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반! 요거이 돼지불고김둥?"

[그래, 바로 이 맛] 오징어볶음과 얼크러진 돼지불고기

등록 2006.11.16 13:22수정 2006.11.17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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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종로 쪽 들머리에 ‘피맛골’이란 작은 보람판과 함께 허름한 골목이 있다. 조선시대 종로통은 고관대작들의 행차가 많았다. 고관만 납시면 길 양쪽으로 넙죽 엎드려 있어야 하는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서민들만이 이용하는 뒷골목이 생겼는데 바로 피맛골이다. 고관들의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인 피마(避馬)에서 유래했다. 지금까지도 서민들을 위한 싸고 맛있는 음식점이 즐비하다.


시민기자, 동료시민기자 꾐(?)에 빠지다

a 피맛골 골목 접어들어 찾아간 집. 서울, 그것도 광화문 언저리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데가 있을까 싶게 딱 60년대 풍경이다.

피맛골 골목 접어들어 찾아간 집. 서울, 그것도 광화문 언저리 한복판에 아직도 이런 데가 있을까 싶게 딱 60년대 풍경이다. ⓒ 나영준

“이 기자님? 여기 피맛골에 기막힌 집 있어요. 그냥 제가 쓸까 하다가 이 기자님 오랜만에 맛집기사 하나 쓰시라고 알려드리는 거예요.”

친절하게 전화까지 해준 동료시민기자. 음, 맛집기사? 그래, 구미 당기지. 안 쓴 지도 꽤 오래 됐고. 그렇지만 피맛골이야 원래 유명한 데고 싸고 맛있는 집이야 골목골목 빼곡한데 뭐 특별할라고?

그러나 메뉴에 호감이 간다. 돼지불고기와 오징어볶음의 불륜이란다. 돼지고기, 낙지, 오징어, 굴, 고등어, 동태 등과 함께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이면 아주 환장을 하다못해 오줌지리는 줄도 모르는 치가 바로 나다. 무엇보다 돼지고기 맛이라면 ‘오직 내 주둥이!’를 외치는 나다. 대한민국에 지난 반세기가 흐무러지는 동안, 나보다 돼지고기 많이 먹어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유난히 돼지고기를 좋아하셨던 선친


a 이 집에 들어가면 일 보는 아주머니가 대뜸 '두 개 하나?'하고 묻는다. 세 사람이니까 돼지불고기 2인분에 오징어볶음 1인분을 기본으로 시키겠냐는 물음이다. 각 1인분에 5천원밖에 안 한다. 셋이 밥 한 공기까지 비벼 든든하게 먹고 소주 세 병 훌쩍였는데도 2만 4천원밖에 안 나왔다(밥 한 공기 공짜). 와!

이 집에 들어가면 일 보는 아주머니가 대뜸 '두 개 하나?'하고 묻는다. 세 사람이니까 돼지불고기 2인분에 오징어볶음 1인분을 기본으로 시키겠냐는 물음이다. 각 1인분에 5천원밖에 안 한다. 셋이 밥 한 공기까지 비벼 든든하게 먹고 소주 세 병 훌쩍였는데도 2만 4천원밖에 안 나왔다(밥 한 공기 공짜). 와! ⓒ 나영준

함경남도 북청군 양화면 양화리가 고향인 아버지는 돼지고기를 참 좋아하셨다. 삼팔따라지로서는 알음 성공한 건축업자로 서울바닥에 입지를 굳힌 아버지는 가난했던 시절을 떠올리셔서인지 먹을거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때고 뭐고 없이 무슨 음식이든지 넉넉하게 해서 아랫사람들 퍼주고 동네사람들 나눠주고 당신도 푸지게 즐기고…, 물론 음식솜씨 좋은 어머니는 동네 아주머니들과 함께 늘 허리 펼 새 없었다.

겨울 들머리 요맘때면 집에서는 꼭 동태순대나 오징어순대를 만들었다. 동태나 오징어 배를 갈라 속을 다 파낸 뒤 갖은 양념과 채소를 버무려 다진 돼지고기로 속을 채웠다. 명주실로 터지지 않게 가늠 묶어 빨랫줄에 쭉 매달아놓으면 얼다 녹다를 반복하며 기막히게 숙성된다. 구워 먹어도 좋고, 쪄서 양념간장에 찍어먹어도 달금하고, 순댓국으로 끓여도 기막히고…, 한겨울 나기 순대 대여섯 광주리면 그만이었다.


“괴기맛 아는 사람이므느 당연히 돼지괴기지비. 쇠괴기느 탕으로나 제격이지 깊은 맛이야 돼지괴기만 하겠음? 거저 이거이 싸고 영양 많고 최고임매.”

