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엄마는 내가 안즉 먹여 살릴 수 있다"

부모가 되니, 이제야 아버지의 자리가 보입니다

등록 2006.11.17 14:05수정 2006.11.2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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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아버지가 마흔,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다. 맨 좌측이 필자

아버지가 마흔,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다. 맨 좌측이 필자 ⓒ 박명순


a 아버지의 모자

아버지의 모자 ⓒ 박명순

아파트 경비실을 지날 때마다 나는 매번, 내 아버지가 생각난다. 올해로 71세이신 아버지는 오이도에서 아직도 아파트경비 일을 하신다. 용역업체에 가입하여 아파트에 투입될 수 있는 나이는 규정상 65세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반백의 머리를 염색하고 진짜 당신이 65세인 것처럼 씩씩하게 경비생활을 하고 계신다. 맛난 음식이 생기면 경비실로 내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곧 아버지를 향한 내 마음이다.

지난 추석에 찾아뵈니, "야야, 주민들이 65세 이상인 경비를 쫒아낼라고 난리도 아녀. 난 아직도 정신 또랑또랑하고 팔십까지는 일할 수 있는데. 근데 희한하지, 네 엄마 벌어먹여 살라고 그러는지 해수끼도 없어지고 검은 머리도 다시 난다야."

나는 학업을 도중에 포기해야만 했다. 조상 대대로 터전을 이루던 농사일을 버리고 혈혈단신 빈손으로 뛰쳐나와 서울 변두리에 둥지를 튼 젊은 아버지는 쇠 녹이는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시멘트 포대자루 터는 일을 하셨다.

네 명의 형제들 중 제일 성적이 우수했지만, 하루 벌어먹고 살기에도 힘에 부친 부모에게 대학엘 보내 달라는 말을 차마 입 밖에 내놓지 못했다. 아니, 더 솔직하자면, 딸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아버지께 거절당했던 것이다. 얼마 후 내 집은 형편이 좀 나아지는가 싶더니, 덜컥 큰 오빠가 씻을 수 없는 병으로 몸져누웠다. 집은 다시 가난해졌고, 남은 형제들은 겉돌았다.

어느 일요일, 간병으로 고생인 엄마를 대신해 혼자 집에 남아 부엌을 서성이는데 안방에서 끊어질 듯 말 듯, 나를 부르는 오빠의 실낱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겹게 목울대가 움직일 때마다 식구들의 이름이 하나씩 올라왔다. 오빠는 끝내 꼭 붙들고 놓지 않던 이승의 끈을 놓아 버렸고, 낚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그 날 이후 말수가 더 적어졌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으로 어머니는 입맛을 잃어 점점 야위어 갔다. 그런 데 비해 그저 말 없을 뿐 아무런 슬픈 내색도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나는 원망스러웠다. 생활고에 찌들려 늘 내천(川)자를 이마에 그리고 사는 어머니와 내가 학업을 마치지 못한 그 모든 탓을 아버지에게 돌렸다.

아버지의 무능력이 어머니를 밤늦도록 야근으로 내몰았다고 생각했으며, 그 때문에 나이 어린 나까지 연탄불에 밥을 짓고 찬물로 빨래를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시멘트 가루를 머리에 이고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신 어머니는 한 번도 웃어 보인 적이 없다. 기쁘게 해 드리고 싶어, 오후 내내 풀방구리 드나들 듯 부엌을 오가던 나도 덩달아 기운을 잃었다. 나는 내 집의 가난이 무능력한 아버지의 탓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학업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 번듯한 직장에 몸도 담았다. 그리고 반듯한 남자도 만나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나이 먹어서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았던지, 친정에 용건이 있어 전화를 걸어도 아버지가 받으면 오랜 대화가 이어지지 못했다.

전엔 내색하지 않던 아버지가, 요즘 들어선 곧잘 자식들이 온통 제 엄마만 찾는다며 섭섭해 한다. 이제 타령처럼 늘어놓던 지아비에 대한 타박이 줄어든 반면 어머니는 기댈 곳이라곤 역시 남편뿐이라며 시원찮은 자식노릇을 은근히 타박하며 아버지를 옹호하신다.

어느 해 어버이날, 바쁜 나를 대신해 남편 홀로 아이들을 데리고 아버지를 찾았다. 꽃게장이 어우러진 먹음직스러운 밥상 앞에서 술 한잔에 흐린 눈빛이 되어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시더란다. 큰 오빠를 빼닮은 남편을 보고 먼저 보낸 아들이 떠올랐는지, 당신의 먹먹한 가슴을 뭉툭한 손으로 치시며 마음에 묻은 자식 때문에 온통 마음이 아프시단다.

"장개도 못 보낸 그 놈, 내가 꼭 영혼결혼식 시켜줄텨. 두고 봐."

아버지는 줄곧 마음으로 앓고 계셨던 것이다. 게다가 사위와 외손주 앞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시며, "너그들, 네 엄마처럼 공부 열심히 혀라. 네 엄마는 이 할부지 손으로 공부 못 시켜서 정말 면목이 없다. 복도 없이 왜 못난 애빌 만나서…" 하셨다.

당신은 다 알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 딸이 별이 총총한 밤, 뒤란을 서성이며 속울음을 울었던 일과 베갯잇을 적시며 숨죽여 흘린 눈물들을.

넉넉치 않은 형편에 부모를 모셔야 한다는 오빠 내외의 부담을 아시는지, 일흔이 넘은 아버지는 언제나 씩씩하게 말씀하신다. "걱정마라, 네 엄마는 내가 안즉 먹여 살릴 수 있다." 애써 자식들에게 부담 지우려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서 늙은 가장의 고독이 느껴졌다. 너무 평범해서 슬픈 아버지의 모습에서 남편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간다.

부모 덕에 일류대학을 나와 제법 편안한 삶을 누리고 사는 자식들이 부모를 그리며 부르는 노래, '사부곡'을 나도 부르련다.

'아버지, 저는 이제 아버지가 그냥 그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해요. 아버지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돌을 이제 내려놓으세요. 제 아버지로 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세요.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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