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노루는 어디로 갔을까?

달내일기(81) - 비가 오던 날, 우리 집으로 들어온 노루 한 마리

등록 2006.11.15 14:47수정 2006.11.16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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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께(13일) 저녁 7시경 울산 시내에서 모임에 참석하고 있는데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꽃실 아빠, 큰일 났어요?”
“왜 무슨 일 있어?”

혼자 집을 보기에 진짜 무슨 큰일이 생긴 줄 알고 긴장한 채 물었다.

“아 글쎄… 노… 노루가….”

말을 제대로 잊지 못하기에 아내를 진정시키려 하는데 이내, “노루가 지금 계단 바로 아래 있어요” 하는 게 아닌가. 노루가 계단 아래 있다니?

아직도 떨리는 목소리의 아내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태백이(풍산개)가 짖는 소리가 나기에 누군가 아랫길로 지나가나 했단다. 그런데 짖는 소리가 여느 때완 달라 귀 기울이니 제 친구가 오면 반가이 맞이하는 소리였다.

아무래도 웃마을 박 사장 댁 진돗개인 듯싶었다. 그 녀석은 수컷이라 풀어놓기만 하면 어여쁜 아가씨(?)가 둘이나 있는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러면 태백이와 강산이(역시 풍산개)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러나 우리는 싫다. 얌전한 규수를 꼬시려 드는 난봉꾼 같은 데다 꼭 들르기만 하면 똥을 싸놓고 가기에.


a 문을 열고 나갔더니 노루가 계단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나갔더니 노루가 계단 아래 웅크리고 있었다 ⓒ 김태현


내쫓으려고 현관문을 열었더니 정말 개처럼 생긴 녀석이 현관 바로 아래 계단에 웅크리고 있더란다. 그러나 개가 아니었다. 노루였다. 나와 함께 산책할 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던지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단다.

노루는 사람을 해치지 않지만 사람이 노루를, 바로 눈앞에 나타나 달아나지 않고 멀뚱거리며 바라보고 있는 노루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아내가 기겁을 하여 들어가 내게 바로 전화를 했던 것이다.

아내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기를 기다려 모임이 아직 끝나지 않아 갈 수 없다고 하면서 아래 산음어른에게 말씀드려 보라고 했다. 언제나 무슨 일이 생기면 앞장서 해결해 주시는 우리랑 가장 가깝게 지내는 어른이었기에 부탁드려 보라고 했다.

모임 중에도 걱정이 돼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다가 집에 부리나케 와 문을 열자마자 물었다.

“어찌 됐어?”
“산음어른이 오셔서 쫓았어요. 그런데…” 하며 말끝을 흐리는 품이 어쩐지 안도감보다 안쓰러움이 담긴 것 같아 다시 물었다.
“왜?”
“아무래도 잘못 쫓아낸 것 같아요.”

a 자꾸 돌아다보며 빗속으로 멀어져 가는 노루가 안쓰러웠다.

자꾸 돌아다보며 빗속으로 멀어져 가는 노루가 안쓰러웠다. ⓒ 김태현


이어지는 아내의 이야기는 이랬다. 어른이 오시기에 몽둥이로 때려잡나 했더니, 집에 들어온 짐승은 해치는 게 아니라면서 어르신은 노루를 보며 갖고 온 지팡이로 댓돌을 툭툭 치며 이렇게 말을 했단다.

“니가 와 여그 와 있노?”
그래도 움직임이 없자,
“퍼뜩 니 집으로 가야제. 여 있으면 안 된다카이!”

제법 힘주어 하는 말에 그제서야 일어나 마침 추적추적 내리는 빗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가더란다.

나는 도무지 아내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노루가 사람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과 사람의 꾸짖음에 물러났다는 말이.

그러나 그보다 아내를 후회하게 만든 건 아무래도 새끼를 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뒤뚱거리며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단다. 새끼 낳을 때는 됐고, 비는 오고 해서 적당한 곳을 찾다가 우리 집으로 온 것이라고...

테라스 아래는 비를 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사랑 천막이랑 넣어두었기에 바람도 막을 수 있었다. 한데보다 거기가 새끼를 낳는데 훨씬 나은 장소였으리라. 그런 걸 쫓아냈으니 마음이 아픈 모양이다.

꼭 새끼 낳으려는 게 아닐 수 있지 않느냐는 말에, 아내는 태백이와 강산이가 적으로 여겨 짖지 않고 친구처럼 짖은 것도 다 그 까닭이라 했다. 짐승은 짐승끼리 통하는 게 있다고. 아무리 적이라 해도 새끼 낳으러 온 노루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지는 않는다고.

어제 우리 부부는 밤새 뜬눈으로 지샜다. 그리고 개 짖는 소리만 나면 밖을 나갔다. 그러나 한 번 떠나간 뒤 그 녀석은 자기를 반가이 맞아주지 않은 인간이 미웠는지 오지 않았다.

오늘 아침 나를 배웅하려고 따라 나온 아내의 눈이 먼 산을 향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삽화는 김태현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덧붙이는 글 삽화는 김태현 선생님께서 도와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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