우리 집 밥상엔 사시사철 돼지고기가 끊이지 않았다. 김치볶음, 김치찌개, 고추장찌개, 제육볶음, 온갖 만두와 순대종류…. 돼지고기가 빠지면 상차림이 되지 않았다. 어느 정도냐면,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삶은 웃고명을 냉장고에 넣어둔 뒤 아버지 현장 일꾼들 새참 때 시켜주는 중국음식에 담뿍담뿍 얹어 내놓을 정도였다. 내가 돼지고기와 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터.

a 이 집보다 맛있게 하는 돼지불고기, 오징어볶음은 천지일 터. 그러나 가격대비 이 집보다 좋은 곳은 서울바닥에 없으리라 장담한다.

이 집보다 맛있게 하는 돼지불고기, 오징어볶음은 천지일 터. 그러나 가격대비 이 집보다 좋은 곳은 서울바닥에 없으리라 장담한다. ⓒ 나영준

어느 날, 돼지고기를 소불고기 양념으로 재면 어떨까하고 아버지가 제안했다. 벽돌쌓기나 미장이, 목수, 그밖에 한 무리씩 마무리가 끝날 때마다 아버지는 요즈막 말로 회식을 베풀었는데 음식점이 아니라 항상 집에서 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소고기 값은 고기 가운데 가장 비쌌다. 그런데 문제는 어머니 음식솜씨였다. 워낙 손맛이 소문나다 보니 불고기를 산더미처럼 재놔도 수십 명 젓가락질에 금세 바닥이 났다.

아버지 말씀인즉, 돼지고기를 된장과 함께 일단 한 번 삶아 낸 뒤 소고기처럼 잘고 늘어지게 썰어 소불고기 양념에 재두자는 것이었다. 돼지냄새 나서 안 된다고 어머니가 말렸지만 아버지는 한 번 마음먹으면 끝까지 실행에 옮기기로 소문 난 ‘북청물장수’의 후예였다(함경도 출신이라는 사실에 자긍심이 강했던 아버지는 오죽했으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름을 어머니 반대도 아랑곳없이, 성도 다른데 ‘파인 김동환’의 이름을 따 지을 정도였다).

싸한 추억과 함께 소주 한 잔

a 돼지불고기가 알맞게 익을 무렵 오징어볶음을 옆에 살짝 올려 버무리면 소주 한 잔 안주로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밥 한 공기 비벼 뚝딱, 열 부자 안 부럽다.

돼지불고기가 알맞게 익을 무렵 오징어볶음을 옆에 살짝 올려 버무리면 소주 한 잔 안주로 제격이다. 마지막으로 밥 한 공기 비벼 뚝딱, 열 부자 안 부럽다. ⓒ 나영준

돼지불고기는 대성공이었다. 아버지는 의기양양해서 ‘거 보기요. 내래 뭐라 했음? 꼭 돈이 아까바서리 돼지불고기하자고 한 건 아임매. 깊은 맛은 돼지고기가 최고라 이거지비, 암만!’하며 너털거리셨다. 그렇게 늘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 없던 아버지는 1983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 시작과 함께 3년 내내 속병을 앓으셨다. 잊고 살았던, 아니 잊은 척하고 살았던 고향과 북쪽 가족을 떠올린 아버지는 눈자위가 짓무르기 시작했다.

1986년. 아버지는 예순여덟 되시던 해 초여름, 스물여섯 덜 익은 아들 하나 남겨두고 눈을 감으셨다. 위장천공으로 이것저것 따질 새 없이 수술을 했는데 암세포가 발견되고 말았다. 개복 후 ‘전이’라 속수무책이었다. 국립의료원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던 아버지는 끝까지 정신만은 멀쩡하셨다.

“보기요, 아들! 거 돼지불고기 한 점에다가 쇠주 한 잔만 했으므느 딱 좋겠다이.”

강한 아버지, 나는 사실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끝내 그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후회막급이다. 그렇게 가실 줄 알았으면 그깟 ‘괴기 한 점 쇠주 한 잔’ 왜 못 드렸나 말이다.

추억은 늘 아프다. 그래서 되도록 잊고 산다. 떠올릴 때마다 가슴패기를 찢으니까. 이제 불혹을 넘겨 지천명 등성이에 매달린 그 ‘덜 익은 아들’은 돼지불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 그득 따라 마시며 세상사 잊는 평범한 가장이 되어 있다. 아직 어린 아들(이잉걸)은 내가 아반(아버지) 얘기 꺼낼 때마다 슬픈 얘기 하지 말라며 도리질을 친다. 그래, 세상은 흘러가는 거다. 저도 나중에 나이 먹으면 나처럼…, 한소끔 아비를 기억하겠지.

도수 낮아진 이후 맛을 모르겠던 소주가 오늘따라 쓰면서 달다. 아린 추억 한 자락 때문에 쓰고, 마누라랑 아들 녀석 얼굴 떠올리며 희망 때문에 달다. 좋은 사람 더하기 맛난 고기 한 점에 소주 한 잔과 이바구 한 소쿠리. 그래, 이 맛만으로도 세상은 충분히 살만하다!

덧붙이는 글 | 註 : 아반(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 지역에서 아버지라는 뜻으로 흔히 쓰던 방언)

덧붙이는 글 註 : 아반(평안도, 함경도 등, 이북 지역에서 아버지라는 뜻으로 흔히 쓰던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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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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