치 수하나 동생 부려 먹듯 말하는 풍철한의 말투에 도대체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었다.

허나 두 사람은 어이없는 미소를 지으면서도 침상 양쪽을 나눠 들어올렸다. 두 사람의 시신이 올려져 있는 침상은 꽤 무거웠다. 그러자 풍철한은 다리를 구부리고 머리를 약간 숙인 채 침상 밑으로 들어가 바닥을 살폈다. 청소를 한 지 오래되었는지 바닥에는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는데 분명 흉수가 움직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언제까지 들고 있어야 하는 거요?"

설중행이 침상을 들고 있기 힘들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자식…, 그 정도가 뭐가 무겁다고 투정이야."

풍철한은 여전히 침상 밑을 살피며 여유를 부렸다. 그러자 설중행이 능효봉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것은 장난기 섞인 신호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설중행이 힘든 듯 침상을 조금 내리자 밑에서 풍철한의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야…, 빨리 올리지 못해!"

침상이 내려가자 밑에 있던 쪼그리고 움직이던 풍철한의 머리가 눌려졌던 것이다. 다급하게 손을 올려 들어올리려 했지만 설중행을 힘을 주고 누르는지 올라가지 않았다.

"이 자식이 정말…?"

풍철한 역시 설중행이 장난을 치는 것을 알면서도 쪼그려 앉은 자세에다가 머리가 눌리는 상황이라 급작스럽게 힘을 줘 들어올렸다. 내리누르는 힘과 올리는 힘이 마주치며 침상이 옆으로 조금 밀렸다. 설중행의 몸도 따라 벽 쪽으로 밀렸는데 침상 좌우에 걸려있던 족자 중 하나에 어깨가 닿자 이상하게도 족자가 좌우로 흔들리며 벽 사이가 벌어져 보이는 게 아닌가?

"어…?"

설중행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침상을 한 손으로 들어올리며 또 한 손을 침상에서 떼어 족자를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벽 한쪽이 밀려있는 상태로 문 형태가 나타났다. 족자 뒤에 비밀 문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이젠 장난까지 치려고 들어…?"

설중행이 침상을 다시 들어 올려주는 덕에 침상 밑에서 기어 나온 풍철한이 주먹을 들고는 으르렁거리다 멈췄다. 그 역시 반쯤 열린 문을 보았던 것이다. 설중행과 함께 능효봉이 침상을 다시 제자리에 놓고는 자기 쪽에 걸린 족자를 옆으로 치우며 벽을 두드렸다. 혹시나 자기 쪽에 있는 족자 뒤에도 문이 있는지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지만 딱딱한 벽에서 나는 소리뿐이었다.

설중행이 발견된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곧바로 풍철한과 함곡이 따라 들어갔는데 그 속에는 폭이 넉 자 정도 되는 비좁은 통로가 벽을 따라 나 있었다.

"이런 곳은 왜 만들어 둔 것이지? 이상한 일이군."

어둠에 묻혀 끝이 분명하지 않았다. 갑자기 풍철한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함곡을 보았다.

"천리향(千里香)인가?"

풍철한이 나직하게 뇌까리자 함곡이 고개를 끄떡였다. 미세하지만 천리향이 워낙 독특해 맡을 수 있었다. 설중행 역시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코에 익숙한 천리향을 맡았다. 하지만 그는 내색 없이 주위를 살피며 벽을 따라 한발자국씩 옮기고 있었다.

"맞네. 서향이지."

"흉수는 이쪽으로 들어온 것일까? 그렇다면 흉수가 여자…?"

밀폐되어 있는 공간이라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속단하기는 이르네. 이곳은 가려라는 여자 방이 아닌가? 이런 밀폐된 공간이라면 잡냄새를 없애기 위해 천리향을 뿌려놓을 수도 있지."

"바닥이 깨끗한 것을 보니 계속 사용했던 곳인 것 같군."

"그런 생각이 드네."

함곡의 대답이 끝나기 전 저쪽 끝에서 빛이 들어왔다. 앞서 살펴 나가던 설중행이 입구를 찾은 모양이었다. 다시 들어오던 빛이 사라지고 설중행이 풍철한 쪽으로 걸어왔다.

"이 전각 뒤쪽 기단(基壇)과 연결되어 있소. 흔적은 없앴지만 누군가 그쪽을 통해 안으로 드나들고 있었던 것 같소."

"가려란 여자는 몸이 뜨거웠던 계집이었던 모양이군. 이곳으로 몰래 사내들을 끌어들였나?"

풍철한이 불쑥 농담 삼아 한 말이지만 함곡은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런 통로가 필요했을까? 더구나 머리칼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계속 사용했던 통로였다.

"그런 것도 같군. 그렇다면 이 사건은 그저 단순할 수도 있겠군."

함곡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가려라는 여자가 밤마다 사내를 끌어들이는 여자라면 관계를 갖던 사내가 질투심에 못 이겨 두 남녀를 살해했을 수도 있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가려란 여인을 만나러 왔다가 오랜만에 돌아온 쇄금도와 관계를 맺는 여인을 보고 질투심에 충동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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