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요협이 결혼 이후 정착한 전북 고창의 인촌리. 김성수의 호인 인촌(仁村)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사진 출처 : <수당 김연수>
그럼, 김성수 집안이 결합한 그 외부적 기운 혹은 행운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처음에는 만석군(萬石君) 집안과의 결혼이었고, 나중에는 개항(1876년) 이후 상황과의 '결합'이었다.
만석군 집안과의 결혼을 이룬 사람은 바로 김요협이었다. 이 점과 관련하여, 김요협이 뼈대있는 선비 집안의 자제였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이 점이 김요협의 인생 특히 결혼에서 중요한 메리트(merit)로 작용했던 것이다. 유명한 선비 집안의 영광을 빌리고자 하는 돈많은 만석군 집안에서 청년 김요협의 이같은 배경에 주목하였다.
조선 후기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가 분리되던 시기였다. 한 집안에서 사회적 지위('뼈대있는 양반 집안')와 경제적 지위('돈많은 만석군 집안')를 동시에 갖추기 힘들기 때문에, 각각의 요건을 구비한 집안들끼리 결혼을 통해 결합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던 것이다.
전국적인 선비 집안의 자제 김요협과 고부 지방의 토착 지주 정계량(鄭季良)의 딸이 결혼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부 지방은 오늘날의 전라북도 고창·부안·정읍의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었는데, 정계량은 만석군으로 불리는 대지주로서 고부 지방의 유수한 부호였다.
그런데 통상적인 경우라면 정계량의 딸이 김요협의 집으로 시집을 왔겠지만, 이 경우는 그와 정반대였다. 김요협은 결혼을 위해 전남 장성에서 전북 고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수당 김연수>에 의하면, 이는 정계량의 부인이 딸과 사위를 가까이에 두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같은 책에 따르면 "그(정계량)는 가난한 선비인 사위를 장성으로부터 인촌리에 이주케 하여 자기 집 근처에다 살림을 차려 주었다"고 한다.
김요협이 정착한 곳은 고부군 부안면(富安面)의 인촌리(仁村里)였다. 이 곳은 김성수가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이 지방에는 1977년에 복원된 '인촌 선생 생가'가 남아 있다. 훗날 동학농민전쟁이 폭발한 곳이기도 하다.
결혼 이후로 김요협은 경제적 성장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시초는 장인이 그에게 증여한 재산이었다. <수당 김연수>에 의하면, 그는 장인에게서 "약간의 전답(田畓)"을 받았다고 한다. 김요협이 지주 대열에 들어서게 된 단서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 김요협이 재산을 늘리게 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김성수 집안을 부자로 탈바꿈시킨 요인은
첫째로는 장인의 영향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의 재산 문제에 관한 논문인 <고부 김씨가의 지주경영과 자본전환>에서 김용섭은 "이 경우 친정 정씨가의 위력이 가산 경영에 힘이 되었을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겠다"라고 추론하였다.
둘째로는 김요협의 부인인 정씨의 근검절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성수 집안에서 대대로 찬양하고 있듯, 정씨 부인은 친정 아버지가 증여한 땅을 밑천으로 가산을 철저히 경영하여 재산을 늘리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다.
셋째로는 김요협의 관직 취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요협은 지주인 동시에 관료였던 것이다. 장인의 도움에 힘입어 경제적 기반을 확보한 김요협은 이후 정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김요협이 관직에 진출한 것은 마흔이 되던 1872년(고종 9년)이었다. 대원군의 권력이 서서히 기울던 시기였다. 하지만, 김용섭의 논문에 의하면, 그는 과거가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 관직에 취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